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기울이면

by 백승주

귀를 기울이면


0. 범식이네


어디선가 늙은 남자의 기침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따라 가 본다. 벽에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실눈을 뜨고 구멍 안을 살펴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작은 구멍에 귀를 갖다 댄다. 희미하게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여닫는 소리, 라이터를 켜는 소리, 재떨이를 끌어서 옮기는 소리.

그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면,


범식이 아버지의 인기척 소리와 함께 라디오가 켜진다. 뚜. 뚜. 뚜. 뚜. 시그널 음이 울리고, 이어서 라디오에서는 실로폰으로 천천히 연주되는 ‘고향의 봄’이 흘러나온다. 새벽 6시구나. 잠결에 듣는 ‘고향의 봄’은 몽환적이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7살의 어린 나는 다시 스르륵 잠이 든다.


라디오가 들려오는 창호지문 저편은 주인집인 범식이네 집이다. 그리고 창호지문 이쪽 편은 우리 집. 정확히는 다섯 식구가 몸을 붙이고 자는 셋방이다. 셋방 안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셋방에서 보이는 것은 고향의 봄이 새어 나오는 창호지문 뿐이다. 꿈결에 고향의 봄을 들으면서, 문간을 넘어오는 온갖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창호지문 저편을 궁금해 한다. 범식이네 집은 얼마나 넓을까? 어떤 물건들이 있을까?


1. 소리로 지은 박물관


인민광장(人民廣場)에 위치한 상하이 박물관으로 가는 지하철 안. 무료해진 나는 핸드폰을 열어 팟캐스트 방송 목록을 찾아본다. 다운로드한 방송 목록들 중에서 낯선 프로그램 이름이 하나 들어 있다. ‘거짓의 거짓은 거짓- 발칙한 예술에 대한 르포르타쥬’.


뭐지?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전에도 들었는지 이어듣기를 할지 묻는 메시지가 뜬다. 그렇게 우연히 듣게 된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는 희한하게도 상하이의 박물관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인공지능이 내 생각까지 읽은 걸까? 약간 무서운 걸? 나의 얼떨떨함과는 상관없이 ‘크레타인’이라는 닉네임의 방송 진행자는 초대 손님 ‘나도 크레타인’과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고 있다.


“에이, 소리로 지은 박물관이 있다고? 그런 게 어디 있어?”

“아니, 이 사람이, 사람에 대한 믿음이 그렇게 없어서 쓰나?”

“믿을 사람을 믿어야죠.”

“ 화양연화라는 영화 아시죠? 그 영화 마지막 장면이 뭔지 아세요?”


그 장면이라면 나도 잘 알고 있다. 주인공 양조위는 앙코르와트의 한 사원의 벽에 난 구멍에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하고는, 진흙으로 그 구멍을 막아버린다. 그 구멍 속으로 소리는 사라지고, 그렇게 그의 이야기, 그의 비밀은 영원히 봉인된다.


“ 벽에 입대고 이야기하는 거요? 그거 양조위가 하니까 멋있었지. 나 같은 사람이 하면 다들 미쳤다고 할 거야.”

“ 에휴 좀 진지해져 봐요. 인간이 이렇게 초를 쳐...암튼, 중국의 저명한 설치미술가 ‘슈고우’(Xugou) 아시죠?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와 백남준,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계보를 잇는다고 평가받는 작가.”

“ 잘 모르겠는데요.”

“ 그럼 뱅크시(Banksy)는 아시죠. 영국에 얼굴 없는 작가 뱅크시(Banksy)가 있다면 중국에는 슈고우가 있죠. 어어? 이것도 모르시나 봐? 모르면 간첩인데? ”

“ 그래, 내가 간첩이다 왜?”

“ 아니 왜 이러실까? 아무튼 얘기 계속하죠. 이 사람이 2016년에 한 인터뷰에서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소리로 지은 박물관이란 컨셉을 생각해 냈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 이런 말도 해요. ‘소리를 쌓아 바닥을 다지고, 소리를 높여 벽을 세운다’(筑声筑底, 扬声立壁). ”

“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 소리로 공간을 만든다는 겁니다. 소리로 만든 공간은 눈으로 만들어내는 공간보다 더 생생하게 공간을 체험하게 만들죠.”

“ 그럼 일종의 가상현실이라고 생각하면 되나요?”

“ 그렇죠. 꼭 빛으로만 가상현실을 만들라는 법은 없잖아요. 생각해 보세요. 불과 1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소리를 물건에 담아서 판다’라는 말을 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겁니다. 하지만 1887년에 축음기와 음반이 발명되었고, 그 이후에 우리는 거리낌 없이 소리를 사고 팔 수 있게 되었죠. 소리로 지은 박물관도 마찬가지예요. 가상현실은 시각적으로만 구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음의 압력, 미세한 진동으로도 충분히 구현할 수 있어요.”

“ 그럼 소리로 지은 박물관에서 전시하는 소장품은 뭡니까?”

“ 소리들이죠. 우리가 놓쳐 버린,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소리들. 하지만 진작 사라지면 진공상태에 빠져버리게 만드는 소리들.”

“ 우와, 그럴싸한데요. 조금만 더 설명해 봐요. 잘만 하면 넘어갈 것 같아.”

