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가을, 제주 공항 1층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나는 내 인생 두 번째 메소드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부스 안에 들어가 통화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감독의 요구에 나는 정말로 ‘전화를 거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마침 주머니에 동전도 있던 참이었다. 친구에게 할 말도 미리 생각해 두었다. 걸어서 ‘나 지금 영화 촬영 중이야, 음 그래. 엑스트라 아르바이트하고 있어’라고 자랑할 생각이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건너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괴우꽈?”(누구십니까?)
“어?...아!”
상대방의 목소리를 확인하는 순간 나의 혀는 굳어 버렸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던 것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친구가 아닌 친척 분이었다. 긴장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친구집 전화번호가 아닌 친척댁 전화번호를 눌렀던 것이다. 평생 하지 않던 뜬금없는 문안 인사를 드린 후,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전화를 끊었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엑스트라 메소드’ 연기다. 지금은 부부가 된 장동건과 고소영이 출연한 영화 <연풍연가>의 초반부에 나는 여기저기서 유령처럼 등장한다. 기자가 되어 ‘결혼은 언제 하십니까?’라는 대사를 던지기도 하고, 심지어 장동건이 공항에서 소매치를 쫓아가는 장면에서는 공항 3층과 2층의 에스컬레이터, 1층의 공항 출입문에 동시에 ‘존재’하는 기적의 행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엑스트라를 하면 한 동안 영화 보는 것이 힘들어진다. 영화의 전경과 배경이 역전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주연 배우들이 전경이고, 엑스트라 연기자들은 배경이다. 그런데 엑스트라 연기를 한 이후에는 전경이어야 하는 주연 배우들 보다는 뒤에 있는 엑스트라 연기자들의 어색한 동선과 표정에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엑스트라 연기자들이 카메라의 사각 프레임 밖에서 안으로 진입하기 전의 모습과 프레임을 벗어난 후 안도하는 모습을 자꾸만 상상하게 된다.
갑자기 나의 연기 경험을 늘어놓는 이유는 내가 영화 <그녀, her>의 배경으로 나오는 푸둥 루자쭈이의 스지텐차오 육교를 걸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미래에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테어도르 역의 호아킨 피닉스는 스지텐차오 육교로 출퇴근을 한다. 루자쭈이를 다녀 온 후 다시 찾아 본 호아킨 피닉스가 육교를 걷는 장면에서도 나는 어쩔 수 없이 엑스트라들에게 눈이 간다. 외로움을 온 몸의 걸음걸이로 드러내는 호아킨 피닉스와는 달리 엑스트라들은 준비, 땅! 하고 경주를 하는 사람들처럼 허겁지겁 주인공을 지나치고 있다.
사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부터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엑스트라들의 연기보다는 호아킨 피닉스가 걷는 공간이었다. 미국 어느 도시가 배경인 듯 했는데 중국어를 사용하는 행인들이 등장해서 잠깐 어리둥절하기도 했거니와, 차가 없이 사람들만 걷는 거리 옆으로 초고층 건물들이 늘어져 있는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지텐차오를 걸어 보면 이 경험은 특이하다. 마천루로 가득 찬 대도시에서 차들은 주인처럼 군림하며 보행자들을 내려다본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보행자들은 거대한 마천루와 수많은 차들 옆에서 노예처럼 기가 죽어 있다. 그런데 이 공중회랑에서는 보행자들은 자신의 발밑으로 차들이 기어가는 것을 내려다본다. 그들의 양 옆에는 위세당당하게도 거대한 마천루가 화려한 조명을 내뿜으며 빛나고 있다. 스지텐차오 육교를 걸으면 양 옆에 있는 거대한 스크린 사이를 거닐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실 지금 푸둥의 모습은 황푸강 건너편 제국주의 서구 열강의 만들어 놓은 와이탄이란 극장에 대한 중국의 대답이다. 