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을 Apr 06. 2023

그런 날

수만 가지 감정이 요동치는 날

수만 가지 감정이 요동치는 날이 있다.


그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은 요즘은 더욱 그런 날들과 마주한다. 작은 일에 즐거워했다가 그보다도 작은 일에 자존심 상했다. 타인과 비교에서 오는 자존심만큼 무너지기 쉬운 것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어느새 그렇게 나를 대하고 있다. 사회를 탓해보고, 타인의 시선을 탓해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내 안에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먼발치에 서서 바라보면 언제나 그랬다.


6시 20분 알람이 울린다. 눈도 뜨지 못하고 손으로 머리맡을 더듬어 알람을 끈다. 여전히 꿈과 현실 사이 어디쯤 헤매고 있던 나는 또 다른 소리에 결국 눈을 뜨고 만다. 이제 일어나자는 다부진 목소리와 좀만 더 자자는 달달한 목소리가 싸우는 소리에. 슬며시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


6시 35분. 잠깐의 뒤척임과 망설임에 15분이 지났다. 새벽의 시간은 유독 빠르게 흐른다. 지난 월요일의 나는 다디단 목소리에 넘어가 따뜻한 이불에 파묻혔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옆에서 또 다른 알람이 울렸다. 부스럭 뒤척임이 옆에서 들린다. 소리가 금세 멈춘 걸 보니 남편도 목표한 시간에 일어나기는 글렀나 보다.


가장 큰 알람이 울리는 시간 7시.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자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불 밖으로 발을 빼꼼 밖으로 내보지만,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도톰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아침의 모든 계획을 철회하기로 했다.


화장실 가고픈 마음을 더는 참을 수 없어 이불에서 벗어났다. 깜깜한 방은 시간 감각을 더욱 무디게 만든다. 잽싸게 이불로 돌아왔다. 휴대전화 모퉁이에는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 적혀있었다. 슬쩍 발을 뻗어 암막 커튼을 밀어냈다. 구름도 없이 맑은 하늘에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빼곡하게 들어선 높고 낮은 건물들, 멀리 긴 손톱처럼 보이는 낙동강, 그 근처 아파트가 촘촘하게 서 있는 저기가 아마도 명지일 것이다. 그 아래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이 보였다. 오가는 차선 모두가 빽빽한 것이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것만 같다. 이른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이다 한데 모여 멈춰버린 사람들. 그리고 마치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듯이 그 모두를 지켜보고 있는 나.


어디선가 경고음이 들렸다.


다시 커튼을 치고, 등을 돌려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손가락은 이미 웹툰 플랫폼을 서성이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웹툰을 하나 골라 읽기 시작했다. 완결은 나지 않았지만 200화 넘게 쌓여있으니 시도하기 좋아 보였다. 요즘은 정말 다양한 세계관에 설정, 그리고 그림까지 예쁜 웹툰이 너무도 많다. 그날 선택한 판타지 로맨스는 설레다가도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절절한 이야기도 담겨 있었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을 갈 때도 손에서 휴대전화를 놓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읽어가다 남은 회차가 한 자릿수가 되었을 때쯤이 오후 4시 45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어떤 감정을 피해 다른 웹툰으로 옮겨갔다. 창밖의 하늘이 새까매지고, 자동차에 불빛이 별빛처럼 반짝이는 시간이 되었다. 종일 붙잡고 있던 전화에서 진동이 울렸다. 퇴근한다는 남편의 전화였다. 온종일 회사에서 시달렸는지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났다. 순간 미루고 미뤄뒀던 자책감이 홍수처럼 밀려든다. 그때 떠오르는 한 문장.


'나는 오늘 하루를 버렸다.'


누워서 창밖을 보던 아침, 머릿속에 울리던 경고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겼다. 눈 뜨자마자 일기를 쓰고, 수영장을 가자는 결심을 가볍게 버렸다. 그리고 나와 상관도 없는 이야기에 빠져 웃고, 가슴 아파하고, 화를 냈다. 침대 위에서 복잡하게 피어나는 감정을 느끼며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착각에, 아니 무언가를 하는 척 속이며, 내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버렸다. 무엇보다 누군가가 소중히 벌어다 준 시간을 의미 없이 쓰고 버리고 말았다.


자존감이 낮아지면 미안하다는 말도 내뱉지 못한다. 우습게도.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잠시 수다를 떨다 침대 위에 누웠다. 남편은 잠들기 전에 폰 게임으로 짧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바로 누워 한 손은 폰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얼굴에 기댄 채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옆으로 누워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 마디.


"나 다시 취직도 안 되고, 계속 이렇게 살면 어떡해?"


'아차'하는 순간에 문장은 입 밖으로 뻗어나가 완성이 되어버렸다. 누구의 입에서도 듣고 싶지 않았던 주제를 내가 던지고 말았다. 어쩌면 하루 종일 혼자 품어내기 벅차서 그냥 뱉어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게임에 한껏 집중하고 있는지 답이 돌아오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괜찮아. 능력 있잖아. 잘할 수 있을 거야."


미동도 없이 툭 던져진 기계적인 대답. 여전히 시선은 폰을 향해 있고, 두 손도 폰을 향해 있었다. 아마도 내가 말한 '이렇게'가 뭘 뜻하는지 상상도 못 해서 한 말이겠지. 오늘 하루를 지켜봤더라도 그런 말을 했을까?


"만약에 안 되면? 요즘 경기도 안 좋은데 내가 하고 싶은 순간에 될까?"


 "……."


두 번째 질문을 들은 남편이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봤다. 잠깐 눈을 맞추고는 다시 시선을 폰으로 돌렸다.


"괜찮아. 기다릴 수 있어."


무얼 어떻게 기다린다는 건지,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이해하긴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묻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대답을 듣고 가만히 있으니 남편이 다시 눈을 맞춰 왔다. 싱긋- 명랑하게 웃는 모습에 그만 따라 웃고 말았다. 뭣도 모르면서 웃어 주는 남편.


이상하게 그 별것 아닌 순간에 불안함이 전혀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시간으로 나에게 시간을 내어준 사람, 하루 종일 힘들게 일을 하고 와서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 그 당연할 리 없는 역할을 해주고 있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으로 바뀌었다. 네가 준 고맙고 소중한 이 순간을 아껴서, 다른 내일을 살아보겠다고 다짐해보게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내도 그렇게 해주겠다고 마음을 먹게 했다. 네게도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나도 망설이지 않고, '괜찮다' 말해주며 곁에서 역할을 해주겠노라고 다짐하게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별빛 따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