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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주 Jun 09. 2018

상하이의 라라무리

  어젯밤에는 너무 달렸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라. 여기서 ‘달렸다’라는 말은 말 그대로 ‘달렸다는’ 뜻이다. 어제 저녁 나는 상하이 푸단 대학의 대운동장 트랙을 30 바퀴 돌았다. 미밴드가 기록해 준 바로는 나는 오후 7시 43분부터 9시 21분까지 총 1시간 38분 동안 18km를 달렸다. 물론 처음부터 이 거리를 달릴 생각은 아니었다. 몇 주 전부터 술로 달린 날 다음에는 무조건 아침저녁으로 달린다라는 원칙(일명 달리면 달린다 원칙)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한 번에 하프에 가까운 거리를 뛸 생각은 아니었다.


  딱 10 바퀴만 뛰자.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7 바퀴째 트랙을 돌았을 때 비가 갑자기 쏟아졌고, 나는 그 때까지 뛴 것이 아까워 그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10 바퀴를 채웠다. 문제는 비를 맞은 것이 계속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비에 흠뻑 젖은 것이 무슨 큰 밑천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밑천을 최대한 이용한 투자를 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이왕 버린 몸, 이런 심정으로 한 바퀴를 더 돌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 한 바퀴가 두 바퀴가 되고, 이윽고 세 바퀴가 되더니 결국 나는 서른 번째로 트랙을 돌게 되었다.


  침대에 누우니 금방 잠이 들었다. 하지만 자는 도중 내내 몸을 뒤척일 때마다 에고고 곡소리가 났다. 그렇다. 미련한 짓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 나간 운동장 트랙을 비를 맞아가며 서른 바퀴나 홀로 뛰는 일만큼 미련한 행동은 어디 가서 잘 찾기 힘들다. 그런데 내게 최고의 정신적 고양감을 줬던 몇 안 되는 경험 중에 이 미련한 짓이 있다. 


  사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오래달리기’였다. 달리기는 가혹한 훈육 또는 처벌의 명칭이었고, 의미 없는 행동의 표본이었다. 제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TV에서 해주는 마라톤 경기 중계였다. 선수들은 먹고 살려니 뛰어야 한다고 치고, 선수들 뒤에서 몇 시간 동안 죽어라 뛰는 저 미친 인간들은 뭔가? 그리고 이런 지루한 경기는 결과만 알려주면 되지 도대체 왜 생중계해 주는 것인가? 


  그랬던 내가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한국이 군사적으로 대치중인 분단국가이며, 주권 국가이면서도 외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한 나라라는 슬픈 역사적 현실과 관계가 있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내가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미군부대에서 군생활을 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말이다. 논산 훈련소에서는 좁은 연병장 안에서 어머 어마한 먼지 폭풍을 일으키며 몇 바퀴 도는 시늉을 할뿐이었다.(사실 그것도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후반기 교육을 받기 위해 끌려간 미군 기지에서는 정말로 병사들을 ‘오오오래’ 뛰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군 기지의 규모는 어지간한 소도시만큼 컸고 그래서 기지 한 바퀴를 뛰어서 도는 게 한 시간 이상 걸렸던 것이다. 이렇게 군생활 내내 아침저녁으로 거품을 물며 뛰다보니 나는 어느덧 마라톤 생중계를 재미있어라하며 시청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달리기를 좋아하게 되면 가끔 귀찮은 일이 생긴다. 그 귀찮은 일이란 바로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남에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다른 대부분 사람들에게 달리기란 시간이 남아도는 현대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가장 무성의한 스포츠처럼 보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납득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럴 때 제일 먼저 들이대는 이유는 다이어트다. 그러나 나는 이미 달리기 다이어트의 실패한 표본이었다. 1시간 씩 달린 후 집으로 돌아갈 때 지나치게 되는 치킨집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족저근막염과 무릎 통증에 시달리는 주제에 달리기가 건강에 좋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나는 드디어 그럴싸한 과학적 근거를 달리는 이유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마약을 한 상태와 같아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라고 하는데요, 오래 달리면 고통을 막기 위해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돼요. 이것이 강력한 쾌감을 일으키죠. 그래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계속 뛰고 싶은 거예요.’

이런 설명을 하기는 했지만 썩 탐탁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뭔가 내가 마조히스트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달리기에 빠져 있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마조히스트라면 자신을 괴롭힐 수 있는 하고 많은 방법들 중에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 방법을 택한단 말인가?


