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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주 May 28. 2018

to shanghai [verb]

나는 상하이 와이탄 경찰서의 조사실에 앉아 있다. 조사실은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이미지 그대로 어둠침침하고 밀폐되어 있는 공간이다. 회색 테이블 위에는 담배 재떨이 대용으로 쓰이는 물병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여기서 식사도 하는지 퀘퀘한 담배 냄새와 섞인 음식 냄새가 조사실 벽에서 뿜어져 나온다. 이건 뭐 방송에서 나오는 이미지와 너무 똑같잖아. 나는 이 조사실이 드라마 속 이미지를 본 따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을 품는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심문을 받으러 올 때면 아, 여기가 거기구나, 내가 결국 이곳으로 오고야 말았구나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말이다.


대학생 시절 화장실이 급한 나머지 다짜고짜 파출소로 뛰어 들어간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경찰서에 오게 된 것은 처음이다. 하기는 그걸 누가 알았겠는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중국에서 경찰차를 타고 가서 사건 현장을 확인하고, 경찰서 조사실에 앉아 있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쯤에서 투캅스라는 옛날 영화에서 본대로 테이블 위에 머리를 마구 찧으며 피를 좀 흘려야 되는 게 아닌가하고 생각하던 중에 형사가 들어온다. 깍두기 머리를 한 피곤에 찌들어 있는 중년 형사를 예상했지만 정작 들어온 건 30대 초반의 모범생처럼 생긴 형사다. 형사는 해리포터처럼 둥근 테 안경을 쓰고 있어서 약간 귀엽기까지 하다.


해리포터 형사는 나와 궈(郭, Guo) 선생을 번갈아 쳐다보며 질문을 던진다. 누가 사건 당사자인지 확인하는 질문이다. 나 대신 통역을 위해 와준 궈선생이 말을 시작한다. 형사와 궈선생이 하는 대화를 따라 잡으려 노력했지만 별로 들리는 내용은 없다. 들리는 건 그저 형사가 ‘되, 되’(그래요, 그래요)하며 맞장구치는 말뿐.


조서 작성이 시작된다. 타자기나 노트북으로 조서를 작성하는 줄 알았으나 형사는 종이 몇 장을 들고 손수 궈선생의 말을 받아쓰기 시작한다. 아니 타자기가 있어야 타자기에 이마를 찧을 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궈선생도 한 마디를 한다.


“ 노트북으로 쓸 줄 알았는데, 그냥 종이에 쓰네요.”

“ 그러게요.”


형사는 나의 이름을 묻고, 궈선생은 나 대신 ‘바이’(白)라고 대답한다. 내 이름 뒤에 무언가를 쓰다말고 형사가 궈선생에게 말을 건넨다. 이어서 궈선생이 나에게 질문을 한다.


“그게 정확히 언제였죠?”

“아, 그게 그저께, 수요일, 한 오후 7시 15분쯤이었죠.”

그렇다. 수요일이었다. 나는 다시 수요일의 날씨를 떠올린다. 너무나 화창해서 날씨 한 번 지랄 맞게 좋다고 욕하고 싶었던 수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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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조서]


P.M. 2:30

드디어, 바이(白, Bai)는 외출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거의 3주 만에 하는 외출이었다. 이것은 나름대로 사건이라고 불릴 수 있는데, (형사인 나의 촉과 관찰에 의하면) 바이의 몸속에 은둔형 외톨이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방에 뿌리를 내린 식물처럼 살 수 있다. 몇 년 동안 외부와 격리된 채 살아야 하는 화성 모의 탐사 훈련도 거뜬히 해낼 그런 인간인 셈이다. 그런 그가 외출을 하기로 한 것이다.


너무도 완벽한 날씨 때문이었다. 바람은 기분 좋게 따뜻했고, 미세먼지도 거의 없는 맑은 날씨였다. 마침 바이는 <상하이 모던>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와이탄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상하이의 근대를 읽다가 바이는 무심코 바깥 풍경을 쳐다보았다. 문득 바이는 불쑥 쨍한 하늘 아래 서 있는 와이탄의 근대 건축물들이 보고 싶어졌다.