“ 아니 믿으라니까. 그런데 이 ‘슈고우’란 사람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이런 선언을 합니다. ‘21세기에는 새로운 스탕달 신드롬이 필요하다. 나는 새로운 스탕달 신드롬을 창조할 것이다.’ ”

“ 오호, 완전 패기 넘치는데요.”

“ 그런데, 거기에다 이런 말도 덧붙여요. ‘나는 이제 소리로만 남을 것이다.’ ”

“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근데 그런 말을 해서 실종된 건가?”

“ 아니, 아까는 슈고우에 대해서 모른다면서요?

“ 모르긴 뭘 몰라. 저 그렇게 무식하지 않아요!”

“ 아이고, 그냥 방송 진행합시다. 슈고우에 대해서는 실종설, 납치설, 은둔설 등 갖가지 설이 난무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21세기 현대 미술계 3대 미스터리인 슈고우의 실종에 대해 알려진 정확한 사실은 이거 하나죠. ‘슈고우는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졌다.’”

“ 하지만, 소리로 지은 박물관이 여기 저기 출몰한다면서요?”

“ 그렇죠.”

“ 그럼 사라진 것은 아니네?”

“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고 하는 건 어떨까요?


두 사람의 말에 슬슬 구미가 당긴 나는 인터넷 검색창에서 슈고우란 이름을 쳐본다. 하지만 슈고우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완벽하게 사라진 건가?


“ 아 근데, 궁금한 게 생겼어. 나머지 2대 미스터리는 뭐유?”

“ 살고 싶으면 그 입 다무쇼.”

“ 으허허, 알았어, 알았어. 근데, 그거 다 쇼 아니에요?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 같은?”

“ 실종 이후에 더 큰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도 해요.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소리로 지은 박물관’은 슈고우의 마지막 프로젝트가 되어 버렸죠.”

“ 그래서 그게 상하이에 있다고요? 아무튼 상하이에서 볼 수 있는 거죠?”

“ 보는 게 아니라 들을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소리로 지은 박물관은 실험 예술 프로젝트예요. 일단 소리로 설치했기 때문에 이 박물관은 보이지 않습니다."

“ 뭐야. 이 사람 완전 사기꾼 아니야? 소리를 어떻게 설치해? 말 들어보니깐 완전 벌거벗은 임금님하고 똑같구만.”

“ 그게 다가 아니에요. 장소도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 안에 숨겨져 있어요. 작가는 그 장소가 어디인지 밝히지도 않았어요. 심지어 장소는 끊임없이 변경됩니다.”

“ 에이, 뭐 포켓몬고 게임이야? 그리고 보이지도 않는다니 그럼 어쩌라는 거야?”

“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방송을 준비한 거 아닙니까? 인터넷 상에서 사람들이 소리의 박물관에 대한 목격담, 아니 경험담이 종종 올라오는데요, 오늘은 그 경험담 속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가 어디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 어디에서 많이 목격, 아니 경험되는데요?”

“ 주로 세 군데가 많이 거명되는데, 그 중 하나는 상하이 박물관입니다.”



2. 당신이라는 기억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오는 사람들은 모두 스탕달 신드롬을 기대한다. 그들을 전율케 하는 운명적 작품이나 유물을 만나기를, 그래서 무릎의 힘이 빠지는 무아지경의 황홀경이 찾아오기를.


누구나 박물관이나 미술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물건과 그렇지 않은 물건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요정은 누더기 옷을 최고의 드레스로, 호박을 마차로, 생쥐를 말로, 시궁창 쥐를 마부로, 도마뱀을 시종으로 변신시킨다. 박물관은 그런 요정의 역할을 한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는 물건들은 ‘시선’을 가질 수 있는 권리, 다르게 ‘기억’될 권리를 얻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이가 경탄해 마지않은 작품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이 같은 작품을 박물관이 아닌 길거리 이발소나 작은 선술집에서 만난다면 그는 그 작품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달리 말하면 관람객들이 박물관에 진입하는 순간, 관람객들은 요정의 마법에 걸리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 박물관은 관람객들에게 유물이나 작품에 대해 경탄의 감정을 준비하게 하는 맥락을 제공하는 셈이다.


나 또한 그러했다. 중국의 3대 박물관이라는 상하이 박물관. 12만 여 점의 전시물과 100만 여 점의 ‘선택’받은 유물을 보유한 박물관. 특별히 찾는 것은 없었지만, 이런 진귀한 유물과 작품들 사이에서 나는 나의 영혼을 감전시킬 유물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박물관 밖에서부터 길고 긴 줄을 선 후, 그리고 어김없이 나타나는 보안 검색대를 통과한 후, 관람을 위해 또다시 서다 가다를 반복하면서, 결국 내가 깨닫게 되는 것은 내가 이 수많은 관람객들과 함께 ‘누가 더 진지한 표정으로 오래 오래 서 있나’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대회에 참가하다 보면 무릎에 힘이 풀리는 감동과 경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를 가감 없이 느끼게 된다.(그런 의미에서 박물관 관람은 등산에 비견될 수 있다. 세계 각지의 박물관에 등산복을 입은 한국인들이 출현하는 이유는 다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관람객들은 자신이 육신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전시물들을 바라본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윽고 눈앞의 전시물들은 모두 벌거벗은 임금님이 된다. 아 이게 아닌데, 임금님의 옷이 뿜어내는 아름답고 화려한 자태에 눈이 멀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불쌍한 신하인 나는 임금님의 옷이 보이지 않는구나. 대신 불충하게도 허리와 다리의 통증만 느껴질 뿐.


