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포스트(The Post)'를 보고
"고상한 일만 하러 신문사 들어왔나 애송이?
(What is it? Do you think we do here for a living, kid?)"
WP의 편집국장 벤의 지시가 불법적인 일이냐고 묻는 인턴. 사실상 영화는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워싱턴포스트의 편집국장의 촉으로 뉴욕 타임즈가 엄청나게 큰 사건을 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시작되는 스토리. 그 특종은 바로 '펜타곤 페이퍼', 미국 정부의 네 명의 대통령이 30년 동안 감춰왔던 베트남 전쟁의 비밀이 드러난 문건. 이를 공개하느냐 마느냐에 대한 경영인 '여성 신문사주'와 언론인 '편집국장'의 이야기. 덧붙여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페미니즘 철학까지 담은 영화 '더 포스트(The Post)'
당연한 이야기지만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거장 감독의 연출과 배우들의 배우 메릴 스트립과 톰 행크스의 연기, 그리고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조쉬 싱어의 각본, 소니픽처스의 회장 에이미 파스칼의 제작 등 영화적 절대 요소들은 단 한 가지도 부족함 없이 완벽했다. 언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보았을만한 영화 <스포트라이트>와 이번 <더 포스트>를 간략히 비교하자면 다음과 같다.
'스포트라이트'와 '더 포스트'의 차이점은 크게 세 가지로 보인다.
1. 국내에 생소한 외신인 <보스턴 글로브(The Boston Globe)> 대신 일반 대중에게 좀 더 익숙한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와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가 주 역할을 맡는다.
2. 언론과 대립되는 집단과 행위의 차이, 그리고 사건에 대한 인지도의 문제. '일부 종교인의 추악한 아동 성추행 행위'인가, 아니면 '무려 30년, 4대에 걸친 거대한 미 정부의 거짓말, 이로 인한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인가. 상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가 다룬 사건보다 '더 포스트'가 다룬 사건을 사람들이 더 많이 인지하고 있다는 차이.
3. '스포트라이트'가 취재에 초점을 맞췄다면 '더 포스트'는 그보다 더 나아가 신문 생산 및 배송 과정 등 신문사가 '언론사로서의 역할'과 '종이 지면 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제조업 회사'의 양면의 모습을 모두 보여준다. 언론사인 동시에 주주 회사인 부분, 비즈니스와 언론의 자유를 어떻게 공존시키는지에 대한 경영적 측면에서의 언론사를 더욱 자세히 보여준다.
영화에 주옥같은 명대사는 샐 수 없이 많이 나온다. 영화에서 대법원 판결 내용 중 "언론은 통치자가 아닌 국민을 섬겨야 한다", 혹은 캐서린의 "뉴스는 역사의 초고이다", "우리가 권력을 견제해야 해요. 우리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요." 등 인상 깊은 대사도 많았으나 내겐 이 대사가 기억에 남았다. 영화 초반, 식당에서 발행인 캐서린이 편집국장 벤에게 했던 말.
기사의 수준이 수익을 창출한다"
기사의 수준이 수익을 창출한다는 그 말, 과연 현재에도 적용되는 사실일까? 기사의 수준이 높으면 그 언론사의 기사를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는 의미. 사실 그간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경영적 측면에서 그동안 나쁘지 않은 운영을 해왔다. 똑똑하고 취재력 있는 기자들과 잘 팔리는 신문지면, 그리고 어마어마한 가격의 1면, 후방 전면 광고. 방송사도 히트 프로그램의 전후 광고, 골든타임의 어마어마한 광고로 어마어마한 수익을 창출해냈다. 물론 그만큼 신문사나 방송사가 홍보 채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정부, 기업, 그 어떤 단체도 무서워하지 않았을, '힘'과 '돈' 모두를 가진 언론사. 하지만 지금은 과연 그럴까?
과거의 뉴욕타임즈가 그러했고, 워싱턴포스트가 권력에 굴하지 않고 당당한 보도를 했기에 지금의 두 회사가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언론사'로서의 본연에 충실하고, '회사'로써의 경영,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았던 호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기사의 수준이 수익을 창출한다'는 캐서린의 경영 모토로만은 통하지 않는 시대. 기사의 수준은 기본이고, 경영적 혁신이 필수적이다.
언론진흥재단의 '2017 언론수용자 의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7년 종이신문 구독률과 열독률은 전년 대비 각각 4.4% 포인트와 4.2% 포인트 줄었다. 수용자 의식조사가 처음 실시된 1996년과 비교했을 때 69.3%의 구독률은 9.9%로, 85.2%를 기록하던 열독률은 16.7%로 급감했다. 조선일보만 놓고 보더라도 매번 외치는 캐치프레이즈인 '신문 판매부수 1위'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신문'이라는 지면은 더 이상 플랫폼으로서의 매력이 없다. 영향력과 신뢰도는 5위 안팎을 겨우 유지하는 수준. 유료 부수는 점점 쪼그라들어 판매 수익과 광고 수익을 유지하기 위해 각 국장들을 나름 힘 있는 기자 출신으로 넣어 기업을 압박해 강제로 신문 구독과 광고지면을 채운다. 기업이 언론사의 입에 돈이라는 자갈을 물리는 것 같은 비정상적인 수익 구조의 사슬은 언론사에게 독처럼 파고들어 자생력을 잃게 만들고 있다.
언론사들이 살아남기 위한 여러 경영적 측면에서의 노력들과 시도가 있으며, 이는 아직 진행 중이다. 기자들의 취재력과 섭외력을 활용한 대형 콘퍼런스를 개최하거나, 미디어랩 사를 출범시켜 방송사 콘텐츠의 연합을 꾀한다거나, 버티컬 전략을 활용해 특정 타깃을 겨냥한 서비스를 출시하거나 고오급 콘텐츠를 활용해 콘텐츠 유료화를 꾀하기도 한다. 마라톤 행사 등과 같은 스포츠 행사를 주최하거나 사진 교실, 저널리즘 강좌, NIE(News In Education) 활용 강좌 등과 같은 여러 교육 사업들도 진행하지만 핵심적인 수익을 창출해내지는 못한다.
지난 20년 간, 아직 '혁신'이라고 평가할만한 비즈니스 모델이나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 언론사의 경영적 혁신, 그 시기가 언제일지, 또 그것이 무엇일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특이점은 온다. 저 비정상적인 수익 구조의 사슬을 끊고 새롭게 다시 먼저 퀀텀 점프할 언론사, 그 언론사는 '경영'과 '저널리즘', 어느 쪽에 힘을 싣는 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