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플로리다의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
창조도시와 창조계급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도시학자 리처드 플로리다가 신간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를 출간했다. 나의 관심은 한국 독자의 반응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 책도 전문가만 호응하는 전문서적으로 끝날 것인가?
도시와 문화를 연구하는 나에게 플로리다의 도시 연구는 중요한 선행 연구다. 골목길 자본론과 창조도시론은 둘 다 도시로 모여드는 미래 인재를 도시의 경쟁력으로 설명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는 도심을, 후자는 도시 전체를 창조경제의 중심지로 설정한다. 창조산업의 위상에 대해서도 플로리다와 생각을 달리한다. 지역의 차별적, 내재적 성장을 선호하던 나로선 지역 차이를 감안하지 않고 모든 도시가 창조계급 유치로 경쟁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썩 내키지 않는다. 창조산업도 중요하지만 도시 고유의 자원을 활용한 특화 산업이 도시 미래에 더 중요하다. '라이프스타일 도시', '작은 도시 큰 기업'이 주목한 도시산업도 그 도시가 창출한 새로운 지역산업이다.
미국식 창조도시론에 회의적인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한국 정부나 대중도 창조계급이 도시의 창조산업을 개척한다는 플로리다의 창조도시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창조경제를 국가 비전으로 추진한 박근혜 정부조차 플로리다의 창조도시를 추구하지 않았다. 대구에서 시작된 창조도시포럼이 거의 유일하게 플로리다 창조도시론을 전파하는 모임이다. 한국에서 추진된 창조도시 사업은 영국식 창조도시, 즉 문화기획과 문화산업 중심의 창조도시를 모델로 삼았다. 대부분 문화체육관광부 지역문화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미국식 창조도시가 동력을 얻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플로리다의 주장을 짚어보면, 핵심은 창조계급의 부상이다. 도시 성장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첨단 기술자, 예술가, 전문직, 대학과 병원 종사자로 정의되는 창조계급에 주목했다. 창조계급은 다른 계급과 달리 직장을 따라 도시를 선택하지 않는다. 도시를 선택한 다음 직장을 찾는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도시를 선호하는가? 단순히 인프라가 좋고 일자리가 많은 도시일까? 창조계급은 그 이상을 요구한다. 그들의 우선순위는 라이프스타일이다. 자신이 선호하는 라이프스타일, 즉 삶의 질, 개방성, 도시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도시에서 일하길 원한다.
미국식 창조도시 모델은 대기업과 신도시에 익숙한 한국의 기성세대에게는 생소하다. 미국 창조계급처럼 자유롭고 독립적인 일과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고, 도시 문화가 풍부한 도심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에게 통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의 어반 라이프스타일도 소비에 한정된다. 생산지로서의 창조도시를 지지하는 젊은이는 많지 않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들의 미온적인 반응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한국인에게 도시는 생활공간이지, 생산공간이 아니다.
플로리다는 다른 도시학자와 마찬가지로 도시를 생산 단위로 이해한다. 과거에는 공단과 산업이 성장을 주도한다면, 지금은 도시가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도시를 성장 주체로 처음으로 제시한 학자는 제인 제이콥스다. 그가 주목한 성장 동력은 도시의 다양성이다. 도시가 성장을 주도하는 이유는 생산과 소비의 집적을 통한 규모의 경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행위자들의 상호 작용을 통한 혁신이라고 주장했다. 제이콥스는 다양성을 제고하는 요소로 공간 구조에 주목한다. 주거와 상업 활동을 허용하는 복합 용도(Mixed Use) 구역, 짧은 거리와 촘촘하게 이어지는 블록, 낡은 건물과 신축 건물의 공존이 그 조건이다. 공동체와 공간이 자연적으로 만들어낸 사회 자본으로서 다양성을 설명한 제이콥스는 도심의 오래된 마을과 공동체를 보전해야 도시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에게 대규모 단지 건설을 위한 재개발은 도시를 파괴하는 일이다.
