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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Mar 28. 2023

당신과 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책 리뷰] 그렇게 죽지 않는다 - 홍영아

책의 제목 앞에는 작은 글씨로 적힌 문구가 하나 있다.



'무엇을 생각하든, 생각과는 다른 당신의 이야기'


책을 읽는 중에도 읽고 난 후에도, 표지를 다시 바라볼 때마다 공감하는 문장이 되어버렸다. 이곳에 담긴 내용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달랐고, 이미 내가 겪어온 이야기도, 앞으로 겪을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가득 담긴 나의 이야기였다.


'죽음'을 떠올리면 언제나 '두려움'이 먼저 떠오른다. 어렸을 때는 몇 살까지만 살고 싶다, 나이 먹은 내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말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마흔이 되면 죽겠다고 말했던 대학교 동기도 있었다. 물론 농담이었겠지만. 하지만 나는 단 한 순간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되도록 오래오래 이 땅에 발붙이고 살고 싶었다. 지긋지긋해도 이상하게 끝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니메이션 같은 상상을 좋아하는 나는 언제나 미래에 관해서 희망차게만 생각해서일까? 그 답은 모르겠다. 하여튼, 죽음=두렵다 는 방정식은 여전히 내 속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조금 변한 것이 있다면, 바라보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무서워서 피하고만 싶었던 주제가 언젠가부터 내게 다가왔다. 나의 죽음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죽음은 내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막연히 그렇게만 생각하던 나에게 '죽음'과 관련된 독서 모임을 하게 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렇게 이 책과 만나게 되었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그 결과를 잘 알기에 항암치료를 권유하는 대신 진통제를 처방하면서도 되도록 고통 없이 환자가 삶을 정리하게 해 준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평생에 쓰는 의료비의 3분의 2를 임종 전 한 달 사이에 쓴다는 통계는 밝히지 않는다. 임종기에 이른 환자에게 항암치료 대신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포기할 수 없다." "아빠는 끝까지 힘을 내려 한다." "딸은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죽지 않는다, 21p


오랜 기간 방송작가로 살아온 저자는 말기암을 다루는 방송에 대해 '긍정의 마취사'라는 표현했다. 내 생각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혹여 나나 주변의 가족이 말기암에 걸렸더라도 어떻게든 항암치료를 하러 들었을 것이다. 의지의 문제인 양, 기적이 우리에게는 일어날 거라고 믿으며 손을 부여잡고 버텨보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말한다. 그 항암치료는 죽음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는 정상 세포까지 손상시키고, 구토와 식욕부진, 탈모, 폐독성과 간독성, 호르몬 분비 이상, 생식기 장애, 우울감까지 수많은 부작용을 낳는다고 말이다. 가능성 없다는 선고와 다름없는 말기암을 그렇게 다루는 것이 맞는 것일까? 어째서 그런 당연한 의문을 한 번도 품어보지 않았던 것일까?


관심을 두지 않는 영역에서 미디어의 힘은 엄청나다. 물론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만, 방송은 말기암도 기꺼이 콘텐츠로 사용한다. 희망과 의지가 낳은 기적의 산물은 엄청난 시청률을 부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기암 환자는 죽는다. 사람들은 기적만을 기억한다. 그리고 눈앞에 다가온 순간도 그렇게 대처한다. 누구의 잘못일까.


아버지의 팔이 주사 바늘 자국으로 빈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 순간 에 둘째 여동생이 큰언니를 붙들고 아파트 베란다로 나갔다. 동생은 오열하며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제발, 제발 그만해. 멈춰. 아버지 저러다 돌아가셔."

큰언니가 멈췄다. 믿음을 내려놓고 희망을 극복했다.

그렇게 죽지 않는다, 94p


죽음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 이상하게 술술 읽힌다. 죽음을 보고 듣고 겪은 이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담겨있다. 그래서 술술 읽히지만, 한 호흡에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가슴이 자꾸 먹먹하고 답답해져서.

위의 내용은 폐암 4기의 아버지를 모시는 가족의 이야기였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가장 열심히 노력한 큰언니였다. 온갖 좋은 약과 오일 마사지를 하던 언니는 동생의 절규에 멈췄다. '희망을 극복했다.'는 그 문장이 자꾸만 맴돈다. 희망이 실현되고, 이뤄진 것이 아니라 '극복'이란 단어에 묻어난 감정이란... 죽음은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배고플 때쯤 밥을 먹고, 도로의 정체와 지체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 2박 3일의 장례를 치르고 잠을 못 잔 유가족이 밥도 못 먹고 온 힘을 다해 울다가 신기하게 하나도 변한 게 없는 세상으로 각자 운전을 해서 집으로 가는데, 그 길에서 살인적인 퇴근길 정체를 경험해야 한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거기엔 교훈도 감동도 의미도 없다.

그렇게 죽지 않는다, 247p


단박에 생경했던 장례식이 떠올랐다. 20대 중반 첫 직장에 출근하고 있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울고 있는 외할머니를 보자 나도 울컥 눈물이 났다. 서로를 보며 울고 있는 우리 앞에 무표정한 장례 지도사가 물었다.

"육개장, 시락국 중에 뭘로 하겠어요?"


"국은 시락국으로 해야지."


하염없이 눈물을 훔쳐 내면서도 시락국을 하겠다고 말하던 할머니. 그 이상한 장면은 2박 3일 내내 반복되었다. 소리 내 울며 함께 오열하다가도 밥을 먹고, 구석에서 쪽잠을 자다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농담하며 웃다가도 입관하는 할아버지를 보고 다시 오열하고,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엄마를 부둥켜안고 함께 울었다.


결국엔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 정해진 절차와 과정을 따라 슬퍼하다 보면 어느새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 눈앞에 있었다.





말기암, 희망, 죽음, 장례식까지 도망쳤던 단어와 자꾸만 마주했다. 불편하고, 답답하고, 먹먹해지는 이유의 가운데에 '무지함'이 있었다. 두렵다는 말에 숨어 생각하지 않으려 피했기에 더욱 제대로 알지 못했다.



여러 사람과 연관된 나는 어쩌면 원하는 대로 죽거나 치료하거나 장례를 치루는 게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이상한 생각이 자꾸만 떠돌았다.


그리고 반대로 소중한 사람의 원하는 죽음을 방해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욕심에 희망을 놓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끔찍한 생각이 소름 돋게 했다.


무섭다. 여전히 무섭고, 읽을수록 곁에 다가온 이야기 같아서 답답했다. 몇 번을 상상하고 선택해도 나는 가족의 '생명 연장 거부'를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생각해두고, 미리 준비해두고 싶다. 정말 중요한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내 것이 아닌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자세 정도는 미리 정해두고 싶다.


생각할 것투성이인 이 '죽음'에 대해 가까이 있는 사람과도 이야기 나누고, 함께 고민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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