이른바 ‘시선’의 전쟁을 먼저 시작한 것은 서구 열강이었다. ‘십리양장(十里洋場)’-십리에 걸친 서양인의 세계- 의 상징은 제방을 따라 늘어선 와이탄의 마천루였다. 중국인들의 거주지역과 맞붙어 있던 조계의 마천루들은 압도적인 높이로 중국인들의 낮은 집들을 내려다보았다. 와이탄의 건물들은 중국인들이 어쩔 수 없이 올려다 봐야하는 화려하고 거대한 극장이었던 것이다. 콜린 엘러드에 따르면 이러한 압도적인 크기의 건축물은 인간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경외감은 ‘순응’이라는 감정과 연결된다. 거대한 종교적 건물이 신자들에게 신에 대한 경외와 순응을 이끌어내는 것처럼 와이탄이란 극장은 강력한 서구 제국에 대한 중국인들의 순응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와이탄을 찾는 사람들은 와이탄의 유럽식 건물들을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와이탄의 건물들을 등지고 황푸강 너머의 푸둥의 마천루에서 뿜어내는 빛의 향연을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다. 지난 국경절 와이탄을 찾았을 때 자본주의의 결정체인 푸둥의 상하이 세계 금융 센터와 상하이 타워의 외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이미지는 다름 아닌 붉은 중국 오성기였다. 강 건너 풍경을 보다 뒤를 돌아 와이탄의 풍경을 보면 무척이나 건물들이 초라해 보인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 유럽식 건물들 위에서는 시선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표식처럼 모두 어김없이 오성기가 꽂혀 있다. 와이탄은 이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오래된 극장이다.
스지텐차오를 따라 늘어선 빌딩들도 시선의 전쟁의 결과물들이다. 애플턴이라는 학자는 인간과 거주지를 택하는 원리는 조망(prospect)과 피신(refuge)라고 말한다. 인간이나 동물은 자신의 몸을 숨기면서 다른 곳이 잘 보이는 곳을 거주지로 택한다. 이곳 푸둥에서 처음으로 이러한 조건을 갖춘 곳은 동방명주였다. 그러나 더 좋은 조망을 얻기 위한 경쟁에 불이 붙었고, 제일 높은 건물이라는 타이틀은 계속 교체되었다. 이렇게 해서 푸둥은 갈수록 거대하고 화려한 극장이 되었다.
이제 푸둥의 마천루들은 중국이란 거인이 수집해 놓은 트로피 같다. 동명명주 앞의 스지텐차오에서는 오성기 깃발을 든 중국인 관광객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들에게 루자쭈이의 거대한 빌딩 사이를 걷는다는 것은 압도적인 중국의 힘을, 중국이란 종교를 온몸으로 확인하는 순례와 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스지텐차오를 걷는다는 것은 복잡한 의미이다. 이 공중 회랑을 걷는다는 것은 영화 <그녀>의 공간으로 들어가 주인공 테어도르의 외로움과 같이 걷는 것이기도 하고, 영화 엑스트라로 아르바이트 하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강 건너를 두고 오간 100 여년의 대화를 읽어내는 것이기도 하고.
이렇게 어떤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온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억과 생각들을 같이 끌고 온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자신만의 우주를 끌고 와서 길 위에 그것들을 포개 놓는 것이다. 그렇게 그 길은 각자에게 모두 다른 길이 된다.
내가 끌고 다니는 우주를 루자쭈이의 스지텐차오 위에 풀어 놓으니 이곳은 내게 극장이 되었다. 나는 극장의 관람객인 동시에 이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주연인지 엑스트라인지 구분이 안 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선글라스를 끼고 스지텐차오를 걷다보니 나의 첫 번째 메소드 연기가 생각난다. 나의 첫 번째 메소드 연기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맡은 연극 심청전의 심봉사 연기였다. 그때 나는 정말로 눈을 질끈 감고 심봉사 연기를 했다. 덕분에 어둠 속에서 나는 무대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한참 헤매야 했다.
음, 누가 선글라스 좀 빌려 주지 그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