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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Feb 15. 2023

별빛 따라

우주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

내복 위에 도톰한 맨투맨과 경량 패딩 조끼, 점퍼를 하나 걸치고 나서야 롱패딩을 입는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양말을 두 켤레 신고, 목도리를 칭칭 감아 장갑을 주머니에 넣었다. 신발장에 있는 핫팩이 다 떨어진 게 못내 아쉽다. 어슴푸레한 하늘을 뚫고 삼십여 분쯤 드라이브하면, 어느새 환한 도시 불빛과 멀어진다. 가로등 불빛만 드문드문 길을 비추는 산길에 접어든다.  굽이 굽이 꼬불꼬불한 길을 차가 올라갈 때면 괜스레 조수석에서도 긴장하게 된다. 그렇게 십여 분을 달려 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선 주차장을 만난다. 차를 세워두고 다시 단단히 옷매무새를 점검한다.

그리고 깜깜한 밤, 두 발로 오르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양팔을 벌려도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넓은 길 위엔 따뜻한 색의 가로등이 보인다. 얼굴에 닿는 공기는 차갑지만, 오르막에 뜨거워진 숨이 자꾸만 안경을 흐리게 했다. 마스크를 벗어버렸다. 따뜻한 입김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난다. 끝으로 보였던 길은 모서리를 돌면 또 오르막으로 이어졌다. 그러기를 서너 번, 입에서 꼭 한 번은 '아이고'라는 말이 한 번은 터질쯤이면 옹기종기 모인 불빛들이 보인다. 눈에 띄는 하얀 불빛의 글자, 김해천문대. 드디어 도착했다.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예약한 표를 구하러 갔다. 예약해 두었던 표는 가상 천체를 보며 해설을 듣는 프로그램이다. 다행히 오늘 날씨도 좋아 맨눈으로 실제 하늘 위의 별을 보는 프로그램도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날씨가 좋지 않아 별 하나 없는 흐린 하늘에 설명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오늘은 그 아쉬움을 좀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건물 안에 있는 가상 천체 관측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그랗고 작은 공간에 의자가 두 줄이 테두리로 놓여 있다. 정중앙에는 원통형으로 생긴 카메라가 내 키보다 높게 서 있다. 그리고 가장 독특한 점은 천장이 돔구장처럼 둥글었다. 하얗고 둥근 천장 아래 사람들이 빼곡하게 둘러앉았다. 잠시 뒤 해설해주실 선생님이 들어왔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의자 오른쪽에 있는 버튼을 누르라고 말했다. 버튼을 누르자 등받이가 스르륵 넘어갔다. 하얀 천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자그마한 일에도 곁에 있던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왠지 기분 좋게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공간이 차츰 어두워졌고, 어느새 까만 하늘 위 쏟아질 듯 빼곡한 별빛이 눈앞에 펼쳐졌다.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디선가 날아온 시원한 바람이 코끝을 건드리는 것만 같다. 분명 갇힌 공간임을 알고 있는데, 머리 위에 떠 있는 별빛이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나긋나긋한 선생님의 설명이 시작됐다. 별의 크기, 밝기에 따른 나이, 탄생과 죽음. 그리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우주와 내가 발붙이고 있는 작디작은 지구, 몇억 광년을 건너 내게 닿은 별빛. 그리고 그를 지켜본 먼 옛날의 사람들은 밤하늘에 이야기를 담아뒀다. 의미 없이 흩뿌려진 별들이 점을 잇고, 형상을 상상하고 별자리로 불렀다. 형제의 진한 우정, 때로는 가슴 아픈 삶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믿을 수 없이 광활한 우주와 만나면서 묘한 조화를 이뤘다.


가상 체험이 끝나고, 밖으로 나와 실제 하늘을 바라봤다. 추운 겨울, 힘겨운 언덕을 올라오는 이유는 이 순간 밝혀진다. 바닥을 비출 정도로 빛나는 달과 밝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별 그리고 까만 하늘에 가만히 시선을 멈추면 슬며시 얼굴을 내미는 별까지 담긴 하늘이 사방에 보인다. 평소라면 그냥 별이라 스쳐 지날 것들을 나도 모르게 연결하고 그림을 그리게 된다. 좀 전 프로그램에서 배운 북극성 찾기를 바로 써먹어 본다. 겨울에는 M자 모양의 카시오페이아를 찾고 선을 잘 연결해 가다 보면 북극성을 만날 수 있다. 지구의 자전축 위에 있어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북극성은 별로 밝은 별이 아니다. 선생님 말대로 찾아보니 연장선 끝에 희미하게 걸린 별 하나가 보인다. 인연도 없는 북극성이 왜 그리 반가운지. 한참을 들여다봤다.


어느새 두 번째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까만 하늘에 초록빛 레이저가 등장했다. 선생님 손에서 시작된 레이저는 하늘로 뻗어 별이 있는 곳에 닿았다. 가상천체 프로그램을 들었던 덕분에 겨울철에 큰 별자리 여섯 개를 금새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수업의 하이라이트는 천문대에 구비된 망원경으로 다양한 천체를 구경하는 것. 오늘은 밝게 뜬 반달과 화성과 목성, 성단과 성운을 볼 수 있는 행운의 날이라고 했다. 점으로 보이는 빛은 망원경 안에서 본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한쪽 눈으로, 그것도 덩치는 어마하게 크지만, 보는 구멍은 동공 크기 밖에 안 되는 렌즈에 잘맞춰야만 한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렌즈 안에 콩알만한 무언가들이 보인다. 울퉁 불퉁하고 거친 표면과 어두운 색이 뒤섞인 달의 표면, 줄무늬 가스로 온몸을 두르고 곁에는 네 개의 위성을 둔 목성, 아무리 들여다봐도 붉은 콩알로 보이던 화성, 크고 작은 별들이 무리 지어 좀생이 별이라 불리던 성단, 푸르고 붉은 별들이 탄생하고 죽는 성운까지. 렌즈마다 다른 모습의 콩알들이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었다.


30분의 두 번의 프로그램은 어디에도 내놓기 부끄러운 작은 지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작은 지식에도 밤하늘이 완전히 다르게 와닿았다. 거대한 시공간 속에 콩알로 보았던 별, 행성, 위성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작은 존재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 시원해졌다. 조금 마음대로, 좋을 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증거 같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뭐- 그런 거창한 게 아니더라도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장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반가워할 수 있게 만드는 지식이라면, 그냥 알아두고 싶다. 


힘겹게 올라왔던 언덕을 내려가며 몇 번이고 생각했다. 계절이 바뀌고 또 하늘이 맑은 날 이곳에 오자고, 그땐 더 반갑도록 우주의 언어를 배우고 오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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