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품없는 나무의 냄새
한 소년이 허리춤까지 오는 풀숲을 가르며 달렸다. 있는 힘껏 다리를 구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듯이 바람을 가르는 이 순간에 집중했다.
달리던 소년이 멈춰 선 곳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사방으로 뻗은 가지와 무성한 잎, 두 팔을 벌려도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굵은 허리를 가진 나무였다. 소년은 나무의 단단한 껍질을 매만졌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 묘한 향이 느껴졌다. 호기심에 갈라진 나뭇결 사이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지나온 풍경이 담긴 냄새가 펼쳐졌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의 냄새, 초록빛 물결로 일렁이던 풀잎의 냄새 그리고 커다란 나무에서 나는 알싸하고 시원한 냄새.
‘이건 내가 알고 있는 냄새야. 바로 얼마 전에 맡았던!’
화들짝 놀란 소년이 눈을 떴다. 갑자기 들판에 돌풍이 불어닥쳤다. 풀숲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를 냈고, 나뭇가지가 쉼 없이 떨렸다. 소년은 나무를 붙잡고 생각했다.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된 것인지, 이곳은 어디인지를.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달리기 전의 순간을 떠올릴 수 없었다. 바람에 날려온 커다란 나뭇잎이 소년의 얼굴을 덮었고,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소년은 어둠 속에 있었다.
그는 어두운 방 안에서 온몸을 벽에 바짝 붙이고 있었다. 영락없이 몸부림을 치다 깬 아이의 모습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벽을 바라봤다. 맥락도 없이 펼쳐진 그곳은 꿈이었다. 낯익었던 냄새의 정체는 집 근처 공원에 있던 나무에서 맡은 것이었다. 힘없이 서 있는 그 나무는 꽃은커녕 잎도 제대로 피워내지 못했다. 바로 밑에 있는 의자에 제대로 된 그늘도 만들지 못하는 볼품없는 나무. 그 의자에 앉으면 쿰쿰한 냄새가 났다. 물에 젖어 축축해 보이는 껍질에서 나는 냄새는 오래된 나무의 죽음을 알리는 듯했다. 그리고 며칠 전, 소년은 그곳에서 전혀 다른 냄새를 맡게 되었다. 알싸하고 시원한 냄새는 나무의 속살에서 났다. 껍질과는 전혀 다른 생명의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꿈속의 커다란 나무에서도 그 냄새가 났다.
찰나와 같이 지나갔지만, 그 냄새 덕분에 소년은 꿈속에서 꿈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각몽*이었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던 꿈.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던 흙의 온기, 스쳐 지났던 풀숲의 감촉, 우뚝 서 있던 커다란 나무의 생김새 그리고 그 모두가 뒤섞여 어우러졌던 냄새까지 선명했다. 그저 꿈이 아니었다. 그의 감각으로 느낀 그곳은 분명히 실재하는 세계였다. 소년은 잠들 때마다 그 풍경을 곱씹었다. 머릿속으로 커다란 나무를 생각하면, 알싸하고 시원한 새살의 냄새가 떠올랐다. 감각이 희미해질 때면 공원으로 가서 다시 그 냄새를 맡았다. 여러 차례 반복한 끝에 소년은 커다란 나무가 있는 들판 위에 섰다. 그리고 소년은 깨닫게 되었다. 냄새로 자각몽을 꿀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몽(自覺夢) : 꿈을 꾸는 중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있는 상태에서 꾸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