이제부터 비밀을 하나 이야기하겠다. 부디 어디 가서 얘기하고 다니지 말기를. 박물관, 특히 국가가 만든 박물관의 기능 중 하나는 관람객들을 지쳐 나가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박물관의 거대함을 알리는 데에는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국가가 기획하고 만든 박물관이나 미술관은 국가의 시간과 공간을 구획하고 재현해 놓은 일종의 실물 지도이자, 국가의 공식적인 기억 장치다. 이 기억 장치 안에서 국가는 기억을 분비한다. 박물관의 유물 배치와 동선은 기억의 회로이며, 관람객들이 그 기억의 회로를 따라 움직일 때, 비로소 기억은 완성된다. 관람객들은 이 기억 장치의 한 부속품일 뿐만 아니라, 기억 장치가 만들어내는 기억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런 기억들은 모이고 모여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하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박물관의 거대함은 단순히 박물관의 규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박물관을 지은 상상의 공동체(국가)의 거대함과 위대함을 보여준다.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는 박물관을 통해, 공동체에서 ‘상상’을 떼어내고 대신 ‘실체’를 부여하려 한다. 이 원리는 중국의 상하이 박물관이든,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이든 똑같다. 관람객들은 끝없이 펼쳐진 유물과 작품의 바다에서 헤매다가 지쳐 떨어지고, 박물관의 거대함을 통해 국가의 거대함을 ‘몸소’ 깨우친다. 이제 국가는 상상이 아니라 눈으로 확인하고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단단한 실체가 된다. 이렇게 관람객들은 박물관이 만들어 낸 기억, 한 국가가 기획한 거대한 서사의 일부가 되어 온 세상으로 흘러든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중국 상하이 박물관에는 유물이 정말 많더라. 우리와 비교도 안 되게 긴 역사를 가진 유물들이더라. 중국은 뭘 해도 역시 스케일부터 다르더라.


이런 기억 속에서 사람들은 현대의 중국이 과거의 중국과 동일한 시간과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고 상상한다.(상하이 박물관의 4층 소수민족 공예관에서는 티베트 전통 복장을 입은 마네킹이 서 있는데, 나는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인질 같아 괜히 안쓰러웠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들은 박물관에 의해 편집된 것이다. 편집되었다는 것은 기억으로 남지 못하고 잘려나간 것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유물들이 품고 있을 개인의 수많은 역사와 기억은 소거되고, 그 남은 빈자리에 국가의 기억이 이식된다. (이런 편집은 비단 국가의 기억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5.18 항쟁 당시 광주 시민들이 ‘주먹밥’만 먹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이 나눠 먹은 음식에는 토스트도 있었다. 빠르게 만들 수 있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주먹밥과는 다르게 토스트는 주먹밥이 가진 상징을 얻지 못하고 집단의 기억에서 ‘편집’되었다.)


베네딕트 앤더슨에 따르면 인쇄된 활자들도 박물관처럼 편집을 통해 사람들이 같은 상상의 공동체에 속한다고 믿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같은 공동체에 속한다는 믿음을 가지려면 여러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중 하나는 그 공동체의 사람들이 공동의 언어를 쓰고 말한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은 한국 영토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한국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라도 방언을 쓰는 사람은 [애국인]이라고 말하고, 경상도 방언을 쓰는 사람들은 [살살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쇄된 활자는 [애국인]과 [살살하다]라는 소리를 휘발시켜 ‘외국인’, ‘쌀쌀하다’라는 단단한 형태로 고정시킨다. 이렇게 ‘소리를 제거’하는 과정을 통해서 각기 다른 한국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서로 하나의 동일한 한국어를 사용한다고 믿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쇄된 수많은 책들은 그 하나하나가 일종의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꾸역꾸역 사람들에 밀려 걸어가며 전시물들을 보던 나는 문득 내 옆에 베네딕트 앤더슨의 영혼이 동행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앤더슨의 영혼은 나를 설득하여 이런 결심을 하게 한다. 더 이상은 못 보겠다. 아니 더 이상은 못 걷겠다. 나는 국가가 분비하는 기억이 되지 않을 테다! 중국이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프랑스든, 그 어느 국가의 기억이든.


아니, 내가 박물관에 대해 왜 이렇게 삐딱선을 타고 있지? 앤더슨 씨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내가 삐딱선을 타는 이유는 단 하나, 내가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래 오래 서 있기 대회’에서 최초로 이탈하는 그 순간은 그 어떤 걸작도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내가 몸을 기대고 앉을 수 있는 의자 뿐.


3. 소리로 지은 박물관


상하이 박물관 곳곳에 마련된 벤치는 이미 관람객들로 만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경쟁률이 그나마 낮은 박물관 식당으로 들어가 아이스커피와 케이크 한 조각을 시킨 후, 자리가 나길 기다렸다. 다행히도 한 일행이 자리를 떴고, 나는 잽싸게 가방을 의자 위로 던져 놓고 자리를 잡았다.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나는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 다시 팟캐스트 방송을 들었다.


“ 그런데 왜 상하이 박물관이죠?

“ 박물관에 있는 물건들이 박물관 밖에 있는 물건들과 다른 점이 뭔지 아세요?

“ 박물관에 있는 물건은 비싸죠.”

