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는 고백이지만, 나는 가수 한대수의 팬이다. 팬클럽 같은 활동은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영 할 생각이 없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한대수의 팬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그의 앨범 <무한대>를 듣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그의 팬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의 팬임을 깨닫게 된 것은 2005년 경 서울 신촌의 여기저기서 출현하는 그를 여러 차례 목격하면서부터이다. 그를 처음 본 것은 2005년 4월 27일 신촌의 교보생명 앞 횡단보도였다. 그는 내 앞에서 자기 아내의 손을 꼭 부여잡고 길을 건넜고, 나는 그 모습을 코끼리가 도심 한 가운데 나타난 것인 양 놀라서 보고 있었다.(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그날 코끼리 네 마리가 동물원을 탈출해서 소동을 일으켰다.)
얼마나 놀랐는지, 나는 그 날의 일을 지금은 나도 찾지 않는 내 블로그에 기록해 두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날 한대수를 봤다는 사실을 어디에 가서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팬이 되면 불쑥불쑥 올라오는 그런 욕망을 눌러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아/어 보다’를 가르칠 때 유명한 사람들과 만나본 경험을 이야기하게 하는데, 이 수업을 할 때 나는 한대수를 만나 봤다고 학생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었다. 학생들이 케이팝 가수들은 알아도 1970년대부터 활동한 한국의 히피 할배를 알지는 못할 터이니. 그 대신 정우성이나(미안하지만 이 분 머리 뒤에서 비치는 후광 같은 것 없어요), 장동건(이 분 얼굴 저만큼 커요) 같은 영화배우들을 만났던 시시한 경험을 이야기 해 준다. 그러면서도 한대수를 만난 경험을 얘기해 줄 수 없음을 혼자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 후로도 나는 여러 장소에서 그를 마주쳤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그랜드 마트에서 마트 계산원에게 ‘오우 ~ 케이!’, ‘굿~’이라고 외치며 호탕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다. 한 번은 신촌의 한 고깃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다른 테이블에서 가족들과 소주를 마시고 있는 한대수를 본 적이 있다. 망설임과 서성거림의 대가인 나는 ‘형님 팬입니다. 싸인 좀 해 주십시오’라고 할까 아니면 그냥 쿨한 팬이 될까 망설이다가, 결국 쿨한 팬이 되기로 하고 술만 마셨다. 그래 쿨해 지자. 그도 사람, 나도 사람.
그 이후로도 나는 한대수의 쿨한 팬으로 살아 왔다. 이 말은 어쩌다 가끔 그의 노래를 듣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별 관심 없이 살았다는 뜻이다. 그러다 이 곳 상하이에서 살면서 그의 노래를 다시 떠올리게 됐다. 심오하거나 거창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한대수와 그의 노래를 다시 떠올린 이유는 간단한다.
상하이의 식당에서는 찬물을 주지 않는다.
디폴트 값(default value)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로 하면 컴퓨터에서 사용자가 따로 지정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주어지는 값을 말한다. 즉 기본 값, 따로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않으면 그냥 주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고 하니, 중국의 식당과 한국의 식당은 ‘물’에 대한 디폴트 값이 다르다는 소리다. 한국의 식당에서는 자리에 앉으면 기본으로 냉수를 내 오지만, 중국의 식당은 여름에도 뜨거운 차를 부어 준다. 이 걸 깨달았을 때, 내 머리 속 스피커에서는 자동적으로 한대수의 ‘물 좀 주소’가 재생되고 있었다.
외국인으로 산 다는 것은 매일 매일 새로운 디폴트 값을 찾는 숨은 그림 찾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식당만 예로 들자면 냅킨은 따로 달라고 해야 한다든지, 맥주를 시킬 때 따로 ‘삥더’라고 얘기하지 않으면 상온 상태의 약간 뜨뜻한 맥주를 준다든지, 병따개가 테이블마다 없어서 병을 따려면 종업원을 따로 불러야 한다든지, 물수건은 사용하면 따로 돈을 내야 한다든지 하는 디폴트 값.
이러한 디폴트 값을 최초로 확인하는 순간은 강렬해서, 자신이 떠나온 세상 속에서 작동하던 디폴트 값이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예를 들어 ‘따이즈’라는 말의 중요성을 깨닫는 과정이 그렇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계산대에 들어섰을 때마다 계산원이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멀뚱히 서 있다가 손으로 봉투를 가리켰다. 편의점에서 몇 번이나 그 말을 반복해서 듣고 나서야 그 말의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 말은 ‘수야오 따이즈 마?-봉투 필요하세요?’라는 말이었다. 요컨대, 중국이나 한국이나, 마트나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때는 여러 행동의 연쇄로 이루어진 행위의 세트가 있는데, 그 세트의 마지막은 봉투가 필요한지 묻고 답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아아, 봉투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몰랐을 깨달음이었다. 기실, 너무나 거창한 의미들로 부풀려져서 이제는 오히려 별 의미 없이 사용되는 ‘문화’라는 것은 결국 이런 자잘한 디폴트 값들의 묶음이 아니었던가.
외국 생활에서 디폴트 값을 확인하는 것은 이처럼 내 몸을 자동으로 조정해 왔던 기본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인 동시에,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기본 값이란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자신을 조정하던 디폴트 값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기본 값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은 어쩌면 진짜 여행자의 삶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긴 여행이든 짧은 여행이든.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것도 디폴트 값을 벗어나는 일이다. 팬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기본 값을 이탈한 비정상임을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팬임을 밝히는 것은 선언이 아니라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느끼고 본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 가깝다. 말하자면 팬의 기본 값은 비정상이다. 남들이 듣기에는 시끄럽게만 들릴 음악에 그토록 감탄하는 것이 그렇고, 자신이 살고 있는 외국의 식당에서는 냉수를 안 준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맥락 없이 호출하는 것도 그렇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세상의 디폴트 값과, 그 디폴트 값을 벗어나는 일들을 생각하다 고개를 돌린다. 거실 베란다 창문에 반사된 내 얼굴이 보인다. 내 얼굴의 디폴트 값은 어찌하여 이 모양이란 말인가? 창문 속 풍경에 실증이 난 나는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 어둠이 내린 밖을 바라본다.
아, 그러나 비는 안 오네.
여기는 상하이, 한대수를 듣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