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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주 Jun 09. 2018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갑자기 인덕션의 전원이 나갔다. 언제나처럼 점심으로 먹을 계란을 삶던 중이었다. 아아, 또 시작인가? 다행히 계란은 거의 다 삶겨 있었다. 관리실에 인덕션이 고장났다고 얘기해야 하는데 중국어로 인덕션이 뭐지? 계란을 소금에 찍어 먹으며 중국어로 인덕션이 뭔지 검색했다. 어랍쇼? 모니터에는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음’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무선 공유기를 살펴보니 점멸등이 껌껌했다. 그러고 보니 금방이라고 폭발할 듯 요란하게 돌아가던 냉장고 소리도 잠잠했다. 전등의 불도 들어오지 않았다. 건물 전체가 정전인가? 하지만 복도의 전등은 멀뚱히 켜져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 검색을 했지만 네트워크를 연결할 수 없다는 메시지만 나왔다. 도움을 청하러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는 가지 않고 대신 중국어 메시지와 영어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전화 요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전화와 인터넷 사용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아하, 또 시작이구나. 너무나 절묘한 타이밍이야. 그래 한동안 고장쇼가 잠잠하다 했다. 역시 내 방에는 뭔가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어. 


다음 날, 대륙의 실수라는 샤오미 매장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무선 공유기 때문이었다. 전원도 다시 들어오고, 냉장고도 터질 뜻 시끄럽게 돌아가고, 전화 요금도 다시 충전했지만, 무선 공유기는 무슨 까닭인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전원을 껐다가 켜도, 재설정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공유기를 사야겠는 걸. 그래, 받아들이자. 안 되면 새로 사야지 어쩌겠는가.


위층 방에서 흘러나오는 와이파이 신호로 상하이 샤오미 매장이 어디 있는지 검색했다. 몇 년 전 새로운 매장이 아닌 이전 샤오미 매장에 대한 정보를 믿고 길을 나섰다가 허탕을 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 올린 글인지를 먼저 확인했다. 불과 며칠 전에 4호선 중산 공원에 있는 샤오미 매장에 다녀온 사람의 글이 떠 있었다. 지난번에 갔던 곳은 중산 공원 역에 있는 매장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며칠 전에 다녀왔다니까 맞겠지.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기 바로 직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무선 공유기의 와이파이를 다시 잡아봤다. 거짓말처럼 신호가 잡혔다. 심지어 인터넷은 기존보다 더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약간 기가 찼지만 이 방의 신령스러움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외출을 그만둘까 하다가 샤오미에서 만들었다는 가성비갑 스마트시계 ‘미밴드’가 떠올랐다. 한국 돈으로 2 만 원 정도 한다는데 이왕 외출 준비한 거 그거라도 사고 오자. 싸니까 산다고? 그걸 어디다 쓰려고? 마음 한 쪽에서 시비를 걸었다. 이 봐 내가 요즘 매일 아침저녁으로 조깅하잖아? 몇 킬로를 몇 시간이나 뛰었는지 확인가능하다니까. 운동은 과학이야. 그러니까 사자. 또 다른 마음의 소리가 변호를 했다. 그래 딴 거 말고 딱 그것만 사고 오는 거야. 아, 역시 나는 논리적이야.


중산 공원역에 있는 쇼핑몰은 전에 다녀왔던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아무리 찾아도 샤오미 매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작은 쌀집(小米之家)이라서 그런가 지하 2층부터 한 층씩 올라가면서 뒤져봐도 매장은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 매장에 다녀왔다는 이가 올린 쇼핑몰 사진과 일치하는 장면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한 30분 쯤 헤맸을까. 포기하고 돌아가려 할 때 나는 이 큰 쇼핑몰이 일종의 아령과 같은 구조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아령이 한 쪽 부분만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령의 반대편을 헤맨 끝에 나는 드디어 샤오미 매장을 찾았다. 


미밴드를 사들고 나오는 길. 매장 바로 아래층에서 까르푸 매장을 만났다. 매장 앞에 서 있던 외국인들이 불어와 일본어를 사용하는 게 들렸다. 냄새가 났다. 무슨 냄새? 맥주 냄새.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매장이라면 필경 우리 동네 마트에서는 보지 못하는 다양한 맥주를 팔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다 다를까, 수입맥주 매대에서 동네에서 쇼핑할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기네스 맥주를 찾아냈다. 장바구니에 맥주를 옮겨 넣을 때 또 마음 한 쪽에서 시비를 걸었다. 이렇게 많이 사가면 너무 무겁잖아. 지하철로 30분은 가고, 내려서도 15분 쯤 걸어야 하는데? 아니야, 샤오미 매장 찾느라고 너무 고생했잖아. 고생했으니 위로가 필요해. 아, 나는 역시 논리적이야.


까르프에서 쇼핑을 마치고 아래층 푸드 코트로 내려 왔을 때, 또 내 시선을 단박에 잡아끄는 게 있었다. 예쁘게 썰려 있는 고운 주황색의 연어회 포장이었다. 중국에서는 생선이 귀한 음식이라 자주 먹지도 않지만 먹어도 여러 향신료와 함께 튀기거나 굽거나 쪄서 먹지 회로 먹는 법은 없다. 그런데 연어라니. 그것도 예쁘게 썰려 있는 연어회라니. 


마침 집 냉장고에 아사히생 맥주와 기린 맥주 두 캔이 남아 있는 것이 생각났다. 한국에 있을 때는 아사히나 기린 같은 맥주가 맛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중국에서 와서 칭다오 맥주를 마시다 질려서 버드와이저를 마시게 되고, 그 버드와이저마저 지겹다 싶을 때 아사히 맥주와 기린 맥주의 쌉쌀한 맛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냉장고에 그 맥주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 칭다오나 버드는 연어회와는 어울리지 않아. 그러나 아사히생 맥주와 연어회의 만남은 어떠한가? 중국에서는 감히 상상해 보지 못한 눈물겨운 호사 아닌가? 나는 지체 없이 연어회를 집어 들고 계산을 했다.     


드디어 집에 도착해 쇼핑한 물건들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았다. 먼저 아사히 맥주를 한 잔 쭉 들이켰다. 쌉쌀한 청량감이 목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이제 제일 중요한 순서가 남았다. 연어회를 간장에 찍어서 입에 넣었다. 이윽고 연어회의 향이 입 안 가득 채워졌다. 그 순간 나는 인덕션이 고장난 것에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이 이 맛을 위해 일어난 것이라고 우기고 싶어졌다. 그 모든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연어회를 파는 매대를 결코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그러니까 나는 연어회를 사야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아사히와 기린 맥주가 좋아졌던 것도 이 맛을 느끼기 위한 것이었고.  


하루가 지난 지금도 향긋하게 비린 그 감칠맛이 입 안에서 느껴진다. 앞서 마신 맥주의 쌉쌀함 때문에 더욱 선명해지는 그 맛이. 


그래, 논리 같은 건 다 때려치우자.


모든 것은 이 맛 때문이었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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