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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Apr 17. 2023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책임

[영화 리뷰] 다음 소희

몇 개월 전 주말 아침에 '다음 소희'라는 영화를 보고 왔다. 시놉시스만 알았더라면 아마도 절대 보러 가지 않았을 종류의 이야기였다. 우연히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에서 이 작품을 추천하는 세 명의 평론가를 봤고, 또 우연히 감독의 말을 듣게 되었다. 손익분기점이 30만인 영화는 고작 5만을 넘기고 있던 상황. 개봉한 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가까운 대형 영화관에서는 상영하지 않고 있었다. 고민 끝에 일요일 늦잠을 포기하고, 먼 곳으로 영화를 보러 나섰다.


소희는 영화 주인공의 이름이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던 평범한 아니 평범하다고 하기엔 당차고 씩씩한 열아홉 살의 소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소희는 학교 선생님에게 취업 실습을 추천받았다. 대기업이라며 건네진 그 일자리는 인터넷 회사의 콜센터였다. 간단한 상품 설명을 할 줄 알았던 그곳의 진짜 이름은 '해지 방어 부서'. 인터넷 해지하려는 고객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기업에서는 갖은 술수를 부린다. 여러 핑계를 대며 전화를 다른 부서로 넘기고 넘기다 맨 마지막에 닿게 되는 그곳, 해지 방어 부서. 뺑뺑이 돌리는 듯한 대우에 대부분의 고객은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다. 그런 고객을 상대로 이름, 주소 확인, 해지 이유, 위약금, 더 나은 조건의 상품을 설명하는 것이 소희의 업무였다.



그리고 소희가 그곳에서 온갖 수모를 겪게 된다. 사실 소희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친구들, 함께 춤 연습을 하던 오빠까지 그 나이 청소년들이 사회에 내던져진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대기업의 하청에 하청을 받은 회사는 모두가 기피하는 자리에 일부러 고등학교 실습생들을 넣었다. 실습이란 말로 제대로 된 돈을 주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고, 몇 개월 못 버틴다 해도 기업에서 손해 볼 것은 없으니까. 취업률이 중요한 학교도 어떻게든 기업과 학생을 연결한다. 학교의 목숨과 같은 내년 예산을 편성하는 교육부가 취업률이라는 숫자만 평가하니까.


답답함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 아이에게 벌어진 일을 파헤치기 위해 형사 유진은 수많은 어른을 만난다. 부모, 담임, 교감, 회사 상사, 상사의 부인, 교육부 담당, 교육부 책임자까지. 개개인을 붙들고 멱살을 흔들어 보지만, 모두가 피해자일 뿐 가해자는 없다. 인신매매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모두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라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분명 틀린 말이 아니다. 우리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부품 같은 존재로 대부분 일을 한다. 자유도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누군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그곳에 다른 사람의 불합리나 생명을 들여다볼 시간과 여유는 없다. 우리는 눈앞의 일을 해내고 퇴근하기에도 벅차니까. 나 또한 그랬다. 입안 가득 쓴맛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 거대한 시스템은 영영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


"자신의 자리에서 조금씩만 더 하면 되지 않을까?"


씁쓸함에 괴로워하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헛웃음이 났다. 저 거대한 시스템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상대를 향해 고작 개인인 내가 뭘 할 수 있고, 그게 얼마나 세상을 바꾸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하지만 남편은 포기하지 않았다. 만약 담임이 조금만 더 그 회사를 알아봤더라면, 만약 상사가 소희를 조금만 더 살펴봤더라면, 만약 교육부 담당이 자기 업무 외의 일을 더 챙겨서 봤더라면 분명 결과는 달랐을 거라고 말했다.


"그럼 나는? 아무 관련 없는 곳에 있는 나는 뭘 할 수 있는데?"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그리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잔업이 더 늘어나고, 퇴근이 좀 늦어지더라도 우리 현장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고민하는 시간을 더 갖는 거지. 그렇게 우리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노력해보는 것.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그 말에 아무런 말도 붙이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라고 말하던 어른과 다를 바가 없는 내 모습에, 이 몸속 깊이 박혀 있는 패배감 때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술을 마신다. 뭔가 좀 이상하다 생각이 들었던 나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그를 바라본다. 반주로 소주를 마시고, 즐거울 때 소맥을 마시고, 속상함에 혼자 맥주를 마시는 아이들. 사 먹는 학생만의 문제일까. 답답함, 억울함, 분노, 그 폭풍 같은 감정 하나 터놓을 장소가 없어서, 막다른 길에서 방법을 찾지 못해서 그랬다면, 누구의 잘못이고 누구의 책임일까. 그 책임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어른이 있을까.


소희가 마지막으로 들렀던 가게는 동네 구멍가게였다. "카스 두 병이요."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테이블 위에 놓였다. 말없이 맥주를 따르고 가만히 앉아있던 소희의 발 근처로 햇살이 닿았다. 가게 좁은 문틈 사이로 봄볕처럼 따뜻한 햇빛 한 줄기가 슬리퍼를 신은 발을 감싸고 있었다. 소희는 어쩌면 그 발을 감싸줄 한 사람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떠올리며 글을 쓰는 며칠째, 생각은 점점 복잡해진다. 정말 남편의 말대로 한 사람만이라도 있었다면 달랐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 순간 갑자기 '가차 없는 희망'에 대해 읽었던 게 떠올라 책을 뒤적였다.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 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219p)


역시 가차 없더라도 희망을 내뱉고 싶다. 바뀌지 않을 것 같아도 바뀔 거라 믿고 행동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과 함께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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