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이름들
1. 성리
특이하진 않지만 흔하지도 않은 그런 이름. 할아버지는 동네에서 가장 용하다는 도사님에게 가서 이름을 받아 오셨다. 이름의 끝 글자인 '리'는 앞 글자에 붙어 있으면 발음이 쉽지 않았다. 어른들은 나를 '성희'라고 불렀다. 할머니, 외할머니, 이모, 고모, 삼촌, 숙모 모두 모두 나를 성희라 불렀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나를 성리라 불러주셨다. 할아버지가 지어온 이름이라 할아버지는 끝까지 잘 불러주셨다. 할아버지 묘비에 적힌 우리의 이름을 살필 때 친척들은 "아 성희가 아니라 성리가"라고 말했다. 다소 충격...
처음 만나는 누군가에게 이름을 말할 때에는 꼭 강조해야 한다. "리을이요. 리을." 성미도, 성희도, 승리도 아닌 성리라고 분명하게 말해줘야 알아듣는다. 이름이 중요하지 않을 때엔 그냥 성미인 척하고 산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이름 하나 가지고도 여러 가지 썰을 풀 수 있는 내 이름이 좋다.
2. 세랑
재취업을 준비하던 2018년엔 시간은 많았고 돈은 없었다. 3월부터 자의적 백수가 되었으니 갈 곳도 마땅히 없었다. 늦게 일어나서 카레를 오랜 시간 끓여 먹어도 시간이 남아돌았다. 밀린 드라마나 지난 시트콤을 몰아보기도 했다. 그런 생활을 청산한 후에는 도서관에 갔다. 당시엔 은평구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도서관 특화 마을이라 집을 중심으로 사방에 훌륭한 도서관이 있었다. 구산동도서관(만화책 많아서 좋았음), 내를 건너서 숲으로 도서관(새 도서관이라 깨끗하고 빈백이 있어서 책 보다가 디비 잤다. 다 새책이어서 내가 처음 읽는 책이 많았음) 등이 있었다. 다행히 휴관일은 다 다 달라서 여기가 휴관이면 저기 가서 책을 읽고, 저기가 문 닫으면 여기 와서 책을 읽는 식으로 살았다. 그때 나는 처음 정세랑 작가의 책을 읽었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피프티 피플>. 할아버지들 틈에 앉아서 그 책을 후루룩 다 읽었다. 완독하고 확신했다. 이 분은 내 최애 작가가 될 거라고. 그리고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찾아냈고, 읽어냈다.
재취업을 하던 기간이 어땠냐는 질문을 받으면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책을 계속 읽었음에도 좋아하는 작가 한 명만을 말하라면 늘 주저했는데, 이 기간을 지나고 나서야 정세랑 작가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됐으니까. 내 취향을 정확하게 알고 말하고 키워가는 건 인생에서 너무 중요한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왜 좋아하는지는... 말하자면 토지 한 편 뚝딱이기 때문에... 20000
가장 좋아하는 책은 <이만큼 가까이>입니다. 올타임 남바완.
같은 작가를 좋아한다고 하면 호감도 300000000% 상승! 나와 친해지는 방법!(누가 궁금해하는데요)
정세랑 작가의 이야기를 사랑해 버리는 것!
3. 셜리와 서련
친구들과 제주에 갔을 때 작은 동네 서점에 갔다. 보통의 동네 서점들은 '책을 사러 온 사람'보단 '구경하러 온 사람'이 더 많다. 그곳 역시 그래 보였다. 나는 작은 책방에 가면 의무감에 책을 산다. 그날도 하나는 사야지 하면서 구경을 하다가 트위터에서 나중에 읽어보겠다고 '하트'를 찍어둔 책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더 셜리 클럽>. 박서련 작가의 책. 제주에서 돌아와서 읽었다. 이것도 국수처럼 후루룩 완독 했는데, 시종일관 다정함을 담아낸 종잇장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책을 읽고 기분이 이토록 좋아하지는 것, 좋은 감정으로만 마음이 꽉 차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 셜리가 너무 좋다. 나와 같은 방식으로 영어 이름을 정한 게 좋았다. 그의 한국 이름은 '설희'인데 발음이 비슷한 '셜리'로 정했다. 정철 주니어에 다니던 나는 원어민 수업에서 영어 이름을 정했어야 했는데... 대충 내 이름이랑 비슷한 '샐리'로 정했다. 라인프렌즈가 나올 줄 알았다면 그걸로 안 했을 텐데. 지금 영어이름을 정하라고 하면 '비'로 하고 싶다. 영원한 웬트워스의 탑독.
셜리는 타인의 다정함을 오롯하게 받아들인다. 다정한 사람만이 다정함을 곡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보통 다정한 사람들은 그릇도 크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을 가득 담아야 하기 때문에. 간장 종지의 마음을 가진 나는 셜리 부럽다. 부러워서 좋아한다. 사실 흠모할지도...? 그리고 그런 셜리를 만들어낸 작가님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