“ 아, 쫌.”

“ 사실이잖아? 현실을 직시합시다요.”

“ 박물관은 소리가 제거된 공간이에요. 전형적인 박물관에서는 어떻게든 관객의 시선을 차지하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슈고우는 상하이 박물관에서 그런 구조에 도전하겠다는 거지.”


세상은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움직이거나, 그 사물을 둘러싼 움직임을 촉발한다. 그 움직임은 소리를 낳는다. 그러니 소리는 움직임, 즉 사물의 본질을 드러낸다. 저기 전시되어 있는 칼들은 살점을 찢어내는 소리,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냈을 것이다. 아까 본 불상들도 본래의 자리에서는 승려들의 염불 소리, 많은 이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서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제 이 사물들에게 그러한 소리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박물관의 전시품들은 소리를 박탈당한 존재, 그 본질을 박탈당한 존재들이다.


“ 근데, 상하이 박물관에서는 슈고우의 프로젝트를 왜 허락했나요?”

“ 누가 허락했대요?”

“ 응, 이건 무슨 소리야?”

“ 뱅크시가 허락 받고 그래피티 그리는 거 봤어요? 상하이 박물관을 비롯한 상하이의 여러 박물관에서는 이런 프로젝트를 인지조차 못하고 있을 거예요. 2005년에 뱅크시는 쇼핑 카트를 밀고 있는 원시인을 돌에 그려 넣은 후 이걸 대영박물관에 몰래 전시한 적이 있어요. 처음에는 아무도 몰라보다가, 나중에 발견돼서 큰 화제가 되었죠. 그런 작업과 유사해요. 다른 점은 뱅크시의 작품은 결국 노출이 되었고, 크게 이슈가 되었지만, 슈고우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슈고우의 작품은 눈에는 보이지 않고 소리를 듣고 몸으로 느껴야 하기 때문에 잘 노출이 안 돼요. 그래서 뱅크시의 작품보다 이슈화도 안 되고요. 슈고우가 창시한 ‘사운드 그래피티(sound graffity)’ 장르를 추구하는 작가들의 숙명이죠. 하지만 저는 그런 의미에서 뱅크시보다 슈고우를 더 높이 삽니다.”

“ 이거, 이거, 영 믿음이 안 가는데... 이런 작업을 하려면 음향 장비들이 필요할 테고, 그럼 그런 장비들을 들고 몰래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해요?”

“ 아니, 애초에 보이지를 않는다니까. 그게 기술이죠.”


여기까지 듣고, 나는 상하이 박물관 2층의 도자기관으로 향한다.


4. 사막에서 온 남자


상하이 박물관에서 나는 사막을 본다.


저 남자는 사막을 건너왔을 것이다. 쌍봉낙타 위에 올라타 고깔 모자를 쓰고 악기를 연주하는 녹색 옷의 남자. 이 서역 남자가 나의 눈길을 끌었듯이, 당나라 수도 장안의 저잣거리에서 우연히 이 남자와 조우하게 된 당나라 도공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을 터였다.


당시 외국 상인들이 몰려들어 장을 열던 장안의 서시(西市)에서 서역인은 흔한 존재였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낙타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악기를 연주하는 이 남자의 모습은 다른 서역인들 중에서도 유독 도공의 관심을 끌었을 것이다. 결국 눈썰미 좋은 도공은 서역 남자와 낙타를 도자기의 형상으로 남겼다. 사막을 건너온 남자와 낙타는 이제 1500여 년이라는 시간을 건너게 된다.


1500여 년 전에도 그는 외국인이었겠지만, 1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상하이 박물관의 많은 인물상 사이에서 그는 가장 눈에 잘 띄는 외국인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이 도자기상 앞에서 발길을 멈춘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이 도자기상에 끌렸던 더 큰 이유는 이 남자의 손에 악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손은 분명 악기를 쥐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악기는 보이지 않았다. 있었던 것이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본래부터 악기가 없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악기가 없는 것이 내게는 결함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악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악기의 부재는 소리에는 형체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소리란 공간에 잠시 존재하지만 이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사라진 것 같다가도 금세 공간을 채우기도 한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것,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은 모든 마법의 속성이다. 그런 까닭으로 어떤 소리나 음악은 사람들을 홀린다. 소리로 세상의 넋을 빼놓은 이야기는 여기저기 널려 있다. 사이렌의 노래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가, 삼국유사의 만파식적이,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가 그렇다. 이렇게 남자의 보이지 않는 악기는 잠시 나를 홀리고, 남자의 뒤로 펼쳐졌을 사막을, 그 사막의 소리를, 그 사막의 한 귀퉁이에서 울리던 음악을 상상하게 만든다.


나는 그렇게 상하이 박물관에서 사막을 듣는다.


5. 소리로 지은 박물관


12만 점의 유물을 자랑하는 상하이 박물관에서 내가 유일하게 건져 온 것은 낙타를 타고 음악을 연주하는 남자의 도자기상이었다. 스탕달 신드롬까지는 아니지만, 그 도자기상이 온갖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은 인정해야겠다. 하지만 소리로 지은 박물관? 그런 게 정말 있기나 할까? 그래도 듣던 방송은 다 들어야겠기에 다시 팟캐스트 어플을 연다.


“ 12만 점이 넘는 전시물이 있는 상하이 박물관에서 소리로 지은 박물관을 발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나요?”

