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짧은 상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을 May 29. 2022

오래된 상상

반복되는 내 안의 이야기

#1



한 소녀가 우거진 숲에서 걷고 있다. 소녀의 키를 훌쩍 넘어버린 나무들은 빼곡하게 들어서서 마치 미로처럼 보이기도 했다. 따뜻한 날씨에 상쾌한 바람이 느껴지는 이곳을 걷는 일이 좋았다. 그곳을 걷는 소녀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다. 가본 적은 없지만, 너무도 선명한 길이 소녀의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온 길과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 분명한 이곳에서 길을 잃을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옆에는 소녀보다 작은 꼬마가 있었다. 언제부터 함께였는지 알 수 없는 꼬마는 주변을 잔뜩 경계하며 소녀의 옆에 꼭 달라붙어 있었다. 소녀는 한 손에 꼬마의 손을 잡고 앞을 보고 걸었다. 가볍게 손을 흔들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퍽 즐거워 보인다. 숲을 눈부시게 밝히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사라지는 해, 깜깜한 어둠이면 찾아오는 달과 별은 끊임없이 반복되어도 아름답게 보였다.



쉼 없이 걷고 있는 소녀의 주변이 점점 어두워졌다. 상쾌하게 와닿던 바람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거칠게 숲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나무를 괴롭히고, 흔들리는 나무들은 비명을 질러대는 것 같았다. 어둠이 오면 빛나던 별과 달도 보이지 않았다. 훤히 보이던 길이 서너 걸음 앞만 보이게 되자 소녀의 보폭이 점점 줄어들었다. 어둑어둑해진 사방을 둘러보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그때,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겁에 질려 앞만 보고 달렸다. 아니 고개를 들어 앞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달렸다. 깜깜한 길에 조금씩 빛이 들기 시작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무서웠던 마음도 빛을 보자 누그러들었다. 천천히 숨을 몰아쉬고 그 자리에 섰다. 다행히 소녀가 익히 보던 숲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땀으로 흥건한 이마,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이 아니었다면 나쁜 꿈을 꾼 것만 같았다.



흐르는 땀을 닦다 손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린다. 함께 손을 잡고 있던 꼬마가 없었다. 소녀는 뒤를 돌아 달려온 숲을 바라봤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어슴푸레 무언가가 보였다. 달려가 확인해 보니 작은 마네킹에서 떨어져나온 팔이었다. 팔을 든 소녀는 눈물이 맺힌 표정으로 밤새 달려온 숲길을 다시 거꾸로 뛰기 시작한다. 얼마 달리지 않아 또 다른 부분이 보였다. 달려온 길마다 하나씩 떨어져 있는 마네킹 조각 같은 무언가들을 품 안에 안으며 소녀는 눈물을 떨구고 만다. 그 자그마한 조각들이 꼬마라는 걸 소녀는 알고 있었다. 조각들을 찾아 맞춰내며 눈물범벅의 얼굴로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마지막 조각을 찾아 맞춰내자 꼬마의 모습이 돌아왔다. 조금은 꾀죄죄 해 보이는 꼬마를 품에 안으며 소녀는 결심한다. 다시는 버리고 달리지 않겠노라고, 어떤 무서운 일이 생겨도 손을 잡고 있는 꼬마를 내버려 두고 가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2



회색빛만이 존재하는 도시, 높은 건물이 빼곡히 서 있고 그 건물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거리 위에는 사람들이 있다. 어두운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다. 무채색만이 존재하는 이곳에는 걷고 있는 사람들 또한 무채색이다. 생김새는 다르지만, 무표정에 관성적으로 걷고 있는 모습 때문인지 누가 누구인지 구분해 보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은 시선을 앞으로만 고정한 채 일정한 보폭으로 발을 내디딘다. 고개를 잠시 돌릴 여유도 없어보이는 모습이 오히려 이곳에서는 자연스럽게 보인다. 모두가 다른 방향으로 걷는 듯하지만 멀리서 보면 거대한 흐름 속 하나의 점처럼 느껴질 뿐이다.  



