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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Aug 25. 2022

우리 동네 복닥방

책을 잡고 있는 손이 축축하다. 미간에 힘을 주며 글자를 다시 훑어보지만, 웬일인지 눈이 자꾸만 책 위에서 미끄러졌다. 몇 번이고 같은 문장을 되돌아 읽다가 눈꺼풀을 꾹 감았다 떴다. 조금 맑아진 시야로 어둠이 몰려들었다. 그제야 글자를 읽기 불편할 정도로 주변이 어두워졌음을 깨달았다. 콧잔등을 누르는 돋보기를 잠시 벗어두고 거실을 둘러본다. 목, 어깨, 손목에서 비명을 지르는 듯한 통증이 스친다. 나도 모르게 세월 한탄을 하게 된다. 오랜만에 한껏 솟아난 의지와는 상관없이, 앉아서 책을 읽는 것도 버겁다고 말하는 몸이 야속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세월만큼 닳아온 내 몸은 열심히 살아온 증거와도 같으니 받아들여야만 한다. 팔을 앞으로 쭉 뻗어내 기지개를 켠다. 목과 손목을 차례로 돌리며 한껏 토라진 몸을 달래본다.


그래, 그래- 알았다. 라며 못 이기는 듯 움직인다. 무릎에 손을 얹고 조심스레 일어났다. 뻐근한 허리를 주먹으로 살살 두드리며 창가로 향했다. 겨울의 밤은 이르게도 시작된다. 정오가 지난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있다. 빼곡히 서 있는 아파트에도 드문드문 불빛이 보인다. 올해로 지어진 지 스무 해가 되는 이 아파트는 열일곱 개의 동에 1,800여 세대가 살고 있다. 입김이 서릴 정도로 창 가까이 다가가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13층, 아찔하게 보여야 할 높이가 어둠에 묻혀 실감나지 않는다. 그 맨 아래 아파트 사이로 납작 엎드려 바닥에 붙어있는 희끄무레한 형체가 보인다. 성냥갑처럼 작고 납작한 건물 다섯 채가 빙 둘러 앉아있다. 그 건물의 정체는 '복닥방'. 평범한 아파트 단지에 복닥방이 생긴 건 4년 전 일 때문이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겨울밤이었다. 일찌감치 집에 있었던 나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알림을 들었다. 평소와 같이 낭랑한 기계음의 목소리는 차림새, 나이, 이름, 연락할 곳을 차례대로 읊고 있었다. 아이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차분한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다 빨래를 널다가 한 번, 설거지를 하다가 한 번 그리고 TV를 보다가 또 한 번-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TV를 끄고 창가로 향했다. 유리 너머 찬 공기가 고스란히 얼굴로 전해지는 듯했다. 깜깜한 밤하늘 아래, 길을 잃고 있을 아이와 애타게 찾고 있을 부모의 모습이 나도 모르게 그려졌다.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차가운 바람은 귀신같이 틈을 파고들며 품속으로 들어왔다. 앞섶을 좀 더 여미며 목적 없이 단지를 돌기 시작했다. 이제는 외워버린 아이의 인상착의를 비교하려 했지만, 겨울바람과 어둠이 차지한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런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헛걸음일 줄 알면서도 밖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괜스레 어떤 일에도 집중되지 않고, 집안을 서성이며 혹여나 무언가 흘러나오지 않을까 스피커를 주시했다. 다행히 그 알림을 마지막으로 더는 알림이 울리지 않았다.


