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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Sep 29. 2022

참방참방, 첨벙

하고 싶은 마음을 꺼내는 방법

눈부시게 맑은 하늘 아래, 짙은 푸른색의 바다는 점점 옅은 색으로 가까워진다. 파도는 하얀색 거품이 되어 공중으로 흩어지고, 투명한 물방울이 되어 모래를 반짝인다. 바라만 봐도 황홀한 경치를 눈앞에 두고 모래 위에 엎드린다. 목부터 시작한 검은색 옷은 어깨 팔을 지나 손목 그리고 발목까지 뒤덮고 조인다. 빛에 잘 데워진 모래알들은 손바닥과 발바닥을 익혀버릴 듯이 뜨겁다. 당장 바다로 뛰어들고 싶지만, 아직도 준비가 덜 된 모양이다. 4년 전 가을, 신혼여행으로 하와이에 있었다. 이름에 걸맞게 화창한 날씨, 풍경은 어디서 보아도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이 아름다운 섬에서 당시 체험하기로 한 것은 서핑이었다. 분명 서퍼들의 지상낙원에 온 것일 텐데, 꽉 끼는 수트에 몸을 욱여넣고 해변에서 얼차려를 받고 있었다. 보드 위에서 일어나는 법을 몸에 익히기 위해 여러 차례 엎드렸다, 쪼그렸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넘어져도 좋으니 얼른 시원한 물에 닿고 싶었다. 태어나 처음 시도하는 서핑, 보드를 탈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저 이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것이라 예상했으니까.


그런데 내 예상에 이런 중노동은 없었다. 얼차려가 끝나고 나니, 찍찍이가 달린 긴 끈으로 서프보드와 내 발을 단단히 묶었다. 넘어져서 내 몸이 보드와 멀리 떨어지게 되더라도, 끈이 있기에 잃어버리지 않고 찾아낼 수 있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바다에 들어가는 순간이 왔다. 키를 훌쩍 넘는 이 보드를 그곳까지 들고 갈 수 있다면 말이다. 초보들이 타는 보드의 길이는 보통 1.8~2.0m 가까이 된다고 했다. 너비도 한 팔 길이 정도 되는 보드는 무척이나 무거웠다. 보드의 재질이 스펀지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계속해서 몸을 조이는 수트 때문에 팔을 뻗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같은 신혼부부로 보였다. 커다란 보드를 번쩍 들고 바다로 나가는 남자들과 낑낑거리며 뒤이어 가는 여자들. 그리고 앞장서서 나와 멀어져 가는 남편의 익숙한 뒷모습. 애꿎다는 걸 알면서도 서운했다. 휘청거리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발바닥을 따갑게 만들던 모래의 온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윽고 차가운 물살이 몸에 닿았다. 다행히 무겁디무거운 보드는 물에 닿는 순간부터 뜨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딛는 발걸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참방, 참방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따라 걸었다. 손과 발에 기분 좋은 물살이 계속해서 닿는다. 수트 때문에 뻣뻣하던 부분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편해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여유마저 생겼다. 역시 이런 날엔 물속이 좋았다. 꽤 걸어 들어왔는데, 바닷물은 허리춤에서 찰랑거렸다. 나도 옆 사람을 따라 슬쩍 보드에 엎드렸다. 중심을 잡고 팔을 저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가본다. 패들링, 손가락 사이사이로 바닷물이 어루만지며 뒤로 보냈다. 주춤하던 보드가 조금씩 머리 방향으로 나아갔다. 바다 한가운데서 다시 선생님과 만났다. 한 사람씩 보드에 엎드리면, 선생님이 파도를 골랐다. 그러다 파도에 맞춰 보드를 힘껏 밀어내며 소리쳤다.


"패들, 패들, 패들- 푸쉬, 업!"


패들은 보드에 엎드려 상체를 들고 팔로 노 젓기, 푸쉬는 명치 부근 허리 옆에 손을 바짝 붙여 상체를 쭉 들어 올리기, 그리고 업! 오른발과 왼발을 차례로 보드 중앙으로 당기고 일어나기. 모래 위에서 얼차려를 받던 동작은 모두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다리를 옮기다 넘어지고, 잠시 일어났다 중심을 잡지 못해 넘어졌다. 나 또한 그랬다.