어떻게 보면, 바이가 이 사건의 당사자가 된 것은 날씨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P.M. 4:30

바이는 상하이 지하철 난징둥루(南京東路)역 2번 출구로 나왔다. 그는 와이탄으로 곧바로 가지 않고 와이탄의 뒷골목을 따라 걸기로 결정한다. 일행이 있다면 결코 같이 걷지 않을 길이었고, 시간에 쫓기는 관광객들이라면 더더욱 가지 않을 길이었다. 바이는 아무런 목적 없이 길을 느리게 헤매는, 이 완벽하게 비효율적인 행위가 주는 즐거움에 잔뜩 취해 있었다.

P.M. 5:10

뒷골목을 걸어올라 가던 바이는 황푸 강과 연결된 쑤저우 강에 발견한다. 바이는 쑤저우 강 너머 상하이 우편 박물관에 들어가 보려 했지만 이미 관람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는 황푸 강과 쑤저우 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다리가 와이탄의 시작인 ‘와이바우두차오’(外百度橋)라는 걸 깨닫고 다리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와이바우두차오. 스필버그의 영화 ‘태양의 제국’에서 주인공 소년이 탄 차가 건너는 바로 그 다리였다. 이 다리를 지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마구 뒤섞인 풍경을 자아내는 와이탄이 펼쳐질 것이다. ‘하늘에 닿는 건물’이라는 뜻의 마천루가 즐비한 와이탄이라는 공간은 그 탄생 시점부터 그 압도적인 높이와 규모, 화려함으로 중국인들을 서구에 대한 환상으로 유도하도록 기획된 것이었다. 바이도 예외가 아니어서 다른 중력이 적용되는 이 공간에서 그는 일상과 다른 행동과 감정에 빠지게 된다.

바이는 이 다리 근처에서 아인슈타인과 버트란트 러셀이 묵었다는 상하의 최초의 호텔 ‘애스터 하우스’(Astor House)를 살펴보고, 러시아 영사관 뒤에 있는 전망대 공원을 발견한다. 바이는 6시 10분까지 이 공원에서 머문다.

황푸강 건너편의 초고층 빌딩들의 모습과 다리 건너의 와이탄이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는 이 전망대 공원에서 바이의 들뜬 감정은 최고조에 이른다. 이러한 감정은 여행의 특권이다. 하지만, 위기에 순간에 필요한 정확한 관찰을 막는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결국 바이는 이 감정 때문에 치명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P.M. 6:10

바이는 와이바이두차오를 건너 와이탄의 근대 건축물을 하나씩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이때 핸드폰 배터리는 50%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나비 채집하는 곤충학자와 같은 열정을 잃지 않았다. 바이는 와이탄의 건물들을 찍으며 천천히 거리를 내려갔다. 나중에 사진을 보며 20세기 초 해가 지는 제국 영국이 만들어 낸 신고전주의 양식과 새로운 제국 미국의 아르데코 양식의 충돌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 살펴볼 참이었다.


여행객 중 와이탄의 건축물을 구경하는 이가 바이 혼자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저녁 시간에 와이탄을 찾는 사람들은 와이탄의 근대 건축물을 보러 온 이들이 아니다. 사람들은 전망대 공원길인 ‘와이마루’에 올라 화려한 조명으로 번쩍거리는 푸둥의 초고층 건물들을 감상한다. ‘와이마루’에서 푸둥의 풍경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근대 건축물들은 푸둥의 건물들을 더 돋보이게 하는 배경일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해 둘 점. 그는 그 많은 관광객들 중에 유일하게 일행 없이 홀로 돌아다니는 남자였다. 와이탄의 건물을 혼자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바이의 모습은 무리에서 이탈한 가젤과도 같았을 것이다. 사바나에서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가젤은 먹기 좋은 사냥감이다.


준비할 것은 그저 상을 차리는 일뿐.