“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불가능에 가깝죠.”

“ 아니, 그럼 왜 상하이 박물관 가보라고 한 거야?

“ 저는 어디까지나 실제로 소리로 지은 박물관을 경험했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 것뿐이에요. 제 생각에는 스쿠먼 우리샹 박물관이라면 슈고우의 작품을 만날 확률이 좀 높지 않나 생각합니다.”

“ 스쿠먼 우리샹 박물관은 뭐하는 박물관인데요?”

“ 스쿠먼은 ‘돌문’, 우리샹은 상하이 말로 ‘집’이라는 뜻인데요, 말하자면 ‘돌문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죠. 그냥 연립 주택입니다.”

“ 연립 주택?”

“ 그러니까 스쿠먼이란 유럽 건축 양식과 중국 건축 양식을 결합한 연립 주택을 말합니다. 임시정부 청사도 스쿠먼이고, 유명 관광지인 신텐디(新天地)도 스쿠먼 골목을 뜻하는 스쿠먼 농탕을 상업시설로 바꾼 겁니다. 중국 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 기념관도 스쿠먼입니다. 상하이 옛날 건물은 대부분이 스쿠먼이라고 보시면 돼요. 스쿠먼 우리샹 박물관도 3층 건물에 방이 7개인 주택입니다.”

“ 신텐디나 중국 공산당 기념관은 청취자 분들이 듣기에 좀 생소하실 것 같아요.”

“ 앞서 말씀드렸지만 신텐디는 기존 스쿠먼 골목을 상업화시킨 곳입니다.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이야기의 주제인 스쿠먼 우리샹 박물관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텐디는 온갖 서양 음식과 맥주, 칵테일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세련된 레스토랑, 카페, 바가 모여 있어요. 일종의 노천카페 지역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상하이의 외국인 여행자들은 모두 이곳으로 몰려듭니다. 정말 언제나 바글바글해요. 얼핏 보면 옛날 식민지 조계 시절이 다시 재현된 듯한 느낌까지 듭니다. 그런데 그래서 이게 좀 더 묘해요.”

“ 묘하다니, 뭐가요?”

“ 바로 같은 장소에 중국 공산당의 성지가 있거든요.”

“ 아까 말한 중국 공산당 기념관요? 그런 기념관은 중국 곳곳에 있지 않아요?”

“ 아니죠.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곳은 성지입니다. 중국 공산당의 탄생지이거든요.”

“ 그런데, 그 옆에서 외국인들이 한가롭게 희희낙락하며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다?”

“ 그렇죠. 그래서 좀 묘하다는 거예요.”

“ 뭔가 상황이 복잡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중국 공산당의 성지가 있는 지역에서 슈고우가 sound graffity를 한다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지 않을까요? 슈고우, 이 사람 살아있기는 한 거예요?”

“ 에이, 요셉 보이스처럼 죽은 토끼를 안고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한다든지, 백남준처럼 피가 흐르는 소머리를 걸어 놓은 것도 아닌데요.”

“ 그래도 낙서는 위험하잖아요. 시리아 내전도 ‘이제 당신 차례야, 닥터’라는 10대 소년의 낙서에서 시작됐고.”

“ 하긴, Sound graffity도 낙서라면 낙서죠. 그런데 슈고우가 정말 죽었는지 살았는지 누가 알겠어요? 우리는 슈고우의 얼굴도, 나이도, 성별도 모르는데.”


6. 바우어 새가 버린 것들


신텐디의 야외 테이블은 만원이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따사로운 햇볕을 음식과 맥주에 곁들여 즐기고 있었다. 그 옆 중국 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 기념관 앞에서는 오성기를 든 중국인들의 기념사진 촬영이 한창이었다.

언제나처럼 나는 목적지를 못 찾고 헤매고 있었다. 여행 서적에서 보여준 지도에서 스쿠먼 우리샹 박물관을 나타내는 점은 분명히 신텐디를 나타내는 점과 나란히 찍혀 있었다. 그 점을 찾아 신텐디를 세 번째 돌고 있었지만 박물관처럼 보이는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신텐디 입구에서 서서 에잇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맥주나 들이키자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 쯤, 눈앞에 왠지 만만해 보이는 경비원이 나타났다.


박물관의 위치를 묻는 내게 경비원은 손가락으로 내 머리 위를 가리켰다. 정신을 차리고 위를 올려다보니 ‘石库门 屋里厢 博物馆’이라는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명판이 보였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인 줄 알고 몇 번이나 지나쳤던 이곳이 박물관이었구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는 가게 안, 아니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고급 모델 하우스.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든 첫 번째 생각이었다. 이 박물관에서 구현해 놓았다는 1920-30년대 상하이 중산층의 생활상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부자 친구 집에 놀러간 가난한 집 아이처럼 나는 주눅이 들었다. 벽은 영화 포스터로 장식이 되어 있고, 비싸 보이는 많은 가구들과 선풍기, 타자기, 그리고 최고급으로 보이는 턴테이블까지 갖춰져 있었다. 거기다가 부부 침실, 딸의 방, 어린 유아를 위한 방까지. 저희 스쿠먼 우리샹은 모든 가족 구성원들에게 개인 공간을 보장합니다. 럭셔리한 라이프와 최고의 프리미엄을 경험하십시오. 분양 문의는...


