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점의 문제
한국 정치를 포기한 친구들이 늘고 있다. 포기할 때 포기하더라도 원인은 제대로 파악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정치의 후진성이 지도자 인격과 도덕성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 원인보다 구조적 원인이 더 중요하다.
나는 그동안 여러 글에서 현대 한국 정치를 국가주의와 자유주의의 경쟁으로 분석하고 설명했다. 이 관점에서 한국 정치의 위기는 기본적으로 지적 독점의 위기다. 산업화 시대에 형성된 성장, 대기업, 기술 중심의 국가주의가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으면서 다른 선진국에서 보기 어려운 기득권 독점 체제를 구축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맞다, 선진국 민주주의 위기에는 양극화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한국의 양극화, 즉 진영 전쟁이 미국보다 더 우려되는 이유는 그 편협성에 있다. 한국의 진영을 대표하는 세력은 강남 우파와 강남 좌파다. 한국 사회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심지어 0.1%에 불과한 엘리트들이 양측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그레고리 헨더슨이 언급한 '소용돌이 정치'의 현대판이라 할 수 있다. 이 '강남' 중심의 소용돌이에 한국 정치의 모든 다른 균열축이 빠져들고 있다. 자본 대 노동, 성평등 대 가부장제, MZ세대 대 기성세대, 수도권 대 지방, 삶의 질 대 물질적 성공 등 모든 사회적 이슈가 강남 우파 대 강남 좌파의 대결 구도에 함몰되고 있다.
이러한 구도는 사회 통합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강남 우파와 강남 좌파는 모두 산업사회 엘리트 기득권을 대표하며, 그들의 대립은 기득권 내부의 권력 쟁취 경쟁에 불과하다. 산업사회 체제가 창출하는 경제적 이익의 분배 방식과 대북정책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주력산업 육성과 한미동맹 중심의 국가 운영이라는 큰 틀에서는 본질적 차이가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회 분야에서 나타난다. 한국 사회는 성평등, 노동 문제, 세대 갈등, 지역 격차, 삶의 질 등 다양한 갈등을 겪고 있다. 그러나 기득권 정치 세력은 이러한 사회 문제에 대해 물질적 혜택 중심의 포퓰리즘적 해법만을 제시할 뿐, 실질적인 변화나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기후변화, 환경, 탈권위주의, 분권화, 창조경제, 창조도시, 15분 도시, 크리에이터 이코노미 등 탈산업사회가 요구하는 개성, 다양성, 삶의 질, 사회적 윤리 가치를 지원하고 강화하는 정책들은 그들의 관심 밖에 있다. 이는 현재의 정치 구도가 급변하는 사회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반면 미국의 진영 싸움도 격렬하지만, 그 구조는 한국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국의 중앙 정치는 뉴욕이나 실리콘밸리 같은 특정 상류층 엘리트 집단에 의해 독점되지 않는다. 대신 민주당과 공화당은 각각 다양한 지역과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대도시와 농촌, 세속주의와 종교, 노동과 자본, 환경 보호와 경제 성장 등 다양한 균열축이 정치권에 수용되고 있다. 이는 한국의 '강남 우파 대 강남 좌파' 구도와는 확연히 다르며, 미국 정치가 상대적으로 더 포괄적이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한국의 진영 전쟁을 이 좁은 엘리트 권력 투쟁에서 어떻게 구해낼 수 있을까? 답은 '기준점의 재설정'에 있다. 정치적 기준점을 강남 우파 대 강남 좌파에서 국가주의 대 자유주의로 재설정하는 것이다.
현재 강남 우파와 강남 좌파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국가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들은 경제, 사회 문제 해결에 있어 국가 주도의 접근을 선호한다. 이에 대비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은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우파와 좌파 정당도 자유주의적 전통이 존재한다. 우파는 시장경제와 개인의 자유를, 좌파는 시민의 권리와 사회적 자유를 중시해 왔다. 이러한 자유주의 전통은 2000년대까지 국가주의를 견제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양측의 자유주의는 뚜렷한 쇠락을 보이기 시작했다. 보수 진영에서는 이명박 정부 이후 자리 잡은 지식인 경시 풍조가 정책에 대한 합리적 토론과 비판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진보 진영의 경우, 2000년대 시민단체의 과도한 정치 참여가 2010년대에 부작용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2010년대 이후 시민단체가 독립적으로 사회 의제를 설정하고 주도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시민사회의 자율성과 비판 기능이 현저히 저하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수와 진보 양측이 각자의 자유주의적 전통을 재발견하고 강화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는 정치적 대개조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양측이 자유주의 전통을 회복함으로써, 현재의 국가주의 일변도 정치 구도에서 벗어나 더욱 균형 잡히고 다양한 시각을 포용하는 정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 정치는 보다 건강한 민주주의와 사회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대개조(Realignment)'를 주도할 수 있는 정치적 기업가의 출현이 절실하다.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기존 정치인 중에서 이러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인물이 나오는 것이다. 이들이 국가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비를 새로운 기준점으로 삼아, 산업사회 엘리트 중심의 정치에서 벗어나 보다 폭넓은 시민의 이해와 요구를 반영하는 정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