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밥은?

조건부면 뭐 어때

by 리을

레미가 밥 먹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

월, 수, 금 오후 9시 이후.

가끔 다른 날에 간식을 주기도 하지만 되도록 밥시간을 지키려 한다.


부쩍 먹는 욕심이 생기고, 귀뚜라미 맛을 알아버린 레미.

그리고 녀석은 밥시간도 알아차려 버린 것 같다.


퇴근하고 레미 집을 바라보면, 구석진 곳에서 등을 돌리고 잠들어있다.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어두운 침실 조명을 켜둔다.

옷을 갈아입고 쉬거나 다른 볼일을 보다 다시 레미 집 앞에 섰다.


녀석은 문 근처에 있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

얼마 전까진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요즘따라 정면을 똑바로 보면서 앞을 보며 앉아 있다.

별일 아닌 것 같지만, 녀석과 200일 넘게 살고 있는 내게는 굉장한 별일이다.


오죽하면 집 명판에 '극I'라고 이름을 붙였겠는가.

겁이 많아 사람 그림자만 보고도 도망쳤고,

구석 은신처에서 얼굴만 빼꼼 내밀곤 했다.

그랬던 녀석이 '나 여기 있어!'라는 듯이 한참을 앉아 있다니.


조심스레 문을 열고 손바닥을 슬며시 펼쳤다.

레미가 휙- 얼굴을 손바닥 있는 곳으로 돌렸다.

그리고 허공에 대고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몇몇 파충류는 이런 방식으로 냄새를 맡고, 주변을 파악한다.

마냥 귀여워 쓰다듬고 싶지만, 참아야만 한다.

느릿하고 소심한 녀석은 날름거리며 한참 밀당을 하듯이 고개만 돌린다.


대부분 등을 돌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하지만 종종 아주 느린 걸음으로 스스로 손바닥 위로 향한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발바닥이 하나, 둘!

너무 작고 가벼워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손바닥이 흔들리자, 녀석은 발바닥에 힘을 꽉 준다.

까끌까끌한 찍찍이에 닿은 것 같은 신기한 촉감이 번졌다.


어느새 손바닥 중앙에 우뚝 선 레미.

얼굴을 들이밀면, 눈을 맞추며 말하는 것 같다.


"인간?! 밥은?"


신기하게도 밥을 주는 날에 맞춰서 앞에 나와 있던 녀석.

파블로프의 개처럼 밥 주는 패턴으로 알아차린 것 같지만,

그래도 기뻤다.


그 조심스럽던 녀석이 제 발로 손 위에 올라오다니!

누가 뭐래도 엄청난 사건이다.


물론 간악한 인간은 손바닥으로 유인해서 슬쩍 머리도 만지고,

꼬리 앞까지 이어진 벼슬도 훑어본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견디던 레미는

'이 인간이 지금은 밥 줄 생각이 없다'라는 걸 알아차리면

서둘러 제 집으로 다시 들어다.


귀여움에 친히 관찰기까지 쓰게 만든 레미.

그런 레미에게 나는 밥이라는 조건으로 엮인 존재일 뿐이다.

서운하기는커녕, 알아봐 준다는 것만으로 기뻤다.


조건부면 뭐 어때?


녀석에게 위험하지 않은 존재로 함께 살아가는 것,

그걸로 충분하다.


그 작은 목표를 향해 오늘도 모르는척 손을 내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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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밥은?"


D+214


이름 : 레미

분류 : 파충류, 도마뱀

종 : 크레스티드 게코

모프 : 레드릴리

탄생일 : 25년 08월 13일

첫만남 : 25년 09월 07일

성별 : 모름

무게 : 12g!!

한 줄 메모 : 일주일에 1g씩 늘고 있다. 무게가 느는게 좋은 일이라니, 부럽다...ㅋ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