스쿠먼 우리샹 박물관에서는 상류층의 삶의 양식을 구현해 놓았지만, <상하이 모던>의 저자 리어우판은 박물관의 풍경과는 조금 다른 설명을 한다. 리어우판에 따르면 부유층 중국인들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스쿠먼보다는 고급 아파트나 맨션에 살았다. 스쿠먼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하위층들이었고, 이들이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팅즈젠(亭子間)이라 불리는 쪽방을 세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창문이 북쪽으로 나 있어서 여름에는 덥고 겨울은 추운 쪽방인 팅즈젠은 임대료가 매우 쌌고 이런 이유로 가난한 상하이 문인들의 터전이 되었다. 리어우판은 10제곱미터도 안 되는 방 안에 문인 2-3명이 모여서 작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 작업 중의 일부분은 스쿠먼 주인과 가족들의 사생활을 소설로 변신시키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스쿠먼의 주인들은 돈 몇 푼을 위해 자신들의 사생활을 포기한 셈이다.


3층으로 올라가니 한 쪽 벽면에 동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인민복 차림의 사람들이 골목을 왕래하던 시절, 한 꼬마 여자 아이가 집안의 벽에 나있는 작은 구멍에 자신이 쓴 편지를 감춘다. 긴 세월이 흐른 후 백발의 우아한 노부인이 된 그 아이가 자신의 가족 – 지나치게 화목해 보여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 들과 함께 스쿠먼을 다시 찾는다. 인민복 차림의 서민들이 걷던 골목은 이제 신천지(新天地)가 되어 있다. 노부인은 놀라움과 경이에 빠져 신텐디를 걷다가 자신이 살던 집을 발견하고, 그 집에서 기적처럼 편지를 찾게 된다.


꾀죄죄한 옷차림의 여자 아이가 우아한 귀부인이 된 것처럼 스쿠먼 골목도 화려한 신천지가 되었다라는 메시지. 동영상을 보고 있자니 왜 중국 공산당이 자신들의 기원이 된 성지인 전당대회 기념관 옆에 신텐디를 만드는 것을 허락했는지, 아니 만들게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왜 스쿠먼 골목의 이름이 신천지(新天地)인지도.


정원사 새라고도 불리는 호주의 바우어 새는 암컷을 유인하기 위해 온갖 장식품으로 자신의 둥지로 향하는 진입로와 정원을 꾸민다. 심지어 이 새는 장식품들을 크기순으로 배치하여 자신의 둥지가 더 커 보이도록 만드는 착시 현상까지 일으킬 줄 안다. 바우어 새는 원근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국가라는 바우어 새도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중국 공산당은 1차 전당대회 기념관 근처의 스쿠먼 골목을 싹 밀어버리고 공산주의 신전을 건설하는 대신, 중하층민들의 거주지인 스쿠먼 골목을 화려함과 자유로움이 흘러넘치는 상업단지로 변신시키고 거기에 신천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공간의 구성은 일종의 발화이자 이야기의 방식이다. 어휘의 배열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달라지듯이, 공간의 재구성과 배치는 새로운 의미를 만든다. 신텐디라는 공간이 발화한 내용은 내게 다음과 같이 들린다. ‘여기 중국 공산당 운동의 출발점이 있다. 그리고 인민의 삶(스쿠먼)과 함께 한 그 운동의 결과물로 현대 중국은 여기 신천지에 당도했다.’ 신텐디와 중국 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 기념관은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중국이라는 바우어 새의 장식품이다.


다시 박물관 밖으로 나오자, 야외 테이블에서 여전히 맥주와 음식을 즐기고 있는 관광객들이 보였다. 여기 스쿠먼 농탕이 진짜 골목이던 시절, 관광객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는 스쿠먼의 거주민들이 앉아서 식사를 했을 것이다. 문득 어릴 적 스쿠먼에 살았다는 궈선생이 한 말이 생각났다.


“ 골목에 식탁을 놓고 이웃들이 마주 보고 식사했다구요?”

“ 네, 그때는 그랬죠.”

“ 그럼, 고기같이 맛있는 거 있으면 나눠 먹고 그랬겠네요.”

“ 아니요. 그냥 안 나눠주고 서로 얼굴 보면서 먹었어요.”

“ 아니 왜요?”

“ 자랑해야죠.”


내가 스쿠먼 우리샹 박물관에서 기대했던 것은 이런 이야기였다. 이 집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 화음보다는 불협화음이 더 많았을 그 목소리들. 그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켜켜이 쌓아놓은 시간의 지층들. 그러나 국가라는 바우어 새는 이런 장식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목소리는 휘발되고 시간의 지층은 이제 철거되고 없다. 바우어 새가 버린 것들.


7. 소리로 지은 박물관


“ 스쿠먼 우리샹 박물관 3층의 홍보 영상 본 적 있으세요?”

“ 보긴 했는데 별 내용 없던데요?”

“ 거기서 여자 아이가 스쿠먼 집 벽에 있는 구멍에 편지를 숨기는 장면이 있죠?”

“ 그거는 기억이 나네.”

“ 저는 그 장면이 묘하게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하더라구요.”

“ 화양연화를 따라한 거다?”
“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습니다.”

“ 그렇지만 슈고우도 화양연화의 그 장면에 영감을 받아서 소리로 지은 박물관 프로젝트를 시작했잖아요?”