P.M. 7:05

바이는 황푸 강을 건너가는 페리가 있는 진랑동루의 선착장 근처에서 마지막 건물 촬영을 끝낸다. 이때 핸드폰 배터리 잔량은 10%. 배터리 잔량을 확인한 바이는 그제야 허기를 느끼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배가 고팠지만 그는 여전히 들떠 있었다. 나름 완벽한 날씨에, 완벽한 헤매기였기 때문이다.

P.M. 7:15

전망대 공원길인 와이마루를 빠져나오는 순간 바이에게 한 50대 여성이 중국어로 길을 물어 온다. 세련되지만 정갈한 스타일의 옷을 입은 선한 얼굴의 표본 같은 중년 여성이었다. 중년 여성의 옆에는 20대로 보이는 여자가 같이 서 있었다. 역시 세련된 스타일에 꽤나 미인이었다. 이 때 바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모녀일 것이며, 옷차림으로 보아 여행객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바이는 중국어로 자신이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라고 대답했다. 중년 여자는 엄마 미소를 지으며 계속 중국어로 뭔가를 물었고, 바이는 중국어를 못한다고 말했다. 이후 중년 여성은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자신을 소개했다. 중년 여성은 자신이 ‘라오슈(老师 선생님)’, 정확히는 유치원 선생님이며, 20대 여자는 자신 친구의 딸이자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라고 소개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유치원 선생은 제자가 있는 상하이에 며칠 여행을 온 상태였고, 제자인 젊은 여자는 상하이에 있는 의류 회사의 디자이너였다.


바이는 이 때 몇 가지 추론을 바탕으로 두 여성에 대한 경계를 해제한다. 첫 번째 추론은 ‘라오슈’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루어졌다. ‘선생님’ 집단에 대한 기존의 관찰을 바탕으로 바이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 따라서 이 여성도 믿을 수 있다’라는 귀납법적인 결론을 내린다. 더 나아가 라오슈라는 말은 바이에게 아는 이 하나 없는 상하이 한 가운데서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난 듯 한 효과를 냈다. 어찌되었건 넓게 보면 동종 업계에 있는 사람 아닌가?


두 번째 추론은 바이가 20대 여자에게서 ‘You’re quite good at English.’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루어졌다. 바이는 중국에서는 영어가 거의 안 통한다는 사실, 심지어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가의 가게에서도 영어가 안 통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바이는 영어를 꽤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 더구나 이디엄을 이용해서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사람은 상당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중년 여자는 바이와 말을 하다가 막히면 20대 여자에게 통역을 부탁했는데, 그런 통역도 20대 여자는 손쉽게 해냈다.


세 번째 추론은 빈약한 근거에 기반한 것이다. 중년 여성은 계속해서 되는 영어, 안 되는 영어를 총동원해서 바이에게 질문 공세를 해댔다. 마치 외국인에게 영어를 사용할 기회를 얻은 김에, 자신이 아는 영어를 모두 다 사용해보겠다는 투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바이는 같은 숙소에 사는 젊은 러시아 남자 선생을 떠올렸다. 숙소에서 마주치면 간단한 눈인사나 인사말만 하고 지나치는 다른 외국인 교수들과는 달리 이 러시아 선생은 만나기만 하면 너무 부담스럽다 싶을 정도로 반가워하며 말을 거는 유별난 사람이었다. 영어로 계속 말을 걸어대는 모습을 보면서 바이는 이 중년 여성도 그 러시아 남자와 같은 과의 사람, 좀 유별나기는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네 번째 추론은 추론이라고 하기도 그런 내용이다. 바이는 많은 여행책에서 여행의 기적에 대해 읽었다. 여행을 하다 위기에 빠졌을 때 조건 없이 도움을 내미는 사람들, 우연히 만났지만 서로를 환대하는 여행객들,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서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내는 놀랍고 새로운 경험들. 바이는 이 만남이 바로 그런 결정적인 순간으로 가는 입구가 아닐까하는 추측을 했다.


