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목길 경제학자 Sep 01. 2024

인간 중심 자동차(Human First Vehicle)

인간 중심 자동차(Human First Vehicle)


최근 유럽 자동차 시장을 탐사할 기회가 있었다. 이번 탐사의 성과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현대자동차그룹의 글로벌 위상을 실감했다는 점이다. 둘째, 미래 자동차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었다는 것이다.


먼저, 세계 3대 자동차 생산자로 도약한 현대자동차그룹의 경쟁력을 살펴보자. 현대자동차그룹은 2023년 글로벌 판매 734만 대를 기록하며 도요타, 폭스바겐에 이어 3위에 올랐다. 전기차 시장에서는 2022년 유럽에서 테슬라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의 유럽 진출로 프리미엄 시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의 위상은 단순한 자동차 제조 기술을 넘어 디자인, 라이프스타일, 헤리티지, 친환경 등 한국 기업이 오랜 기간 어려워한 소프트 기술의 혁신으로 얻은 성과다. 현대차의 '파라메트릭 다이내믹스' 디자인 철학은 차량에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하며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수소연료전지 기술 개발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도 친환경 이미지 구축에 기여하고 있다.


두 번째 성과는 미래 자동차의 방향성과 그 의미를 확인한 것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을 포함한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도전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인간 중심 자동차’(Human First Vehicle)다. 자동차 산업 전체가 가격, 서비스, 디자인, 라이프스타일을 넘어 친환경, 공동체, 자기표현 등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2010년 이후, 자동차 생산기술의 발전을 이끄는 주요 요인은 환경 규제다. 유럽과 선진국의 탄소 배출 규제로 인해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은 누가 더 효율적으로 환경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EU의 엄격한 환경 규제인 'CO2 배출량 규제(EU CO2 Emission Standards)'는 자동차 산업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자동차 배출가스 기준을 충족하는 기술은 크게 전기차(BEV), 하이브리드차(HEV), 수소연료전지차 (FCEV) 등 세 가지로 나뉜다.


수소연료전지차의 대중화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기존 완성차 업체들은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차의 판매량에 따라 EU의 탄소 배출 규제에 충족할 수 있을지가 결정된다. 2030년까지는 하이브리드차 분야에서 강세를 보이는 도요타가 우세할 것으로 보이지만, 2030년 이후에는 하이브리드차만으로는 규제를 만족하기 어려워질 전망이다. 전기차를 대량으로 판매할 수 있는 기업이 최종 승자가 될 것이다.


2020년 이후, 전기차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며 높은 평판을 유지하고 있는 현대기아차가 2030년 이후에는 더욱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장은 현대기아차도 2025년까지 전기차 판매량을 30-50% 더 늘려야 EU의 탄소 배출 페널티를 피할 수 있는 상황이다.


자동차 산업의 연비 규제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70년 미국이 대기정화법(Clean Air Act)을 시행하기 시작한 이후, 자동차 연비 규제는 점차 강화되어 현재는 완성차 회사들이 판매 차량 전체를 '무공해 차량(ZEV, Zero Emission Vehicle)'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러한 환경 규제는 기술이 자율적인 기준으로 강요한 규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동차 산업에 대한 인간의 '압박'은 환경 규제에 그치지 않는다. 자동차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자동차가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자동차는 오랫동안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비난받아 왔으며, 도시 파괴자라는 또 다른 비판에 직면해 있다. 도시학에서는 매력 없는 도시를 '자동차 도시'라고 표현한다. 즉, 인간이 아닌 자동차 중심의 도시는 거리 문화를 파괴하고 도시를 활기 없는 공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자동차 산업이 진정으로 존경받는 산업이 되기 위해서는 '도시 이동 차량(UMV, Urban Mobility Vehicle)'을 개발하는 것이 다음 과제가 될 것이다. 이 차량은 단순히 효율적인 이동 수단을 넘어서, 도시 환경을 개선하고 살기 좋은 공간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차량을 의미한다. 자동차 중심의 도시 설계에서 벗어나 보행자와 대중교통,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개인 이동수단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도시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차량이야말로 도시 문화 파괴자라는 오명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 모빌리티 관련 문헌에서는 UMV의 특징과 가능성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자율주행 기능을 통한 주차 공간 최소화로 보행 공간을 확대하고, 차량 공유 서비스와의 호환성을 통해 도로 혼잡을 감소시키며 대중교통과의 연계성을 강화할 수 있다. 또한, 소형 전기 동력 시스템을 통해 도심 내 이동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환경 부담을 줄일 수 있으며, 첨단 센서와 통신 기술을 활용하여 보행자 안전을 강화하고 교통 흐름을 최적화할 수 있다.


유럽의 맥락에서는 역사문화도시와 상생할 수 있는 모빌리티 설계가 관건이다. 유럽의 역사문화도시는 도시와 모빌리티 디자인의 통합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환경 중 하나로 평가된다. 도시 디자인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빌리티 디자인의 혁신이 이러한 통합을 주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덴마크 코펜하겐 등은 보행, 자전거, 대중교통이 결합된 스마트 모빌리티 시스템을 통해 역사적 유산을 보존하고 도시 이동성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도시들도 UMV 디자인에서 근본적인 설루션을 찾는 데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자동차 산업의 진화는 장기적으로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키는 기술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설에 따르면, 환경, 공동체, 자기표현 욕구는 단순한 편리성보다 더 높은 단계의 욕구에 해당한다. 환경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무공해 차량(ZEV)이 1단계라면, 앞으로는 도시를 살리고 공동체 욕구를 충족시키는 '도시 이동 차량(UMV)', 그리고 궁극적으로 개인의 자아실현을 지원하는 '개인 역량 강화 차량(PEV, Personal Empowerment Vehicle)'이 인간이 요구하는 자동차 기술의 방향이 될 것이다.


개인 역량 강화 차량(PEV)은 자동차가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개인 활동의 플랫폼으로 기능할 것이라는 최근의 논의를 반영한 개념이다. 즉, 차량이 이동 중에도 업무, 엔터테인먼트, 사회적 교류 등 다양한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개인화된 공간으로 진화할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완전 자율주행 기술이 실현되면 운전에서 해방된 탑승자는 이동 시간을 자기개발이나 생산적인 활동에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자동차 기업들은 PEV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도시 설계, 그리고 일의 미래를 구상할 수 있다. 현재 MZ 세대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는 디지털 노마드, 한 달 살기, N잡 등과 같은 노마드 라이프스타일은 높은 이동성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PEV는 집이나 직장을 넘어, 개인의 활동을 위한 핵심 플랫폼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기술 철학자 아널드 페이시(Arnold Pacey)의 통찰은 현재 자동차 산업과 기술 발전의 방향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페이시는 기술의 문제가 과도함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함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의 진정한 욕구를 완전히 만족시키는 기술이 아직 구현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자동차 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 중심 자동차(Human First Vehicle)의 개념을 완성한 차량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기술 사회의 미래에 대한 과도한 우려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AI) 등 새로운 기술이 인간의 자율성을 빼앗아 디스토피아를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이 퍼지고 있지만, 현재의 기술 발전 궤적은 이와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오히려 기술은 점점 더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Al 기술에서도 인간 중심의 접근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 필요한 것은 기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인간의 진정한 욕구를 깊이 이해하고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과 관심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국의 1990년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