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함을 가지고 놓아주는 것을 배우는 것
어느 날 불쑥 아들 녀석이 질문을 던진다.
아빠. 나이가 들면 좋은 게 뭐야?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생각해 보니 나도 어렸을 적 부모님께 비슷한 질문을 했던 것 같다. 어떤 대답을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저 껄껄 웃으셨던 기억만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어느 시절을 보내던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고, 더 행복해질 줄 알았으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슈퍼맨이 되어있을 거라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나의 모습은 그렇지는 않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도 사람인지라 좋은 기억보다는 반대의 기억이 머릿속을 감싼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회사에서도 제법 인정받는 사람이었으며 연봉도 올랐다. 결혼해서 두 아이들을 얻었고 사람들도 많이 얻었다. 하지만 건강도 이전만 못하고, 사업 실패도 겪었으며,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도 당해봤다. 좋은 것들을 얻기 위해 달리기보다는 받은 상처를 회복하기에 급급하며 살아온 것 같아 딱히 뭐가 좋은지 대답해 줄 말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아들 녀석이 대답해 달라며 재촉하던 순간, 문득 한 문장이 떠올랐다.
나이가 드니 똑같은 상황이 생겨도 덜 당황하게 되더라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한 출연자가 가수 양희은 님이 이런 말을 했다며 한 말이다.
당황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표현하면 그동안 쌓아온 경험치나 지식을 토대로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는 방법을 더 쉽게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일 것 같다. 사람마다 경험치와 지식, 인적관계 등이 다 다르기 때문에 풀어가는 방식도 다양하다.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해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그래서 회사나 우리 사회는 경험 많은 분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경험이 많으니 거친 세계를 잘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덕분이다.
나는 굉장한 완벽주의자의 삶을 살아왔다. 머릿속에 정립된 계획이 어떤 이유에서든 틀어지거나, 그것에 대해 비판을 받으면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남들이 봤을 때 정말 완벽한 인생이었어야 했고, 완벽하게 일을 한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 스스로를 채찍질했고, 후배 동료들을 채찍질하기도 했다. 너무 피곤했다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나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뉴스도 보고, 수많은 정보를 스크랩해 놓고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것일 수 있으나 나 스스로 마음을 편하게 만들기 위한 일종의 사기였을 수 있다.
최근 책을 많이 읽으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를 돌아봤다. 그 시간들을 통해 깨달은 건 살아가며 새로운 난관들을 만나게 될 것이고 아등바등 탈출하려 애쓰겠지만 그래도 이전보다는 좀 여유를 부리지 않을까 싶다. 이만큼 살아오며 쌓인 경험과 생각 등등으로 인해 양희은 님이 말한 것처럼 당황은 덜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며 얻고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놓아주는 것도 연습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정신과 의사인 김혜남 선생님은 그녀의 책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에서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이 든다는 것은 내가 소유했다고 생각했던 것들, 내 곁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떠나보낼 때가 되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면, 월급쟁이로 사는 것도 지금까지 보다는 어려워질 것이다. 함께 어울리고 달려가던 선후배도 멀어질 거다. 아이들도 결혼해서 자기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문제가 있을 때 "아빠! 이거 어떻게 해야 해?"라며 부모를 찾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나이 드신 부모님은 점점 더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그 때문에 어릴 적만큼 더 가까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부모님과 나의 관계에서 돌보는 자와 돌봄을 받는 자의 관계는 바뀐다. 그리고 이별을 감수해 내야만 한다.
예상할 수 있는 모든 순간들을 맞이했을 때 덜 당황하고 잘 감당해 내려면 어찌해야 할까. 그 답은 우선 나에게 여유 공간을 만들어줘야 할 듯싶다.
새로운 정보를 쉴 새 없이 주입하기보다는 때로는 멍 때리며 마음과 뇌를 좀 쉬도록 하고 소화를 잘 시키도록 해야 할 것 같다. 마치 밥을 먹고 음식을 소화시키는데 일정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나보다는 경험도 쌓였고 조금이라도 더 단단해졌을 테니 그래도 될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자기 계발서, 경영서적보다는 에세이나 가벼운 단편 소설이 눈에 더 들어온다. 이렇게 하면 나 자신에게 휴식의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듯해서다.
그러고 보니. 휴식을 하고 싶은데 또 무언가를 머리와 마음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