  내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좀 더 그럴싸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된 건 타라우마라(Tarahumara)라는 멕시코의 부족을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크리스토퍼 맥두걸이라는 기자가 ‘본 투 런(Born to run)’이라는 책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개한 이 부족의 능력은 가히 어벤져스급이다. 사슴이 지칠 때까지 쫓아가 사냥을 하는 이들은 빨리 달리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라라무리’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 이름에 걸맞게 이들은 축제 때 옥수수로 빚은 맥주를 마시며 밤새 놀다가 다음날 아침부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하루 종일 뛴다.(달리면 달린다 원칙이 여기서도 나온다.) 몇 십 킬로가 아니다. 라라무리는 몇 백 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뛰는 능력을 가졌다. 이들은 멋진 나이키 신발을 신고 나타난 최고의 울트라 마라톤 주자들을 ‘쓰레빠’를 신고 압도한다. 평지를 뛰는 것도 아니다. 험하기로 악명 높은 협곡을 그렇게 뛰어다닌다. 몇 백 킬로미터를 그렇게 뛰다가 길을 잃고 국경을 넘어서 미국 내륙에서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 아, 미안합니다. 트럼프. 


  이런 무시무시한 능력을 어떻게 얻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라라무리들을 연구실에 가둬놓고 실험을 거듭해야 할 것 같지만, 맥두걸은 뜻밖의 결론을 내놓는다. 라라무리들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왜냐? 인류는 원래 뛰도록 설계되어 있는 종족이니까. 많은 해부학적 인류학적 증거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인간이 뛰기에 최적화되어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인간은 뛰는 일에는 유용하지만 걷는 일에는 하등 소용이 없는 아킬레스건을 가지고 있으며, 계속 뛸 수 있도록 체열을 땀으로 배출하는 체온 조절 시스템을 갖췄다. 인간의 맨발 또한 뛰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아이들이 맨발로 신나게 뛰어 다녀도 다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보라.) 유명 신발 회사의 런닝화를 신어도 부상이 속출하는 이유는 맨발의 기능을 무시했기 때문이고.


  요는 이거다. 라라무리가 특출한 게 아니라 대부분의 인류가 자신의 가진 본성과 능력을 잊어버린 것이다. 나는 무릎을 쳤다. 바로 이거야. 내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인간은 ‘원래’ 그냥 인간이 아니라 ‘뛰는 인간’인 거다. 아 글쎄, 원래 그렇다니깐. 저 많은 마라톤 동호회 소속의 마조히스트들은 야성의 부름에 응하는 늑대개처럼 자신의 본성을 깨달았을 뿐인 것이다.


  라라무리임을 각성한 내가 제일 처음 한 일은 서울 시내를 뒤져 맨발로 뛰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내는 발가락 신발을 산 것이다. (내 신발은 하늘색이어서 멀리서 보면 개구리 발바닥처럼 보인다.) 하지만 라라무리로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생활의 속도는 달리는 속도보다 빨랐기 때문이다. 달리기는 어쩌다 못 견디게 하고 싶을 때 하는 겨우 짬을 내서 하는 이벤트 같은 운동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상하이행을 준비하면서 짐을 쌀 때, 나는 다른 신발보다 제일 먼저 발가락신발을 챙겨 넣었다.


  어둠이 깔리고 저녁이 되면 나는 개구리 신발을 신고 조용히 대학의 운동장으로 숨어든다. 운동장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약간 긴장하는데 개구리 신발을 보고 말을 걸어오는 중국인이 있을까봐서이다.(한국에서는 있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운동장에 도착한다. 운동장은 바다의 온갖 물고기들을 모여들게 만드는 인공어초와 같아서 길에서 만날 수 없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모여든다.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부터, 트로트풍의 음악을 틀어 놓고 질서 정연하게 광장무를 추는 여인들, 줄담배를 피우며 트랙을 도는 빡빡머리 아저씨, 발은 고정한 채 손만 부지런히 태극권을 연습하는 남자, 지팡이에 의지하는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발라드 음악을 들으며 겨우겨우 발걸음을 옮기는 달팽이 할아버지까지.


  그리고 그 사이를 상하이의 라라무리들이 뛴다. 라라무리들의 모습도 가지각색이다. 힙합 음악을 틀어놓고 뛰는 여학생, 고개를 내밀고 앞으로 꼬꾸라질 듯 달리는 중년 아저씨, 발끝에 스프링이 달린 듯 통통 튀어 오르듯이 달리는 남자, 무리를 이룬 켄타우로스가 달리는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마라톤 동호회 사람들 등등. 


  그들 대부분은 나를 앞서 나간다. 처음에는 저기 뒤뚱뒤뚱 걷듯이 뛰는 중년 남자보다 내가 느리게 뛰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경쟁심으로 앞서 나가지만 결국 얼마가지 않아 그 중년 남자와 같은 신세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의 욕망이 저 멀리 달려 나간다고 해서 나의 발이 그 욕망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몇 번 거치고 나면 비로소 나는 겸손해진다. 그 때부터 나는 내 발과 호흡이 이끄는 대로 달린다. 발이 속도를 허락하면 빨리 달리고 허락하지 않으면 천천히 걷듯이 달린다. 그럴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느리지만 오래 달릴 수 있다.’ 그렇게 뛰고 난 후의 나는 뛰기 전의 나와 아주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밤마다 나는 조용히 대학 운동장으로 숨어들 것이다. 지금의 나와는 조금 다른 나를 만나기 위해서. 그러니까 나는, 느리지만 오래 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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