중년 여자는 바이에게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아쉽다며, 시간이 되면 커피나 한 잔 하자며 제안한다. 바이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그 제안을 따른 이유는 위의 네 가지 추론, 특히 마지막의 추론이 큰 역할을 했다.


P.M. 7:20

중년 여자는 바이에게 근처에 잘 아는 커피숍이나 식당이 있는지 물었다. 바이는 당연히 모른다고 대답을 했다. 중년 여자는 같이 가자며 바이를 이끌었다. 그런데 엉터리 영어로 말을 걸던 중년 여자는 길을 걸으며 바이에게 계속 빠른 중국어로 질문을 해댔다. 바이는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고, 중년 여자는 성큼성큼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바이는 갑자기 중국어로 질문을 하는 중년 여자가 이상하게 느껴졌다고 진술했다.


P.M. 7:30

두 여자는 와이탄 대로변에서 가까운 한 커피숍 겸 와인빠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 층에 있는 테이블이 비어 있었음에도 중년 여자는 거침없이 이층으로 바이를 안내했다. 일 층에는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와 그의 친구처럼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둘 다 체중이 100kg에 가까울 것 같은,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층으로 올라가 자리에 앉을 때 바이는 또 한 번 이상함을 느낀다. 젊은 여자가 중년 여자 옆에 같이 앉지 않고 바이의 옆자리에 앉은 것이다. 바이는 남자든 여자든 처음 만난 사람 사이에 일정한 공간적 거리를 두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냥 우연일 뿐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만다.


이윽고 메뉴판이 올라왔다. 바이는 메뉴판을 펼쳐 자신이 마실 아메리카노의 가격만 확인했다. 50위안이었다. 상당히 비싼 가격이기는 했지만 바이는 관광지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두 여자는 건전하게 콜라를 주문한다.

P.M. 7:35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이야기를 하던 중년 여자가 잠시 일 층을 다녀온 후, 사장이 와인 세 잔과 화채 안주를 가지고 올라온 것이다. 바이는 당황했지만 중년 여자가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만다. 이 상황에서 바이는 두 개의 또 다른 추론을 한다. 이렇게 큰 관광지의 대로변에 있는 번듯한 가게에서 이상한 장난을 할 일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다른 추론은 이 와인의 값을 중년 여자가 치르리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커피와 콜라와 와인을 동시에 마시는 이상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중년 여자가 건배를 제의했다. 바이는 와인의 한 잔에 와인이 3분 1도 안 채워져 있었으며, 맛은 매우 텁텁했다고 진술했다.


중년 여자는 바이에게 이름을 물었다. 바이는 자신의 이름이 ‘白’이라고 가르쳐줬다. 바이도 중년 여자에게 이름을 물었다.


“왓츄여 네임?”

“마이 네임? 마이 네임... 시크릿.”

“왓?”

“오케이, 마이 네임 이이즈으 ....‘애플’.”

“왓?, 니더 밍쯔 ‘핑궈’ 마?”(당신 이름이 ‘사과’라구요?)

“쓰”(그래요.)


이때 처음으로 바이의 뇌 속 파충류의 뇌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비유적으로 보면 사람의 뇌는 파충류의 뇌(뇌간)- 포유류의 뇌(변연계)- 인간의 뇌(전두엽) 삼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파충류의 뇌는 싸울 것인가(fight) 또는 도망칠 것인가(flee)를 결정한다. 그런데 바이의 파충류의 뇌가 깜빡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신호는 곧바로 포유류의 뇌인 변연계와 인간의 뇌인 전두엽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바이의 인간의 뇌는 아직 도망칠 때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뭔가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화제는 ‘핑궈’가 방문한 상하이의 여행지로 옮겨 갔다. 그러나 핑궈의 횡설수설 영어는 이해하기 힘들었고, 바이가 여행지를 추천해 줄 때 핑궈는 뭔가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만났을 때 적극적으로 통역을 하던 젊은 여자는 계속 자기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P.M. 7:45