나중에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만, 아이는 아파트 옥상 계단참에 있었다고 한다. 아이의 하교 시간과 부모님의 퇴근 시간이 맞지 않아 혼자 놀다 벌어진 일이었다. 아이는 무사히 부모님 품으로 돌아갔다. 그 일은 사람들 마음에 남았다. 내게도 그러했다. 집안의 소일거리 대신, 잠시 그 아이와 함께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허무맹랑한 생각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한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나보다. 처음은 노인정에서 시작했다. 불가피하게 어린아이가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긴다면, 동네 어른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노인정은 가끔 들르는 아이들 덕에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적적하게 시간을 보내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였고,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부모가 드나들었다. 한쪽에 동화책이 담긴 책장이 생기고, 귀여운 탁상이 한 가운데 놓였다.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이 북적이는 날이 늘었고 그야말로 복닥복닥해졌다. 그렇게 하나의 사건에서 시작된 허무맹랑한 상상은 '복닥방'이란 동네 공간을 만들었다. 봄이면 잔디로 뒤덮이는 마당이 가운데 있고, 그 주변을 자그마한 단층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곳에는 나이와 직업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수시로 모이고, 계절에 상관없이 그 이름처럼 복닥복닥한 모양새였다.


반짝- 희끄무레하게 보이던 복닥방에서 빛이 나왔다. 각각의 건물에서 노랗고 밝은 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마치 주변 높은 건물에 기죽지 않으려는 듯이 밝게도 빛을 내는 것 같다. 벌써 복닥방에 불이 들어오는 시간, 오후 5시가 되었다는 뜻이다. 시계를 바라보니 5시 4분을 지나고 있었다. 두근두근- 회상에 잠시 멀어져 있던 긴장이 다시 돌아와 심장을 두드려대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울리는 그 소리가 나쁘지 않다. 오히려 묘하게 기분이 좋다. 어두웠던 거실에 불을 켜고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혹시 모를 차가운 날씨를 대비해 두껍게 옷을 입는다. 따뜻한 차를 작은 보온병에 담아내고, 거실에 벗어두었던 돋보기에 안경줄을 채워 목에 건다. 그리고 며칠 내내 수도 없이 읽어내린 동화책을 한 손에 들었다. 미리 생각해둔 신발을 꺼내 신고 거울을 바라봤다. 폭신한 재질의 연갈색 모자 아래 구불거리는 흰머리, 모자와 색을 맞춘 목도리 아래 단정하게 코트를 입은 내가 보인다. 눈을 마주 보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려본다. 자연스레 따라 휘어지는 눈과 입을 따라 주변에 주름이 피어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점점 얼굴을 뒤덮는 주름을 바라볼 때면 샐쭉한 마음이 비집고 올라오고 만다. 하지만 오늘은 그 샐쭉한 마음이 내 마음에 들어올 틈이 없다.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숫자가 바뀌는 걸 바라보는 그 평범한 순간에도 심장이 방망이질 치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다행히 도착한 엘리베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좁은 공간에서 누군가가 있다면 내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울에서 한 번 더 매무새를 점검하다 알록달록한 전단에 눈이 갔다.


'우리 동네 복닥방, 봄학기 선생님을 모집합니다.'


며칠 내내 기분 좋은 긴장감의 원인이 되어준 문구. 나는 오늘 복닥방에 봄학기 선생님 자격을 얻기 위해 작은 시험을 치르려 한다. 혼자 있는 아이를 위한 공간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어느새 재미난 행사들이 생겨났다. 그중에도 단연 재미있는 행사는 동네 주민이 선생님이 되는 수업이었다. 남녀노소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는 이곳에는 자신 있는 무엇으로도 수업이 가능하다. 하루짜리 수업부터 한 학기를 책임지는 수업까지 그 기간도 다양하다. 쿠키 만들기, 뜨개질, 색칠 놀이, 사진찍기 그 종류가 다양하다. 작년 봄학기에 가장 인기가 있었던 수업은 동네 식물 배우기 수업이었다. 일흔을 넘긴 할머니 선생님과 함께 산책하며 이름을 배우고 식물에 담긴 이야기를 들었다. 봄마다 피는 예쁜 꽃들에 감탄했지만, 여러 사람과 도란도란 나누는 경치는 더욱 아름다웠다. 흰색, 연분홍색, 자주색, 노란색, 하늘색 그리고 연두색까지- 그 아래 함께 걷는 할머니, 할아버지, 어린아이가 예쁘게 물들어 절경을 이뤘다. 이름과 이야기를 알수록 홀로 하는 산책도 즐거워졌다. 무엇보다 알고 있던 사람이 선생님으로 활약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우연히 산책길에 마주쳐 이야기를 주고받아 알고 있던 분이었다. 같은 연배에 살고 있는 동 또한 같아서 몇 번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었다. 꽃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수업을 꾸릴정도로 넓은 지식을 갖고 계신 줄은 몰랐다. 첫 수업에 수줍어 하시던 모습은 회차가 거듭될수록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그 모습에 내 마음에도 작은 무언가가 움틀 대기 시작했다.