첨벙-


예측할 새도 없이 바다 위로 던져졌다. 물에 빠져드는 모양새도 가지각색이다. 코를 쓸고 나가는 바닷물은 몸을 떨게 할 만큼 매웠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잠깐이지만 보드 위에서 맛본 속도감이 잊히지 않았다. 이미 머리부터 귓속까지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원하게만 느껴지던 바닷물은 일렁이는 파도가 되어 앞서나가는 걸 자꾸만 막아섰다. 엎드려 패들링을 하다가 힘들면 그냥 걸어서 보드를 끌고 선생님 앞에 섰다. 그리고 다시 엎드렸다. 숨을 고르고 집중했다. 패들, 푸쉬 팔을 뻗고 상체를 세운 순간에도 속도가 느껴진다. 업! 오른발을 살짝 당기고 왼발을 쭉 길게 당긴다. 두 발로 보드를 누르자 발바닥 아래로 요동치는 파도가 느껴졌다. 그리고 살며시, 아주 천천히 일어났다. 일.어.났.다..!!


"와- 와아-엇"


정체불명의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두 팔을 허공에 벌린 채, 다리만으로 보드 위에 섰다. 손가락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을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온몸이 허공을 가르고 바람을 일으키며 앞으로 나가는 느낌이 선명했다. 발바닥이 점점 거세게 요동쳤다. 그리고 다시 첨벙-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닥에 발을 딛고, 밀려드는 물살을 뚫고 나왔다. 떠내려간 보드를 챙겨 들고 그제야 주변을 둘러봤다. 멀리 선생님과 사람들이 서 있는 장소가 보였다. 나는 해변 가까이에 있었다.


'날았다. 여기까지 날아왔어.'


그 순간부터는 콧속을 후비는 따가운 바닷물, 수면 위로 넘어지며 찧는 엉덩방아의 아픔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시 한번 더 날고 싶었다. 바람을 가르는 그 순간을 좀 더 길게 느끼고 싶었다. 어깨에 뻐근한 신호를 무시하며 연신 패들링을 하고, 파도를 얼굴에 맞으며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몇 번이고 돌아왔다. 옆 사람이 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짜릿했다. 어느새 함께 소리 지르며 웃고 있었다.


서핑, 스노클링, 집라인, 사륜구동 바이크, 스카이다이빙까지 여러 액티비티로 하와이를 즐겼다. 제일 좋았던 게 뭐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서핑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무리하게 저어댄 팔과 어깨는 이튿날까지도 얼얼했다. 어쩌다 거센 파도에 뺨이라도 맞을 때면 코와 입으로 짠맛이 휘몰아쳤다. 물로 헹궈낼 수 없으니 기침으로 최대한 바닷물을 뱉어냈다. 연달아 기침하다 침을 삼키면, 목 안이 사포로 긁은 것처럼 따갑고 까끌까끌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와 함께해도 도움받을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무거운 보트를 들어줄 수도, 노 젓기를 해줄 수도, 얼굴로 부서지는 파도를 대신 맞아줄 수도 없다. 모래 위 훈련부터 바닷속에서 여러 차례 일어나기를 도전하는 내내 남편과 한 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먼발치에서 서로의 도전을 바라보며 힘껏 소리 질러 응원하는 것이 소통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커다란 보드를 끌고 선생님 앞에 섰고, 끝나는 시간이 아쉬워 발을 동동거렸다. 온몸으로 자연에 부딪히는 그 기분이 너무 좋아서 힘든 것도 잊게끔 했다. 오히려 힘든 과정 뒤에 맛보는 짜릿한 감각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로부터 4년이 흘렀다. 무려 4년이나. 30분이면 바다에 닿을 수 있으면서도 시도하지 않았다. 멋지다고 온 동네 떠들었던 경험은 고작 반나절 체험에서 멈추고 말았다. 잊고 살았다고 말하기엔 수도 없이 찾아봤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가격, 위치, 후기 모두 꼼꼼히 읽었다. 예약만 누르면 되는 서핑을 할 수 있는 그 순간에 멈추어 섰다. 언제나 한 발짝 남은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



왜 하려는 거야? 그 가격이 적당하다고 생각해? 황금 같은 주말을 거기에 쓴다고? 한 번 더 한다고 얼마나 잘할 것 같아? 그게 의미가 있어?