여자들의 와인 잔은 이미 비어 있었다. 바이는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핑궈는 한 잔만 더 하고 가자며 금세 내려가 와인을 주문했다. 말릴 사이도 없이 두 번째 와인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젊은 여자가 스마트폰으로 한 남자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을 아는지 물어보았다. 한국에서 요즘 사이비 교회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종교 단체의 교주였다. 젊은 여자는 자기는 크리스천인데 친구의 꾐에 빠져서 삼개월동안 그 단체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고 이야기했다. 한국을 정말 잘 아는 친구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바이의 파충류 뇌에서 또 불이 켜졌다.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젊은 여자가 바이의 팔을 계속 툭툭 만졌기 때문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의 대부분의 삶을 여초 지역에서 산 바이의 경험으로 보면 이런 일은 도무지 발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이의 번연계와 전두엽이 파충류의 뇌에서 보내온 신호를 바탕으로 ‘도망쳐’라는 결론을 내려고 하고 있었다.


그때 핑궈가 다시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바이는 가족 사진을 보여주면서 가족과 같이 했던 상하이 여행을 얘기했다. 바이 나름대로는 나 가족이 있는 남자다, 그러니 이상한 방향으로 몰지마라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방어책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젊은 여자는 계속 툭툭 바이의 팔을 만졌다. 결론이 점점 명확해졌고 이를 보강해 줄 증거가 필요했다. 바이는 유치원 선생인 핑궈에게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과 같이 찍은 사진이 있으면 보여 달라고 했다. 바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핑궈는 No라고 답했다. 결정적인 대답이었다.

다시 한 번 바이가 일어나야겠다고 했을 때, 이번에 젊은 여자가 한 잔만 더 하자고 하면서 큰 소리로 와인을 주문했다.


P.M. 7:55

미리 준비했다는 듯 세 번째 와인이 올라왔다. 핑궈는 젊은 여자를 가리키며 바이에게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유, 노우 와이프 히어. you, no wife here. 유 캔 미트 허, 시크릿. you can meet her , secret.”


그 말을 듣는 순간 바이는 잠시나마 여행지에서의 마법 같은 환대와 우정을 기대했던 자기 자신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핑궈와 젊은 여자는 어느새 세 번째 와인도 비운 상태였다. 뜬금없이 젊은 여자는 음악을 좋아하냐고 묻더니 같이 음악을 들으러 가자며 일어나 춤추기 시작했다. 두 여자는 한 잔만 더 하자며 계속 졸랐고, 바이는 정말 가야한다고 이야기했다. 결국 바이가 일어나서 나가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젊은 여자가 ‘마이딴!’(계산서)를 불렀다.


P.M. 7:45

사장은 망설임 없이 계산서를 곧바로 바이에게 내밀었다. 계산서를 확인한 순간 바이의 뇌 속에서 파충류의 뇌, 포유류의 뇌, 인간의 뇌 할 것 없이 계속해서 불이 번쩍였다. 계산서에는 2810 위안이라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한국 돈으로 거의 50만원이 나온 것이었다. 바이는 280 위안이 잘못 찍힌 게 아닌지 의심했다. 빠이는 사장에게 메뉴판에서 우리가 마신 와인이 무엇인지 보여 달라고 했다. 사장이 보여준 메뉴판에 와인 한 잔의 가격은 280위안, 한국 돈으로 거의 5만원이었다.


고개들 들어 여자들을 보았다. 핑궈는 고개를 완전히 돌린 채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고, 젊은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왜 핑궈가 자신을 2층으로 바로 끌고 올라 왔는지, 1층에는 왜 몸무게가 0.1톤 가까이 될 것 같은 남자 두 명이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거의 완벽했던 하루가 완벽한 악몽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이때 핸드폰의 배터리량은 2%. 전화로 중국의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P.M. 8:03

삼층 구조로 이루어진 바이의 뇌에서는 부지런히 신호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파충류의 뇌가 가장 강력하게 불빛을 내보냈다.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싸우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핸드폰은 거의 방전 직전이었다. 정말 잘못되는 경우 도움을 청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판이었다. 가게에서 나오는 것이 안전을 확보하는 최선이 방법이었지만, 그 가격을 다 치르고 나올 수도 없었다. 순간, 전두엽에서 신호를 하나 보냈다. 그 신호는 바로 국민학교 산수 시간에 배웠던 ‘분수’였다 .