“ 에이, 슈고우 얘기와는 다르지.”

“ 근데 나는 다른 게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 뭐요?”

“ 주인공 여자 아이를 연기한 아역 배우 있잖아요. 저는 그 아이의 얼굴에서 아이의 내면에 있는 다양한 이야기가 보였어요.”

“ 근데요?”

“ 그 아이가 노년의 귀부인이 되잖아요? 근데 그 노부인은 지극히 개성이 없는 인물처럼 보이는 거야. 저는 그 아이 안에 있던 수많은 이야기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생각되더라고요.”

“ 에이 그냥 홍보 영상이잖아요. 당신이 칸영화제 심사 위원이야? 홍보 영상 보고 예술하시면 안 되죠.”

“ 저는 이런 스쿠먼 박물관의 성격이 싫어서 슈고우가 자신의 작품을 여기서 출몰시키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어요.”
“ 근데, 그래서 거기서 소리로 지은 박물관을 경험했어요?”

“ 사실은...발견하지 못했습니다.“

“ 이거 청취자들에게 불신을 심어주는 팟캐스트 방송인데.”

“ 그러니까 바로, 다음 후보지 바로 소개하죠. 어딥니까?”

“ 슈고우의 작품이 출몰하는 그 다음 후보지는 런민공위안(人民公園), 우리말로 인민공원에 있는 상하이 현대미술관입니다. 여기는 다양한 현대 미술 기획 전시를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입장료는 현금만 받으니까 현금 반드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 나는 현금이 너무 좋아.”

“ 나도 좋아.”


8. 벽 속으로 들어간 아이들


상하이 현대미술관은 인민공원 안에 있다.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현대 미술관을 찾기 위해 인민공원으로 몰려든다...라고 쓰고 싶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주말의 인민공원은 샹신자오(相辛角), 즉 결혼 중매 시장에서 거래를 성사시키려는 노인들로 가득하다. 노인들은 자녀들의 나이, 신체 조건, 학력, 직업, 성격 등과 상대방에 대한 요구 사항이 자세히 적힌 프로필을 우산에 붙여 놓고, 근심어린 표정 반 무료한 표정 반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관심을 가져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산 숲 사이를 지나면 통유리 건축물로 지어진 현대미술관이 나타난다. 미술관 2층에서는 세스(Seth)라는 프랑스 그래피티 작가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다.(https://seth.fr/en/portfolio/shanghai-2/) 전시장 입구의 설명을 보면 세스는 2018년 2월부터 3월 사이에 상하이 근교에서 그래피티 작업을 했다. 세스의 작업 장소는 철거를 앞둔, 하지만 아직은 사람들의 왕래가 이루어지는 을씨년스러운 골목이었다. 철거 지역의 집들. 그 집들의 문이 있던 자리는 벽돌로 메워져 새로운 벽이 되고, 그 벽에 세스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들을 그려 넣었다.


그 중 하나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얼굴이 안 보이는 한 아이가 분홍, 노랑, 파랑, 색색의 블록을 쌓아 탑을 만든다. 그 탑 위에는 자연스럽게 중국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상하이 타워가 올라가 있다. 이렇게 해서 스러지기 직전의 퇴락한 상하이의 모습과 미래도시 상하이의 모습이 하나로 연결된다. 그러나 아이가 만드는 블록은 이제 곧 무너지고 사라질 것이다.


철거 예정인 골목에서 제일 먼저 사라질 것은 아이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일 것이다. 아이들이란 소리로 가득 찬 존재들이다.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저녁에 잠이 들 때까지 그들은 끊임없이 온갖 소리를 만들어 낸다.


아이들이 사라진 거리에 세스는 다시 아이들을 부활시킨다. 그런데 세스에 의해 다시 등장한 아이들은 대부분 얼굴이 안 보인다. 세스의 아이들 중 상당수는 등을 돌리고 있다. 그 중에 줄넘기하는 한 아이는 아예 벽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자전거를 탄 아이도 벽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세스의 아이들에게 벽은 사라진 세계로의 통로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잃어버린 시간과 현재를 넘나드는 존재들이다. 세스의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은 언제나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를 찾는다. 그것이 침대 밑이든, 벽에 난 작은 구멍이든, 지하실이든 상관없이.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 해리포터의 런던 킹크로스역 9와 3/4 승강장은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이고, 세스의 벽도 마찬가지다.


세스의 아이들이 놀면서 내지르는 소리들은 이쪽 세계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잃어버린 세계인 벽 안쪽으로 퍼져 나간다. 다시 아이들이 나타났지만 여전히 이쪽은 소리가 사라진 세계이다. 그런 점에서 세스의 작품들은 명랑함과 헛헛한 쓸쓸함이 함께 녹아 있다.


작품들을 둘러보다 나는 전시관 안쪽으로 하얀 벽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벽 안에 뭔가 전시되어 있는 게 있나 궁금증이 일어날 때 쯤, 다른 관람객이 한쪽 눈을 감은 채 벽에 얼굴을 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가만 보니, 벽에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다. 나도 얼굴을 벽에 대고 구멍 안을 쳐다본다. 작은 틈새로 아까 본 작품 속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구멍을 옮겨 가며 다시 작품들을 보다가, 나는 구멍에 눈 대신 귀를 갖다 댄다.


9. 소리로 지은 박물관


“ 요즘 상하이 현대미술관에서는 어떤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죠?”

