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끓인다. 배추와 양배추, 콜리플라워, 당근을 썰어 냄비에 넣는다. 이때 미리 씻어 놓은 생강과 깐 마늘도 같이 딸려 들어간다. 그 다음 비닐 봉투에 담겨 있던 양파를 조심스럽게 꺼낸다. 이때 나는 나도 모르게 비장한 표정을 짓는 것 같다. 양파를 썰기 시작한다. 눈이 아려온다. 낭패다. 허겁지겁 대충 양파를 냄비에 넣는다. 눈물이 흐르는 한쪽 눈을 질끈 감고 부엌 밖으로 피신해 본다. 소용이 없다. 세면대에서 흐르는 물로 눈을 씻어 본다. 여전히 소용이 없다. 이제는 콧물까지 흘리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세면대로 돌아가 세수를 한다. 거울을 보니 눈이 이미 빨갛게 충혈되어 있다. 전의(라고 할 것 까지는 없지만)를 가다듬은 후 부엌으로 다시 돌아온다. 마트에서 발견한 된장을 듬뿍 퍼서 풀어 넣는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주인공인 돼지고기 네 덩어리를 팔팔 끓는 냄비 안으로 들여보낸다. 적당히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되면 집게로 돼지고기 한 덩어리를 꺼내 도마 위에서 썰어본다. 잘 익었으면 국물과 야채를 넣은 그릇에 한 덩어리를 모두 썰어 넣는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소위 ‘수육탕’이라고 불릴만한 이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이 음식의 완성을 확인하는 마지막 절차는 돼지고기를 썰어서 제대로 삶아졌는지 보는 것이다. 그날도 나는 칼로 고기를 썰어서 고기의 단면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친절한 말투로.
“너, 거기 좀 더 있다가 나와야겠다.”
세상에, 자신이 먹을 음식에 말을 거는 인간이라니. 내가 그렇게 말이 하고 싶었나? 생각해보니 그날은 하루 종일 누구를 만난 적도, 다른 이와 전화나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먹을 음식에 말을 걸다니. 고기를 다시 냄비에 넣으면서 나는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실실 웃었다. 그렇게 우두커니 혼자 웃다가 나는 인간의 입에 대해서 생각한다.
인간의 입이란 보잘 것 없습니다. 내가 언어에 대해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다. 자,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친구의 입을 보세요. 학생들은 낄낄거리며 친구의 입을 슬쩍 쳐다본다. 그렇게 말고 자세히 보세요. 잘 보고 친구의 입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기억해 두세요. 자 이제 티라노사우루스를 떠올려 보세요. 티라노사우르 알죠? 직접 보지는 못했겠지만 그림으로 많이 봤을 겁니다. 그럼 티라노사우루스의 입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세요. 그렸습니까? 그럼 이런 상상을 해봅시다. 여러분이 아무런 도구도 없이 맨몸으로 정글에 떨어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곳에서 무조건 먹을 것을 사냥해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같은 조건에서 티라노사우루스가 정글에 보내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자 이제 정글 한 가운데 떨어진 친구의 입을 다시 한 번 보세요. 어떤가요? 어처구니가 없지 않습니까?
한때 지구상의 최강자였던 티라노사우루스의 생김새는 단출하다. 거대한 몸통에 거대한 머리 하나. 머리가 거대한 이유는 바로 거대한 뇌가 아닌 거대한 입을 가졌기 때문이다. 앞발이고 뭐고 필요 없다. 먹는 것에 최적화된 입 하나면 충분하다. 이 동물은 그 입으로 백악기의 세계를 지배했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인간의 입은 참으로 한심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애처로울 정도다. 대신 인간의 입은 여러 가지 소리를 내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입은 ‘먹는 일’보다는 ‘말하는 일’을 더 잘하도록 디자인되어 있다는 뜻이다.
‘먹기’의 입장에서 인간의 입과 소화기관은 비효율적이다. 그렇기에 이 입이 먹을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과 절차는 매우 복잡해졌다.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자연 상태의 먹이를 그대로 섭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먹이’를 완전히 다른 상태로 변화 시켜야만 먹을 수 있다. 그것이 곧 ‘음식’이다. 가장 간단한 음식이자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자신이 찾은 인생의 비의를 담아서 던졌던 농담인 “‘삶’은 달걀”을 생각해보자. 살신성인의 마음을 가진 닭이 온천 여행을 가서 온천욕을 하다가 달걀을 낳으면 모를까 열을 받아서 단단해진 이 흰색과 노란색의 단백질 덩어리는 자연 상태에서는 구할 수 없다. 삶을 계란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정한 화력으로 오랜 시간 타는 ‘불’과 그 불을 견디는 동시에 내용물을 담을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깨끗한 물이 필요하다. 회도 마찬가지다. 회는 ‘칼 맛’이니까. 알래스카의 곰들이 연어는 잡아먹을 수 있을지언정 연어회 맛은 모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마법과도 같다. 마법도 마법에 걸린 대상을 전혀 다른 상태의 무엇- 그것이 야수든 말하는 주전자든-으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빗자루를 타지 않을 때 마녀들은 항상 요리를 하고 있는 것도 이유가 있다. 그들이 가진 마법의 힘은 그 ‘요리’에서 나온다. (요즘 요리사들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을 사람들이 넋을 놓고 바라보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요리사들은 마치 전능한 능력을 가진 마법사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요리 그 자체가 마법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요리를 한 가지에 더 첨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신비한 ‘주문’ 즉 ‘언어’다.
