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람'과 '잘함' 그 착각에 대해...
둘째 녀석이 느닷없이 달려온다.
그리고는 오른손 손날을 자기 이마에 대었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내 이마로 가져다 댄다.
“조금만 더 크면 똑같아지겠네.”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이없음과 웃음이 동시에 스며든 얼굴로, 나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식탁 위 간식을 먹기 위해 두 다리 길게 뻗고 까치발까지 들던 그 작은 몸이 어느새 엄마의 키와 비슷해지고, 이제는 아빠인 내 키마저 넘보는 중이다. 하긴, 세 살 위인 형이 작년에 내 키를 넘었으니 그 욕심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첫째 녀석은 이제는 어깨동무라도 하려면 내 팔이 위로 올라간다.
그만큼 아이들은 자랐다.
키도 자라고, 생각도 자라고, 마음도 자랐다.
그리고 잘하는 것도 많아졌다.
야구도, 달리기도, 책 읽기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한다.
‘자라다’와 ‘잘하다’
어쩐지 발음도 닮아 있다.
그래서일까.
어른들은 아이가 자라면, 자란 만큼 모든 것을 잘할 거라고 믿기 시작한다. 키가 큰 만큼, 기대도 커진다. 얼굴이 반듯할수록, 성적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어른들의 착각이다. 키가 180이 넘고, 190이 넘어도 아이의 내면이 반드시 그만큼 자란 것은 아니다. 몸의 성장은 눈에 잘 보이지만 마음의 성장은 때때로 아주 느리고, 아주 조용하게 진행된다. 분명한 건 우리 아이들은 자기의 속도대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그 자람의 속도는 부모가 어떤 환경을 만들어 주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아이 스스로 어떤 세계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서도 방향이 갈리고 속도도 달라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만 겉으로 드러난 크기만을 가지고 아이를 판단한다.
그 오해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사회가 보여주는 이미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디어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키가 크고 얼굴이 잘생겼으며 늘 ‘대표님’, ‘실장님’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그런 이미지를 보며 자랐고, 그 기준을 은근히 내면화한 채 살아간다. 보기 좋은 외모가 능력까지 품고 있다고 믿는 사회, 그 안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우리는 너무 빨리 어른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시선 아래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어른들은 자꾸 잊는다. 아이들은 아직 자라는 중이라는 것을 말이다. 몸이 어른스러워졌다고, 마음까지 어른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단지 마음보다 몸이 조금 더 빨리 자랐을 뿐이다. 누구보다 잘하고 싶고, 기대만큼이 아니라 그 이상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어른들이 아니라 바로 그 아이들이다.
그러니 어른들이여, 이 자라는 아이들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줄 수는 없을까. 지금 이 모습 그대로의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수는 없을까.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걸 이젠 인정할 때가 되었다.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선물은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일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지고, 때로는 실수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뿌리를 키워주는 것. 그러기 위해 부모는 아이를 학원으로 내몰기보다, 좋은 대학이라는 목표에만 매달리기보다, 아이의 하루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살아 있는 아이를 결과물로 만들지 않고, 살아내는 과정을 함께 걸어주는 것. 그게 부모의 자리다.
부모는 대신 살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낼 수 있도록 곁에서 지켜봐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른이 먼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는 제 속도대로,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