또각거리는 일정한 발걸음 소리만 들리던 도시에 커다랗고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한 여자가 중심을 잃고 넘어진 소리였다. 긴 머리를 단정히 넘겨 하나로 묶어 동그란 이마가 드러난 여자는 검은 정장에 검은 구두를 신고 앞만 보고 걸어가던 중이었다. 고개를 들어 발치를 보니 돌부리가 보였다. 깔끔하게 빛나던 검은 구두는 돌부리 주변에 나동그라져 있고, 하얀 양말이 더러워져 있었다. 질서 정연하게 걷던 사람들이 넘어진 여자로 인해 마치 파문이 일듯 엉켰다. 하지만 누구도 넘어진 여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자신의 길을 찾으려 움직였다. 이내 여자를 둘러 가는 다른 흐름이 만들어졌고, 바쁘게 걷기 시작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벗겨진 구두를 향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자신의 앞을 가로지르며 지나는 사람들 때문에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참을 제자리에서 돌며 사람들 틈 사이로 방향을 살피다 무릎에 흐르는 새빨간 피를 발견한다. 그제야 아픔이 느껴졌다. 연이어 엉덩이와 어깨에 우릿한 통증이, 긁힌 상처와 붉은색 액체가 흐르는 손바닥은 쓰라렸다. 작은 핏방울이 맺힌 손바닥을 바라보며 서 있는 여자는 길을 지나는 사람들과 부딪히고 밀쳐졌다.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통증도,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을 걷고 있는 회색빛 도시의 모습도 낯설었다. 줄을 맞춰 지나는 사람들 틈에는 어떻게 끼어들어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어디를 가려 했던 것인지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욱신거리는 손바닥을 붙잡고 사람들을 피해 천천히 걸었다. 도시의 가장자리,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곳에 서서 멍하니 지나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주저앉아버렸다. 잃어버린 길을 찾고 싶은 마음도, 움직일 힘도 없었다. 그저 어떤 생각도 없이 가만히 있고 싶었다. 어느새 여자는 차가운 바닥에 누워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색빛 풍경을 바라보던 눈꺼풀도 점점 느리게 움직였다. 깜빡일 때마다 보이는 도시의 풍경이 여전히 낯설다. 깊게 눈을 감고,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3



톡-


톡- 도로록-



자그마한 소음과 함께 가벼운 통증에 여자는 눈을 떴다. 비스듬히 보이는 회색빛 도시는 여전히 분주했다. 다른 게 있다면 어디선가 작은 무언가들이 날아와 누워있는 여자의 몸 곳곳에 부딪히고 있다는 것. 우연히 무언가가 떨어진 것으로 생각했지만, 누군가가 겨냥을 한 듯이 점점 더 잦은 빈도로 정확하게 날아와 여자를 괴롭히고 있었다. 여자는 누운 채로 가까이 떨어진 그 무언가를 바라봤다. 손톱보다도 작은 돌멩이 같은 것이었다.



톡-



이번엔 손바닥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동그랗고 매끈한 질감의 작은 알갱이는 도토리처럼 보였다. 그리고 연이어 바람에 실려 작은 하얀색 무리가 여자의 얼굴을 덮쳤다. 작은 꽃잎처럼 생긴 무언가가 코 근처를 간질이자 여자는 재채기를 내뱉고 말았다. 딱딱하게 굳어져 힘이 들어가지 않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결국 더는 누워있지 못하고 몸을 세워 앉았다. 작은 무언가들은 쉬지 않고 포물선을 그리며 여자 근처로 떨어졌다. 모두 같은 방향에서 날아왔고 회색 도시 반대편,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오는 듯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날아오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손에는 도토리를 만지작거리며 조금씩 어둠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작은 무언가들은 계속해서 날아왔고 여자의 발치에 떨어졌다. 자신을 겨냥해 던지는 누군가가 괘씸한 마음도 들었지만, 어둠 속에서 그 작은 마찰음들은 오히려 길을 잃지 않게 하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했다. 얼마 걷지 않아 나무 냄새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어둠이 익숙해진 눈에 우거진 숲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깜깜한 어둠 속에 숲을 걷고 있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녹색 가득한 이곳이 익숙했다. 양말 너머로 울퉁불퉁한 흙길이 고스란히 발바닥에 느껴졌다.



포물선의 시작점이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봐도 아주 자그마한 인영이 팔을 뻗어내며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두 걸음 남은 거리에서도 계속 이어지던 그 움직임은 여자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자 멈추었다. 고개를 숙인 꼬마가 가만히 서 있었고, 꼬마의 옆에는 무언가를 가득 쌓아 더미가 있었다. 그곳엔 도토리, 이름 모를 열매, 잔가지, 돌멩이까지- 여자에게 계속해서 날아오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여자는 가만히 꼬마를 바라봤다. 꼬마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작은 손가락만 꼬물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꾀죄죄한 모습의 꼬마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여자는 와락 꼬마를 안았다. 그리운 향기가 온몸을 파고드는 듯했다. 오랜 시간 혼자 내버려 뒀다는 죄책감과 기약 없는 기다림에도 포기하지 않아 고마운 마음이 뒤엉켰다. 절대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또다시 반복해서 몇 번이고 내뱉었다.



꼬마를 안고 있는 여자가 어쩐지 안겨있는 것처럼 보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동네 복닥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