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이 지켜보는 사랑에 대해
아이들이 많이 자랐다.
돌이켜보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인데, 벌써 이렇게 자라버렸다. 한때는 나 없이 잠들지도 못했고, 낯선 길을 걷기라도 하면 어느새 내 손을 찾아와 꼭 잡곤 했던 아이들 이었다. 그 작은 손이 내 손을 의지하던 감촉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데, 이제는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내 손이 아닌, 자기만의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부쩍 아이들의 뒷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책상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문제집을 들여다보는 모습, 가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도 곧 다시 고개를 떨군 채 뭔가를 골똘히 적어내려가는 모습. 나는 그 곁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아이들의 어깨 너머로 하루를 지켜본다.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지는 게 아버지의 마음이다.
입시는 단지 공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떤 길을 걸을지, 어떤 사람이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힘들다.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선명하지 않다. “그냥 대학은 가고 싶어”라는 말이 전부일 때, 나는 그 말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자꾸만 헤아려보게 된다. 어쩌면 그 짧은 말 안에는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고 싶다는 바람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은 구체적인 꿈은 없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가보겠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마음을 믿는다. 그리고 언젠가 그 마음이 자기만의 언어와 색깔을 갖게 될 거라 믿는다.
아이들을 바라보며 자주 드는 생각이 있다.
부모로서 내가 정말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학원을 더 보내주는 일일까, 더 좋은 교재를 찾아주는 걸까. 물론 그 모든 것이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삶을 마주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금이나마 보여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은 말보다는 침묵을 더 많이 품게 된다.
무언가를 설명하고 가르치기보다는 그저 묻고, 기다리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옆자리를 내어주는 것. 그렇게 내 아이가 자기만의 속도로 자기만의 리듬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이고, 해야만 하는 책임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어쩌면 끊임없이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늘 앞장서 걷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의 등 뒤를 따라가야 한다는 걸 깨닫는 것. 그게 서운하거나 슬픈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사랑이 깊어졌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나를 따라와”가 아니라 “어디든 괜찮아, 나는 여기 있을게”라고 말해주는 시간. 그게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다.
가끔은 일부러 아이들의 어릴 적 사진을 꺼내본다.
작은 손에 과자를 꼭 쥐고,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닦아주던 기억, 잠들기 전 내 품에 안겨 “아빠, 오늘도 옛날 이야기 해줘”라고 말하던 작은 목소리. 그 시절의 아이는 지금보다 훨씬 작고, 훨씬 솔직했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많이 웃고, 훨씬 많이 안아주었다.
지금도 사랑은 여전하다.
단지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이젠 안아주는 대신 밥을 차리고, 길을 안내하는 대신 조용히 등을 떠민다.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무심한 표정 뒤의 감정을 읽으려 애쓴다. 그리고 무엇보다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아이의 삶은 아이의 것이고, 나는 그 삶의 일부로 남을 뿐이라는 걸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
경제적인 문제는 늘 마음에 걸린다.
얼마나 더 도와줄 수 있을지, 얼마나 더 지켜줄 수 있을지, 답이 없는 물음표들 속에서 나는 오늘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려 애쓴다. 그리고 바라본다. 내 아이가 언젠가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자기 몫의 기쁨과 슬픔을 견뎌내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이가 들어설 문을 바라보며 밥상을 차릴 것이다. 된장국에 익숙한 반찬 몇 가지와 그래도 메인 음식은 있어야지 하는 마음에 배달 주문한 빈대떡이다. 그리고 “오늘 어땠어?”라는 짧은 인사.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아이가 느껴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세상이 아무리 바쁘고 복잡해도 집만큼은 따뜻했다고, 아빠와 함께한 저녁이 마음 한구석을 지켜줬다고 기억해준다면, 나는 그걸로 정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