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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있지 않았어야 하는 순간

by SOJEONG

그날은 오지 않았어야 했다. 참건 참지 않았건 간에 그러한 순간은 있지 않았어야 했다.


그날의 6개월 전. 회사의 신규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해야 하는 업무가 맡겨졌다. 탐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회사의 구성원으로서 맡겨진 일에 언제나 최선을 다해왔다고 자부하던 나는 두말없이 해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대화에서 대표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사님이 잘하시는 줄 알지만, A고문님을 센터장으로 해야 할 것 같아요."


순간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다양한 분야에서 기획을 해왔던 나와 프로그래머 출신인 A고문과의 조합이 잘 어우러지면 시너지 효과가 날 것 같다는 말도 이어졌다. 언뜻 수긍이 가는 말이기는 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A고문과는 잠깐이긴 했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이 있었는데 틀에 박힌 사고방식과 팀원들의 생각을 전혀 듣지 않는 모습에 사내 직원들 모두가 싫어하는... 그런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A고문은 역시나 자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시를 내리는 것도 없고 의사결정 하나 속 시원하게 하는 법이 없었다.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리더의 방향성 제시와 의사결정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결정적인 순간에서 꼭 이런 말을 뱉어낸다. "이 사안에 대해서는 대표에게 의사결정을 요구할 거야."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되겠지라는 기대감을 갖지만 대표는 또 다른 말을 뱉어낸다.


"최종 의사결정은 대표인 내가 할 수도 있지만, 센터의 결론은 뭔가요? 센터에서 결정해서 보고해 주세요"


이내 회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굳어진다. 한두 번도 아니고.... A고문에 대한 신뢰와 기대감은 이제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는 지경이 돼버렸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 전날 나는 신규사업 브랜딩에 대한 아이디어를 몇 가지 적고, 사내 직원들의 의견을 수집해 3가지 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의사결정을 위한 회의 소집을 요청하는 장문의 이메일을 대표와 A고문을 수신자로, 팀원들을 참조자로 설정해서 보냈다. 대표는 이메일에 대한 회신을 보내왔다.


"이 아이디어에 대해 회의를 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들이 정말 구성원들의 의견을 담았는지 의문이네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요"


순간 "이거 뭐지?"라는 물음표만 계속됐다. 회신 메일의 내용은 분명 아이디어에 대한 불만족이 가득 쌓여있다. 물론 아이디어가 맘에 안들 수 있는 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에 당연할 수 있다. 그런데 회신 메일의 수신자 명단에 센터의 모든 구성원이 다 들어가 있다. 3주 동안 애써 아이디어를 짜내고 외부 의견을 수집하고 내부 직원들에게 까지 의견을 모아 만든 결과물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없다. 내가 걱정했던 건 나와 A고문 이외에 다른 팀원들의 사기가 꺾일까 봐 그게 더 걱정이었다.


순간 욱 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온 힘을 다해 눌렀다. 그리고 A고문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 반응이 없다. 센터장인 A고문의 반응을 지켜보며 오전을 보내고 오후 3시가 되었다.


참기 힘들어진 나는 다시 회신 메일을 썼다. "맘에 안 드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팀원들의 사기까지 꺾으시는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했습니다. 다시 하라고 하시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라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5시쯤 대표는 나와 A고문을 자기 방으로 불렀다. 온갖 질책이 이어진다. A고문은 아무 말이 없다가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내뱉는다.


"이 이사가 이런 메일을 대표님께 보내게 돼서 센터장으로써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아랫사람 관리하지 못한 잘못입니다. 그러나 이 메일은 제 생각과 의견은 전혀 담겨있지 않은 이 이사의 독단적 행동입니다. 저에게 나무라실 건 아닙니다."


머리가 멍하다. 멍하다 못해 핵폭탄으로 얻어맞은 기분이다. 그래.. 분명 센터장인 A고문과 이야기 나누지 않고 독단적으로 욱하는 기분에 망할 메일을 보낸 건 내 잘못인 건 맞다. 백번 이야기 해봐야 입만 아픈 잘못인 거다. 내가 충격을 받은 건 이 상황에서 자기 면피를 하려고 애쓰는 A고문의 태도였다.


이후 나는 대표실을 나왔고 대표와 A고문은 20여 분간을 둘이서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의 분위기는 감지한다. A고문은 나를 따로 불러 지나간 일이니 잘해보자며 다독인다. 잘못한 것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 무엇보다 감정을 싫어서 쓴 것, 센터장과 먼저 이야기 나누지 못했던 것에 대한 사과였다. 그러나 사실 그 메일은 대표보다는 A고문 당신에게 쓴 메일이기도 했다.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것을 힘들어하는지 아무리 이야기를 하고 개선을 해보자 이야기해도 도무지 답이 없던 사람이었다. 마치 벽에 공을 던졌는데 튀어나올 줄 알았던 공을 벽이 먹어버린 느낌이랄까. 암튼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나니 지치고 반감이 생기지 않을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래서 조용히 따졌다. "고문님은 화 안 나세요? 팀원들이 얼마나 노력했고 아이디어를 짜냈는지 아시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거에 대한 인정은커녕 고생했다 한마디도 없으시고...." A고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천사가 아닌지라 내 안위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센터장이라는 위치에서 팀원들의 사기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센터장과 팀원들 사이에서 의견을 조율하고 연결고리를 해야 하는 역할 때문이 아니라 리더로서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않는 A고문에 대한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암튼... 그 이후 나와 A고문의 대화는 급격히 줄었다. 나도 더 이상 무언가 시도해 보고 아이디어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저 A고문이 가끔씩 던지는 내용에 대해서만 반응할 뿐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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