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 크리에이터, 기획자: 창조 커뮤니티의 3대 축
한국 사회는 문재인 정부 이후 도시재생, 상권활성화, 문화도시, 마을기업, 사회적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소지역 공동체 사업에 투자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새로운 공동체 지원 모델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경과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평가가 필수적이다.
그동안의 논의를 정리해보면, 공동체 사업의 부진은 여러 요인에서 기인한다. 불명확한 사업 목표 설정, 제한적인 주민 참여와 역량, 활동가의 전문성 부족과 공급의 한계, 단기 공모사업 중심의 정부 지원 방식, 비효율적인 중간조직 운영 등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이제는 공동체 사업을 기초 역량 차원에서 재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장 전문가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공동체 사업이 지속가능하려면 주민이 전문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민 참여는 궁극적으로 참여 유인에 달렸다. 왜 주민이 공동체 사업에 참여해야 하는가? 주민의 책임감에 어필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주민에게 공동체와 개인 차원의 명확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공동체 비전에 대한 합의
그동안 공동체 사업을 보면, 어떤 목표를 추진했는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지역사회 활력 강화, 문화향유 증진, 상권 활성화 등의 목표를 제시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의 공동체를 구축하려고 하는지는 모호하다. 도시재생의 경우, 주민이 살고 싶은 저층지역의 구체적인 모델을 논의하고 합의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현재는 동네 전체에 대한 비전 없이 정부가 제시한 사업이나 주민이 원하는 개별 사업을 산발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추진한다. 상권활성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건축적 특성과 콘텐츠를 가진 상권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논의 없이 주차장, 축제, 청년몰 등을 통해 기존 상인의 단기 매출 증대에만 집중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민이 살고 싶은 국내외 공동체 모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다.
마을 모델을 설정할 때는 건축환경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상권, 문화예술, 친환경, 교육과 돌봄 등 가치 중심의 마을 모델은 주민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율하기 어렵다. 반면 건축환경은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합의가 가능하다. 성수동의 붉은벽돌 건축물, 연희동의 단독주택 보존, 각 지역의 근대문화거리, 독일마을, 지중해마을, 한옥마을 등이 좋은 사례다. 이처럼 건축물 특성, 보행환경, 용도규제, 문화시설 등 마을 경관, 주민의 삶의 질, 크리에이터 활동을 지원하는 물리적 환경에 대한 방향성을 우선 논의해야 한다. 마을 모델 선정을 위해서는 추상적 가치보다 실제 존재하는 마을을 벤치마킹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개인 비전 제시
개인의 경제적 유인도 명확하지 않다. 공동체 사업의 성격상 공동체 사업에 투자했기 때문에 주민이나 상인이 직접적인 경제적 이득을 갖고 가기 어렵다.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을 주기 어렵다면, 주민이 공동체 사업을 통해 자기개발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실효성 있는 주민의 교육과 훈련이 중요한 이유다.
공동체에서 가장 기본적인 풀뿌리 주체는 주민, 크리에이터, 활동가(기획자)이다. 풀뿌리 기반이 단단해야 그 위에 효율적인 거버넌스와 정책을 설계할 수 있다. 공동체 논의에서 주로 주민을 언급하지만, 거주자 또는 생활자를 의미하는 주민으로는 창조 커뮤니티 건설이 어렵다. 주민의 창조적 활동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실제로 창작활동을 하는 크리에이터와 주민과 크리에이터를 연결하는 기획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주민과 크리에이터, 주민과 기획자, 크리에이터와 기획자는 상호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다. 한 주민이 주민, 크리에이터, 기획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단지, 크리에이터와 기획자는 일정 수준의 전문성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주민이 '크리에이터'가 되어야 지속가능한 창조 커뮤니티가 가능하다.
로컬 메이커스페이스 지원
크리에이터란 콘텐츠를 직접 제작해 플랫폼에 공유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창작자를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뭔가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단순한 취미 활동이 아닌, 전문적인 콘텐츠 제작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상권활성화, 문화도시, 도시재생 등의 공동체 분야는 주민이 크리에이터로 참여해야 성공할 수 있다.
정부가 크리에이어 역할을 강조해 주민의 크리에이터 교육과 훈련에 투자하면, 주민이 공동체 사업에 참여할 유인도 높아진다. 공동체 사업을 통해 크리에이터 전ᆢ환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공동체 사업에서 습득한 크리에이터 기술로 공동체 사업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크리에이터 창업도 도전할 수 있다.
새로운 크리에이터 교육 시스템으로 로컬 메이커스페이스(마을 공동 창작소)를 제안한다. 프랑스도 주민의 창조적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마을 단위의 공동 작업장인 '제3의 장소'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2019년에 시작한 이 사업은 불과 5년 만에 전국 3,500개 마을로 확산됐다.
현장 교육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거점 상권에 로컬 메이커스페이스를 설치하고 운영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이곳에서 주민과 크리에이터들에게 콘텐츠 기획, 제작, 마케팅 등 전문적인 기술을 교육하고, 실제 창작 활동을 지원할 수 있다. 여기에는 디지털 도구 활용법, 온라인 플랫폼 운영, 수익 모델 설계 등이 포함된다. 기존 커뮤니티 활동과 다른 점은 콘텐츠 제작 체험을 넘어 이를 사업화하고 창업하는 기술을 교육한다는 것이다.
로컬 메이커스페이스가 지역 활동가를 고용하면, 지역의 고질적인 활동가 부족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 지역 크리에이터뿐만 아니라 활동가도 훈련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지역 활동가도 로컬 메이커스페이스를 통해 안정된 커리어와 수익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
크리에이터 기술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 없이 단순히 주민 참여를 독려하는 것만으로는 공동체를 창조 커뮤니티로 육성하기 어렵다. 따라서 정부와 지자체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크리에이터와 활동가 육성을 위한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지역 공동체는 진정한 의미의 창조적 혁신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