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2)"한예종 나오면 감독,작가 데뷔 쉽나요?"

by 뿌리 깊은 나무

영화계라는 야생에 발을 내디딜 때, ‘한예종 영화과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은 꽤 든든하면서도 무거운 외투가 된다. 업계가 이들에게 보내는 시선은 분명하다. 적어도 이 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본기는 갖추었겠다는 믿음, 그리고 자본의 논리 속에서도 자신만의 작가적 색채를 한 방울쯤은 섞어낼 줄 알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그것은 비단 학벌이 주는 권위라기보다, 국내 유일의 국립예술종합대학에서 혹독한 제작 현장과 날 선 비평의 시간을 견뎌낸 창작자의 ‘근성’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합의에 가깝다.


하지만 이 외투가 늘 따뜻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 한예종 출신 타이틀은 ‘소통이 어렵고 엘리트 의식에 갇혀 있을 것’이라는 편견의 낙인이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예술적 고집이 현장의 유연함을 가로막을 것이라는 우려, 혹은 일반 취업 시장에서 마주하게 되는 ‘특수 전공자’라는 낯선 분류 체계 역시 예술사(학사 학위) 졸업생들이 감내해야 할 현실이다. 전문사(대학원에 준하는 MFA-Master of Fine Arts) 과정의 경우 강의를 위한 학위로서는 충분한 효력을 발휘하지만, 일부 대학에서 박사 과정 진학 시 행정적 제약에 부딪히는 등 현실적인 걸림돌이 존재한다는 점 또한 전문사 지원자라면 알아둘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한예종이 법적으로 교육부 소속의 정식 대학교가 아닌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각종학교로 분류된다는 이유로 진학을 꺼려하던 부모님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 영상업계에서 일하고 싶은 학생, 특히 진짜 '창작자'가 되고 싶은 이라면 결국 1순위로 지망하는 곳이 한예종이다. 업계의 생리를 아는 이들이라면, 특히 작가가 될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꼭 한 번은 부딪혀 보라고 권하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한예종을 나오면 정말 데뷔하기가 쉽나요?”

이 질문 앞에 서면 현실은 냉정해진다. 현직 교수들의 전언에 따르면, 연출 전공 전문사(MFA) 기준 한 기수 20명 가운데 장편 감독으로 데뷔하는 이는 1,2 명에 불과하다. 상업 영화감독은 졸업생 중 100 명 중 1명,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경우는 200 명 중 1명꼴이다. 대부분 이십 대에 입학하는 예술사 과정의 경우 비교적 어린 나이에 삶의 다른 선택지로 인해 현장을 떠나는 이들이 더해지면서 그 비율은 더욱 낮아진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영상원 출신 창작자’의 이름들은 바로 이 가혹한 확률을 통과한 별들의 기록이다. 나홍진(<추격자>, <곡성> 연출/각본), 장재현(<검은 사제들>, <파묘> 연출/각본), 이정범 (영화 <아저씨> 각본/연출) 윤가은(<우리들>), 같은 감독들, 그리고 촬영감독 이모개(<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파묘> 촬영)와 각본가 정서경(<아가씨>, <헤어질 결심> 각본)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한국 상업 영화와 독립 영화의 결을 확장해 온 창작자들이 그 예다. 이외에도 이상근(<엑시트> 연출/각본), 이경미(<비밀은 없다> 연출/각본), 이종필(<삼진그룹 영어토익반>, <탈주> 연출/각본), 김도영(<82년생 김지영> 연출/각본), 정주리 (<도희야>, <다음 소희> 연출) 박인제(<무빙> 연출), 김희원 PD(<눈물의 여왕>, <빈센조> 연출) 등 많은 졸업생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한국 영화와 영상 산업의 풍경을 풍성하게 만들어왔다.

그렇다면 그 바늘구멍 같은 데뷔의 확률 밖으로 밀려난 이들은 모두 실패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한예종 영상원을 졸업한 이들의 행보는 영화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라는 선택지에 갇혀 있지 않다. 오히려 예술학교에서 단련한 날카로운 시각과 서사 구성 능력은 사회 곳곳에서 대체 불가능한 무기가 된다.


실제로 내 주변의 선후배들은 영화라는 울타리를 넘어 놀라울 만큼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촬영과 조명, 편집, 음향, CG 등 영화 기술의 최전선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영화 제작사 PD나 방송국 PD, 드라마 작가와 방송 작가로 활동하며 콘텐츠 산업의 중심을 지탱하는 이들도 많다.

최근에는 광고 연출과 광고 제작, 유튜브 PD나 숏폼 드라마 연출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는 이들도 늘어났다.

또 어떤 이들은 현장을 떠나 비평가나 출판계로 진출해 문장의 힘을 발휘하고, 예술재단에서 예술 행정을 맡아 창작자들을 돕는 든든한 조력자가 되기도 한다. 대학교 행정직원으로 안정적인 삶을 꾸리거나 일반 기업의 회사원이 되어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이들도 있다.

(취업 시장이라는 진짜 야생에서, 한예종 학생들이 갖추면 좋을 구체적인 경험이나 능력들에 대해서는 책 후반부에서 따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예술의 참된 목적은 결코 화려한 입상이나 감독 데뷔에만 있지 않다. 창작은 삶을 더 깊이 관조하고, 일상의 균열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하며, 결국 자신의 삶을 이전보다 윤택하게 만드는 ‘사고의 근육’을 기르는 일이다. 다만, 남들보다 더 깊이 고민하고 예민하게 세상을 관찰해야 하는 만큼, 방황의 시간이 조금은 더 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길고 지난한 시간을 통과하며 얻어낸 영화적 언어는 창작의 길을 걷지 않더라도 인생이라는 긴 항로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 시절 최선을 다했던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평생을 지탱해 줄 단단한 자부심이자 훈장으로 남는다.


기억하자. 삶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예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입시의 문턱에서 너무 움츠러들 필요는 없다. 우리가 기르려는 것은 단순히 영화를 찍는 기술이 아니라, 평생을 버텨낼 나만의 단단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이야기가 이제 막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세계를 한 번 펼쳐보겠다"는 지독한 용기를 품은 이들이라면, 나이가 적든 많든 예술 경험이 어떻든 이 길을 걸어갈 자격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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