띵-


"안녕하세요. 옥이 할머니!"


엘리베이터의 알림음과 함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집에 사는 다섯 살배기 연후였다. 연후는 복닥방에서 알게 된 인연이다. 수업을 함께 듣고, 이야기를 나누다 같은 층에 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땐 어찌나 민망했던지. 옆집이라며 반가워하던 연후에 비해 내 좁은 시야가 드러난 것만 같아서 부끄러웠다. 한 층에 고작 두 세대가 살고, 연후가 태어난 순간부터 나란히 살아왔지만, 알지 못했다. 복닥방이 없었다면, 아마 오늘도 그저 스쳐 지났을 것이다. 명랑하고 인사성 밝은 연후와 이제라도 인사 나눌 수 있음에 행복했다.


"안녕, 연후야. 복닥방에 다녀오는 길이니?"


"네! 오늘은 웅이 할아버지한테 옛날 놀이 배웠어요. 옥이 할머니도 같이 있었음 좋았을 텐데-"


복닥방에 모이는 사람이 많다 보니 할머니, 할아버지도 여러 명이다. 그 모두를 친절하게 이름 한 글자씩 덧붙여 구분해 불러주는 모습이 퍽 귀엽다. 함께 놀지 못해 아쉬워하는 듯한 꼬마 친구를 달래려 무릎을 굽히고 시선을 맞췄다.


"그랬구나, 근데 오늘 할머니는 중요한 시험이 있거든. 다음번에 연후가 오늘 했던 옛날 놀이를 할머니에게 알려주렴."


"네! 안 까먹고 있을게요. 근데 옥이 할머니 시험을 쳐요?"


"응, 그게 뭐냐면-"


나는 마치 비밀이야기를 하듯 연후에게 바싹 다가가 손을 가리고 말했다.


"아! 아!! 맞다. 할머니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응원하고 있을게요!"


뭔가 기억이 났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꼬리치는 강아지 같다. 반짝이는 눈을 하며 응원한다는 말을 들으니 기운이 날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그럼 다음에 만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작별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품 안에 들려있던 동화책을 한 번 쓰다듬는다. 나는 복닥방에 봄학기 동화책을 읽어주는 선생님이 되려 한다.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지난 몇 년간 복닥방에서 여러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그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그리고 좀 더 많은 아이와 나누고 싶었다. 복닥방의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운영진들이 모인 자리에서 참관 수업을 몇 차례 진행해야 한다. 어째서 이런 무모한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떨림이 마냥 싫지 않다. 그래도 연후를 만난 덕분에 긴장이 좀 풀린 느낌이다. 익숙하게 걸음을 옮긴다. 차가운 바람이 곳곳에 닿지만, 어제보다는 누그러든 것 같다. 가로등 아래 큼지막하게 서 있는 목련 나무에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보인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노란 불빛을 반짝이며 빛내는 목적지가 보인다. 또 봄이 되면 이곳 앞마당에서 즐거운 일들이 벌어지겠지. 돗자리가 발 디딜 틈 없이 펼쳐져 함께 벚꽃을 바라보며 웃었던 작년이 떠올랐다. 걸음마다 추억이 피어오른다. 아마도 이곳에서 살아갈수록 그 추억의 깊이는 더해가겠지. 연후와 같은 아이들을 만날 생각에 벌써 설렌다. 어느덧 도착한 복닥방 사무실 앞에서 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살며시 문을 열자 딸랑-이는 소리가 들린다.


"안녕하세요. 봄학기 선생님을 지원한 윤미옥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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