바이는 사장 앞에서 계산기를 두드려 자신이 3분의 1을 내고 나머지는 여자들이 낼 거라고 말했다. 사장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여자들이 돈을 내달라며 계속 우는 소리를 했지만 바이는 계산서의 3분 1을 계산하고 가게를 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P.M. 8:05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바이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가게로 돌아갔다. 밖에서 가게 사진을 찍은 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여자들과 건장한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바이는 사장에게 메뉴판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었다. 사장은 그게 별 대수냐는 듯 찍으라고 했다. 사진을 찍은 후 바이는 사장에게 여자들이 돈을 냈는지 물었다. 사장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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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가 만약 해리포터와 같은 마법을 쓸 수 있다면 나의 머릿속을 읽어 이런 내용의 조서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형사에게 여자들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 어리숙한 한국 남자일 뿐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여자한테 홀려서 따라갔다가 사기를 당한 어리석은 남자의 이야기로 간편하게 포장되어 유통될 것이다.


어찌되었건 형사는 세 장 가까이 조서를 꼼꼼하게 채워 나갔다. 형사는 궈선생에게 뭔가 말을 건넨다.


“예전에는 감금해 놓고 돈을 줄 때까지 때리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경찰들이 단속을 하기는 하는데 요즘에는 신종 사기 기법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네요. 더구나 요즘에는 노련하게 경찰에서 사기인지 아닌지 법적으로 판단하기 애매할 정도로만 사람들 등을 친다고... 이 가게 메뉴판도 다 관련 행정부서에서 허가를 받은 거라 처벌이 힘들 수도 있대요...다음부터 다른 지역에 가실 때도 조심하시랍니다.”


이렇게 큰 대도시에서 사기라니. 그날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상하이에서 이런 사기 범죄가 기승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건 이후 집에 돌아와 인터넷에 ‘상하이’, ‘사기’라는 키워드를 쳐 넣은 후에야 나와 같은 이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돌이켜보니 두 여자는 우연히 나에게 길을 물어본 것이 아니라 혼자 다니는 나를 주시한 후 접근한 것이었다. 카페로 가는 길에 핑궈가 나에게 중국어로 계속 뭔가를 물어본 것도 나를 속이기 전에 나의 중국어 실력을 가늠해 본 것이었고.


유치원 교사와 그 제자로 가장한 것도, 젊은 여자가 자신의 신앙 경험을 털어놓은 것도 모두 내가 어떤 귀납적 추론을 할 것인지를 파악하고 만든 각본이었다. 나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백조는 모두 희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두 여자는 검은 백조, 블랙 스완(Black swan)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재구성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훌륭한데."


조서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하는 사인을 한 후, 궈선생과 나는 경찰서를 나왔다. 이것도 추억인데 경찰서 앞에서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어보라는 궈선생의 말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다시 집. 나는 마지못해 읽다가 만 <상하이 모던>을 다시 편다. 그러다 이 책의 33쪽에서 다음 내용을 발견한다.


"...그것은 상하이의 매력과 신비함을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도시의 이름을 영어에서 나쁜 의미를 가진 동사로 만들기도 하였다.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동사 ’상하이하다 to shanghai’ 는 ‘아편으로 인해 마비되어, 인력을 구하는 배에 팔려버리다’를 의미하거나 ‘사기와 폭력으로 한바탕 싸움을 일으키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


이 사건으로 인해 불신지옥에 빠진 나는 네이버 어학 사전에서 다시 shanghai를 찾아본다.                    


shanghai [|ʃӕŋ|haɪ]

[동사] shang・hai・ing / -'haIIN / , shang・haied , shang・haied / -'haId / ~ sb (into doing sth)

(구식 비격식) (어떤 일을) 속여서 하게 하다[강제로 시키다]


아,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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