제이콥스 이후 도시경제학자들은 인재와 기업의 밀도(Density)를 강조한다. 규모의 경제, 스필오버 효과 등 기업과 인재의 집적으로 발생하는 외부 효과가 경제 성장을 촉진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밀도란, 생산 주체의 밀도를 의미한다. 제이콥스와 달리,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도시 성장에 반드시 공간의 다양성, 특히 저밀도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건축의 고층화와 고밀도화를 통해 인재와 기업을 도심에 더 집적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인 성장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이런 논쟁과 관계없이 도시를 성장 주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1960년대 국가 주도의 경제 성장을 추진한 이후, 성장은 국가 차원의 자원 활용과 배분을 통해 국가가 기획하는 일이 되어왔다. 도시 차원에서 성장 주체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은 서울이다. 서울-지방이라는 중심-주변부 구조가 고착화된 한국에서 도시는 서로 경쟁하는 대상이 아니다. 플로리다의 주장대로라면, 지방 도시가 인재 유치를 통해 서울과 경쟁해야 하지만, 한국 상황에서 그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의 인식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도시는 소비, 취향, 주거, 투자의 장소, 즉 생활공간이다. 생활공간 도시에서는 편리성, 쾌적성, 심미성, 익명성의 가치가 중요하다. 생산공간으로서의 도시에게 중요한 가치는 생산성이다. 도시경제학이 발견한 생산성의 비밀은 공간과 사람의 다양성, 인재와 기업의 밀도, 창조인재의 집적, 창업생태계다. 도시를 생산 공간으로 인식하지 않는 우리는 막연히 중심 도시 서울에 가야 한다고는 생각할지언정, 자신의 일터가 특정 지역에 위치해 있어야 생산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02년 플로리다가 처음 창조도시론을 주장한 이후 한국인의 도시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아직도 도시는 생활공간일 뿐이다. 도시를 생산공간으로 설정하는 플로리다의 신간에 대한 독자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변수가 있다면 이번 책의 주제가 도시의 불평등이라는 점이다. 젠트리피케이션, 부동산 폭등 등 도시의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에서도 두꺼운 독자층이 형성돼있다. 초기 저술에서 플로리다는 창조계층의 도시 내부 집적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지 않았다. 대도시 지역(Metropolitan Area)에 거주하는 창조계층의 규모를 집계했지 그들이 그 지역 어디에, 그리고 어느 정도 집적돼 있는지는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신간에서는 도시 내에서 창조계급과 비창조 계급, 즉 고소득 창조계급과 저임금 서비스/노동계급이 어떻게 지리적으로 분리돼 있는지에 대해 상당 분량을 할애한다. 도시 간 격차도 새로운 조명을 받는다. 창조계급이 집적된 동서부 해안도시와 그 외 도시 사이의 격차가 계속 확대되고 있으며, 한때 빠르게 성장했던 남서부 선벨트 도시들도 창조도시 경쟁에서 낙오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해결책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플로리다는 결론에서 지역 정부와 사회의 역할과 지역 공동체 복원을 강조하지만, 미국 도시의 불평등은 인종, 교육, 다문화주의 등 지역 사회가 단독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미국 역사, 사회, 환경 요인이 얽힌 난제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평등주의가 강하고 인종적으로 동질적인 한국에서는 정부가 다양한 도시 정책으로 사회 통합을 실현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다면 순진한 것일까? 비근한 예로 골목상권을 들 수 있다. 낙후 지역에 매력적인 골목상권을 조성하면 지역 경제를 활성화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구성원들을 그 지역으로 모을 수 있다. 경제 유인만으로 인종적, 사회적 장벽을 무너뜨리기 어려운 미국과는 다른 상황이다. 한국의 지역 문제도 해결하기 쉬운 것은 아니지만, 플로리다의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는 미국 도시 문제가 사회 과학의 힘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책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자명하다. 더 늦기 전에 도시를 생산공간과 산업 생태계로 활용해야 한다. 생활에 일을 결합해 창조하는 도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미래 도시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