내 안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깔끔한 정장 차림의 그 녀석은 언제나 팔짱을 끼고 무표정하게 끊임없이 묻는다. 안경을 한 손으로 치켜올리며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한다. 작게 들리던 목소리는 내 망설임을 먹고 자라난다. 무시할 수도 없이 커진 목소리에 대꾸하다 지치는 건 언제나 대답하는 나였다. 그래, 어차피 바쁜 현대인에게 서핑은 해야 할 이유보다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해야 할 이유는 그저 하고 싶다는 마음 밖에는 없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이 그러하다. 그림을 그리고 싶고, 드럼을 배우고 싶고, 소설을 쓰고 싶다. 서핑은 물론이고 펠트로 인형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다. 이 모든 일은 그저 하고 싶다는 마음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박에 실력이 좋아지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배우기 위해 돈과 시간을 쓰고, 숙달될수록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끝없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필요하기 시작했던 때가 말이다.


중학교 기술 시간에 제도하는 법을 배웠다. 사물을 놓고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를 생각하고 그리는 작업인데 재미있었다.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연필로 도면을 그리는 자체가 좋았다. 자로 계획해서 머릿속 생각을 그대로 옮겨내는 것, 쾌감이 있었다. 그렇게 처음 건축에 관심을 가졌다. 생각을 옮겨내 도면화하고 그것을 현실로 구현하는 작업이 멋지게 보였다. 되고 싶은 직업이 생겨 좋은 나와 다르게 주변은 걱정의 눈초리였다.


여자가 하기는 힘들 텐데, 그거 돈 잘 버는 직업은 아니라던데, 밤새워서 일하는 일이 엄청 많대, 근데 그거 왜 하고 싶다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누가 묻지 않아도 혼자 곱씹게 되었다.


'제도가 즐겁다고 그게 건축하고 상관은 있어? 너무 직업을 단순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질문을 창의적으로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시간이 갈수록 고민은 깊어졌고, 대학 진학을 앞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스치는 한 마디.


'진짜 하고 싶은 거 맞아? 곱씹다가 세뇌당한 거 아냐?'


말문이 막혔다.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 지 몇 년이 흐른 당시, 진짜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걸까? 자꾸 하고 싶다, 하고 싶다 말로 되뇌다 세뇌된 건 아닐까? 이런 마음으로 선택하면 후회하는 거 아닐까? 자그마한 목소리로 질문만 던지던 무언가는 어느새 내 안에 당당한 인격이 되어 꼼짝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스쳐 지나는 충동이라 치부하고 평가 도마 위에 올려놓는 녀석, 인정하기 싫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내 안에 존재했다. 약해지는 틈을 절묘하게 파고들어 몸집을 키우고, 커다란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녀석이 나를 아는 만큼, 나도 녀석을 알고 있다.


전부터 서핑을 해보고 싶다던 친구에게 연락했다. 먼 거리에 사는 친구는 흔쾌히 함께하겠다고 말해줬고, 날짜를 잡았다. 나는 3년 하고도 8개월 만에 다시 보드에 올랐다. 여전히 수트를 입는 것은 힘들었고, 보드는 무거웠다. 파도에 휩쓸려 몇 번이나 넘어지고, 바닷물을 잘못 삼켜 헛구역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발에 닿는 모래의 질감, 파도와 온몸으로 부딪히는 느낌, 찰나와 같지만 성공했을 때 그 짜릿한 느낌은- 여전히 환상적이었다. 보드에 가만히 엎드려 바라보는 풍경은 또 얼마나 멋진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던 녀석의 목소리는 사그라들었다.


사소한 취미를 하는 것부터 진로를 정하는 일까지- 끊임없이 묻는 존재가 있다. 논리적인 이유를 묻고, 방법이 합리적인지 따진다.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에 꼭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질문은 '그저 하고 싶은 일'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좋아하는 감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하고 싶은 일도 마찬가지다. 폭격처럼 날아드는 질문을 이길 수 없다면, 대처하는 법을 자꾸만 반복해서 외워두는 수밖에 없다. 그냥 하면 된다. 잠시 질문을 무시하고 작은 일이라도 해보면 된다. 어렵다면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 작은 행동에 시끄러운 폭격음은 대부분 사라져 버린다. 부디 '하고 싶은 마음'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고 내게 말해두고 싶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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