“ Seth라고요, 1974년 생 프랑스 작가입니다. 이 양반은 마이애미, 베를린, 그레노블 등 세계 다양한 도시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주제로 그래피티 작업을 하는 작가예요.”

“ 이번에는 어떤 작업이죠?”

“ 상하이 주변부의 다 쓰러져가는 철거 예정 지역에서 작업을 진행했더라구요.”

“ 이런 거 중국 당국이 싫어하지 않나? 보여주기 싫은 모습일 텐데. 안 그래도 그래피티는 일종의 범법 행위 성격을 가지고 있잖아요?”

“ 이 장르가 태생적으로 그런 성격이 있죠. 만약 뱅크시가 현관문 앞에 그래피티를 그려 놓았다. 그럼 어쩌실 거예요? 그것도 새로 이사한 집 현관문에?”

“ 어휴 생각만 해도 피가 확! 아니고... 그럼 감사하지! 그 현관문 당장 뜯어서 경매에 붙여야죠!”

“ 아저씨, 현금 좋아해?”

“ 어, 현금 좋아해. 허허.”

“ 세스가 뱅크시같이 사회적으로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가였다면, 중국 당국에서 애초에 허가를 안 했겠죠.”

“ 슈고우가 뱅크시처럼 얼굴 없는 작가인 것도 비슷한 이유가 있겠네요,”

“ 그렇죠.”

“ 맥락에서 조금 벗어나는 질문인데, 슈고우란 중국 이름을 우리 식으로 바꾸면 어떻게 됩니까?”

“ 알면 실망할텐데.”

“ 설마 세계적 SF 작가 테드 창(Ted Chang)의 본명만큼 할까요?”

“ 테드 창 본명이 뭔데요?”

“ 강봉남입니다.”

“ 헉...음... 봉남 씨 정도는 아니구요. 아, 이 방송을 듣고 있는 분들 중에 봉남이라는 이름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으면 사과드립니다. 봉남 씨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슈고우란 이름은 우리식으로 하면 허구입니다. 빌 허, 꾸며대다 구, 허구(虛構).”

“ 허구라... 뭐 작가 이름으로서는 그닥 나쁘지는 않네요. 그건 그렇고 현대 미술관에서 소리로 지은 박물관 발견했습니까?”

“ 글쎄요.”

“ 또 글쎄요야? 이러면 우리를 청취자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 아니, 우리는 크레타인이잖아요. 청취자분들도 우리가 크레타인인 것을 알고요. 크레타인 에피메니데스가 뭐라고 했죠?”
“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

“ 저는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이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 그럼 에피메니데스도 크레타인이니까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은 거짓이겠네요.”

“ 그렇죠.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은 거짓이니까, 모든 크레타인이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은 사실이 아닌 거죠. 이제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문장 대신 ‘소리로 지은 박물관이 존재한다’라는 말을 넣어보죠.”

“야, 이제 그만해!”



10. 그렇게 귀를 기울이면


전시관의 작은 구멍은 다시 나를 범식이네 집으로 데려 간다. 하나씩, 하나씩, 범식이네 집에서 듣던 소리들이 나를 찾아온다. 제일 먼저 들리는 소리는 이런 노래다. 식빵 같이 생긴 이티의 머리 하하하하 우스워. 범식이네 집 앞마당의 평상에서 범식이 누나가 자기 아버지의 라디오 카세트 플레이어로 들려주던 산울림의 노래. 같이 따라 부르라는 누나의 말에 노래를 따라 부르려 할 때 옆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에 생긴 종기의 고름을 짜는 게 무서워 범식이가 통곡을 하고, 그 울음소리에 범식이 아버지가 범식이에게 뭐가 무섭냐며 고함을 지르고 있다. 잠시 후 또 다른 소리. 뭔가 타닥타닥 타는 소리. 지금은 사라진 음식인 말린 갈치를 연탄불에 굽는 소리다. 나는 범식이 입에 물려 있는 말린 갈치를 보며 부러워한다. 그러다 들리는 우리 아빠의 오토바이 엔진소리, 그 소리를 듣고 뛰어가는 내 발걸음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은 차츰 잦아들고, 사위가 어두워진다. 어느덧 나는 다시 작은 셋방에 잠들어 있다. 어두운 밤, 잠결 너머로 제주항에서 출발하는 카페리선의 뱃고동 소리가 들려온다.


상하이 현대미술관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잠시 멈춰서 길에서 들려오는 상하이의 소리들을 들어 보고, 내가 들었던 상하이의 소리들을 떠올려 본다. 공원에서 한 노인이 켜는 얼후(해금) 소리, 광장무를 추는 사람들이 카세트로 틀어 놓는 경극 스타일의 노랫소리, 패밀리마트 편의점에 들어갈 때 점원들이 하는 인사, 숙소 근처 과일가게 가족들이 가게 앞에 둘러 앉아 저녁 식사를 하면서 웃고 떠드는 소리. 아침에 학교에 아이를 데려다 주는 엄마가 아이에게 뭐라 당부하는 말들. 그런 소리들. 소리들.


모든 것들은 사라질 운명이고, 그중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들은 그런 소리들이다. 그러나 언젠가 나는 벽에 난 작은 구멍에 귀를 대고 이곳 상하이의 소리들을 찾을 것이다.


그렇게, 다시, 귀를 기울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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