소년이 머무는 꿈
그 후 소년은 꿈속에서 냄새를 채집하기 시작했다.
냄새를 붙잡을 순 없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과 엮을 수 있다면 가능했다. 그는 그림이라는 수단을 썼다. 눈앞의 풍경을 그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고, 세밀하게 그릴수록 냄새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기분 좋은 꿈을 꿀 때면, 소년은 자신의 노트를 꺼들었다. 들판 위 커다란 나무, 비 오는 숲, 한적한 해변의 풍경까지 노트에는 매일 밤 마주했던 꿈이 가득했다.
언제부턴가 두 눈을 감으면, 두툼한 노트가 눈앞에 펼쳐졌다. 노트는 그에게 지도나 다름없었다. 원하는 쪽을 펼치고 바라고 보고 있으면, 굳이 상상하려 들지 않아도 그림 속의 냄새가 코를 맴돌았다. 그 냄새를 따라 걸으면, 원하는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악몽과 마주하게 되어도 노트만 있으면 가볍게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었다. 학교로 가는 버스에서도, 지루한 수업 시간 시간에도 그는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가 열아홉 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커다란 가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노트를 갖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가고 싶은 장소를 고르고 있던 그가 가방 제일 깊숙한 곳에 있는 오래된 노트를 꺼냈다. 빛바랜 종이에서 낡은 냄새가 났다. 문득 그를 꿈으로 이끌었던 커다란 나무가 있는 들판이 보고 싶었다. 오랜만에 그 나무 그림을 바라보자 알싸한 냄새가 코를 감쌌다. 그는 눈을 감고 천천히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푹신한 감각이 느껴지자마자 신발을 벗어 던졌다. 싱그럽게 돋아난 풀이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두 팔로 가득 껴안았다. 울퉁불퉁하고 두꺼운 껍질과 속살까지 커다란 나무는 그대로였다.
“그거 만지면 안 되는데!”
“쉿- 조용히 해.”
나무를 안고 있던 그의 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작은 꼬마와 그 꼬마의 입을 가리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분명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에 홀로 서 있던 나무였다. 하지만 나무 너머로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산등성이를 따라 주황빛의 지붕이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어느 한 면만 그런 게 아니었다. 마을은 가운데 좁은 분지를 중심으로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뻗어가듯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도현이, 아니 이 커다란 나무가 서 있었다.
“아니, 언니가 건들면 안 되는 나무라고 했잖아. 근데 왜 뭐라고 안 하는 거야!”
투정 부리는 듯한 꼬마를 바라보는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멍하니 주변을 바라보고 있던 도현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이곳에 처음 오셨나 봐요. 그 나무는 이곳에서 신성하게 여기고 있어서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거나 만지지 않아요. 마을 사람들 모두 그렇게 대하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나무… 가 멋져서 무례를 범하고 말았네요.”
그는 나무를 오랜만에 봤다고 하려다 그러지 않았다. 이미 이곳은 그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벗어던진 신발을 챙겨 들고, 다시 주변을 돌아봤다. 아무리 봐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저… 괜찮으시다면, 마을 소개해 드릴까요?"
꿈을 넘나들며 많은 사람과 스쳤지만, 그들과 관계하는 일은 피했다. 관계에서 오는 피곤함을 느끼는 건 현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더욱이 이들은 실존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불편을 감수하며 그들과 엮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도현은 이곳을 알고 싶었다. 어떻게 들판이 분지처럼 변했고, 그곳에 마을이 들어서 게 되었는지 눈으로 보고 싶었다. 평소라면 절대 승낙하지 않았을 제안을 받아들인 건 그 때문이었다. 경계를 풀고 앞장서서 뛰기 시작한 꼬마와 그를 걱정스레 쫓아가는 언니, 소영과 묘영이라고 했다. 자매의 모습이 퍽 다정해 보였다. 도현은 자신의 이름을 '류'라고 말했다.
자그마한 마을의 길은 커다란 나무를 향해 나 있었다. 언덕에 만들어진 마을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 이유를 자매의 집 안에 들어가 보고 알게 되었다. 아담한 집에는 꼭 필요한 공간만 있었다. 취미나 유희를 위한 공간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이곳에 있는 집 모두가 그랬다. 자연을 해치지 않는 최소한의 공간으로 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 보는 도현을 살갑게 대했다. 인사를 몇 마디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그들의 집을 구경하게 되곤 했다. 집안의 창문에서 커다란 나무가 한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그 나무를 사랑하는 듯했다.
얼떨결에 한 가족의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되었다. 소영과 묘영까지 열 명이 넘는 인원이 한 식탁에 앉았다. 벽난로가 있는 따뜻한 거실에는 소박한 음식들이 넘쳤다. 언제나 고독한 탐험을 즐겼던 도현은 그 모습이 낯설었다. 현실에서도 겪어보지 못했던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후식으로 나온 차와 과일까지 비우고 나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름 말고는 밝힌 것도 없는 그에게 그들은 많은 것을 내줬다. 혼자가 된 도현이 골목을 걸었다. 밖은 이미 깜깜한 밤이 되었고, 집마다 불이 들어와 있었다. 커다란 나무가 서 있는 곳을 내려다보니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꿈을 깨고 난 그는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꿈속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과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꾸만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어를 낚아 기분이 좋아 보이던 아저씨, 직접 기른 야채라며 음식을 권하던 아주머니, 담금주를 마시는 게 낙이라며 웃던 할아버지, 도무지 대화를 이어갈 수 없도록 산만했던 아이들까지. 현실에서도 불쑥불쑥 떠올랐고, 발걸음을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어두운 밤, 그는 다시 커다란 나무 앞에 섰다. 나무에는 손바닥만 한 하얀 꽃이 피어있고, 달큰한 냄새로 가득했다. 하얀 꽃이 은은한 빛을 내며,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마을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마을은 아름다웠다. 문득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구석구석 골목을 누비고, 아주 잠깐이라도 살아보고 싶었다. 난생처음 느낀 그 감정은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유도 없이 피어난 감정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도현은 그날 밤 결심했다. 그 감정의 정체를 알아차릴 때까지만 이곳에 있어 보자고. 그에겐 이미 어디든 갈 수 있는 지도가 있었다. 잠시 머무른다고 변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더는 '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잠시면 가실 줄 알았던 그 감정은 오히려 단단해졌고, 어느새 그는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