내게 동화에서 그려지는 마녀들의 모습들은 ‘말’이 ‘먹는 것’과 얼마나 깊이 관계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 같다. 오래 전 인류가 아직 아프리카에 머물고 있었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먹기에는 부적절하지만 ‘말하는 입’은 인류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화살로 사냥감을 쏜 다음 그 사냥감을 단체로 쫓아간다. 사냥감은 인간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도망치지만 영원히 그런 속도로는 달릴 수 없다. 대신 인간은 느리지만 오래 동안 뛸 수 있다. 이 부족은 사냥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몇날 며칠을 그렇게 계속 사냥감을 쫓아간다. 혼자가 아닌 단체로. 단체로 뛰면서 이 부족은 사냥감이 어디로 갔을지 어떤 상태일지 어디로 숨었을 지를 서로 이야기하고 전략을 세운다. 이들의 무기는 거대한 입이 아니라 두 다리와 말하는 입이다.
인간의 먹는 행위에는 이렇게 ‘말’이 개입된다. 아니 개입되어 있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음식 재료를 구하는 것부터 요리과정 그리고 식탁 앞에 차려져서 특정한 이름으로 불리는 요리가 인간의 입에 들어가기까지- 아아, 그 고된 노동의 과정!- 언어는 그 모든 과정에 이미 그리고 완전히 ‘섞여’ 있다. 말은 음식이 되고, 또 음식은 말이 된다. 요컨대 우리는 식사를 할 때 음식뿐만 아니라 언어도 같이 먹는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은 실제로 먹을 수 없는 것까지 언어를 통해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는 매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욕’도 먹고 그래서 이런 저런 ‘마음’도 먹는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달걀’이란 농담은 음식과 언어의 묘한 관계를 정확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인간은 ‘말’과 ‘음식’으로 자신이 사는 세계를 분류하고 질서를 부여하려 한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어떤 것을 먹으려는 사람과 먹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 어떤 것을 먹이려는 사람들과 그것을 먹지 않으려는 사람들. 먹을 수 있는 시간과 먹을 수 없는 시간, 먹을 수 있는 공간과 먹을 수 없는 공간, 나와 같이 음식을 나누는 자와 나와 같이 나누지 않는 자. 같이 음식을 먹고 싶은 자와 먹기 싫은 자 등등. 이런 분류와 명명은 모두 언어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내가 어떤 음식을 언제 누구와 먹는가는 그의 정체성과 그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는 언어를 비롯한 여러 상징으로 조직된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제사와 같은 제의이다. 제의란 결국 자신이 믿는 신이나 자신의 조상과 음식을 나누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복잡해 보이지만 제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단순하다. 이거 드십시오. 저것도 드셔 보시고. 술도 한 잔 하셔야지요. 많은 종교들이 이런 과정에 언어적 상징과 음악을 섞어 반복하고 반복한다. 이 반복 속에서 어떤 이들은 그들이 꿈꾸는 신성에 다가간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보면 이상하게 배가 고파지고, 맥주가 마시고 싶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루키 소설 속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먹는 과정이 반복되어 묘사된다. 거기에 음악까지 덧붙여서. 하루키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이러한 반복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소설 속 인물들에게 빠져드는 것이다. 물론 하루키 소설 속 인물 중에 자신이 먹을 음식에 친절하게 말을 거는 인간은 없다.
아침 8시에 시작되는 중국 대학의 수업. 학생들은 온갖 음식들을 먹으며 내 강의를 듣는다. 중국식 크레페(?)인 쩐삥으로 시작해서 도넛 스틱 모양의 요우티아오, 콩국물인 또우장, 삶은 계란까지. 처음에는 생경하고 당황스러운 광경이었지만, 지금은 약간 아빠의 마음 같은 흐뭇한 느낌으로 학생들을 바라본다. 그들이 먹는 음식과 나의 한국어가 잘 섞여서 소화되길 바라면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점심시간의 거리. 언제나처럼 길에는 줄을 서서 자신의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학생들이 잘 안 가는 길가 끝에 있는 허름한 국수집의 풍경도 똑같다. 청소부 복장을 한 아줌마, 식당 길 건너에서 자전거 고치는 자전거 노포 주인, 거리에 나오는 쓰레기에서 고철을 뒤져 수거하는 아저씨가 길가에 펼쳐놓은 간이식탁 앞에 웅크리고 앉아 국수를 먹고 있다. 그마저도 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아예 서서 국수를 들고 먹는다. 불편해 보이는데도 국수를 먹는 사람들은 뭔가 시끄럽게 떠들고 웃고 있다. 그 모습이 살짝 부러워진다. 앉아서 먹든 서서 먹든 그들이 먹는 국수는 그날 하루 한 ‘점’의 위안일 터이니.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 시장으로 들어가 계란 한 바구니를 산다. 오늘 점심은 달걀을 삶아 먹을 예정이다.
삶은, 달걀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