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에 한국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학창 시절에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때문에 그 시절을 회상하노라면 슬그머니 경주가 기억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된다. 그래서 경주는 ‘추억의 도시’다.
경주가 배경이 된 영화와 드라마의 정서에는 자연스럽게 ‘그리움’이 깔린다. 경주를 배경으로 한 2013년 영화 <경주>와 2014년 TV 드라마 <참 좋은 시절> 역시 그렇다. <참 좋은 시절>에 대해 한 언론이 "옛 정취가 가득한 골목길과 정감 어린 돌담길, 기와지붕으로 이뤄진 건물들까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서정적인 영상미를 돋우며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미디어 속의 경주는 향수를 자극한다.
경주는 친해지기 쉬운 도시가 아니다. 한국 불교문화의 수도답게 좀처럼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다. 인내심을 갖고 탐구해야 하는데 하나의 방법이 교토와 비교하며 여행하는 것이다.
경주와 교토는 공통점이 많은 도시다. 교토가 일본의 천년 고도라면, 경주는 한국의 천년 고도다. 교토는 서기 794년에서 1886년까지 천년 이상 일본의 수도로 번성했다. 경주는 기원전 57년에 건국해 서기 935년 멸망한 신라의 천년 수도였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수도와 버금가는 위상을 가진 대도시였다.
천년고도답게 교토와 경주는 자국에서 가장 풍부한 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을 17개나 보유한 교토는 말 그대로 도시 자체가 야외 박물관이다. 경주도 국내에서 가장 많은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도시다. 지난 1995년 석굴암과 불국사가 처음으로 등재된 이후, 2000년 경주역사유적지구와 2010년 양동마을이 지정됐다.
두 도시의 또 다른 공통점은 외관이다. 도시 전체가 문화재이기 때문에 다른 현대 도시와 다른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낙후됐다고 말할 정도로 오래된 건물과 거리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교토와 경주는 여러 면에서 다른 도시다. 경주가 인구 26만의 소도시라면, 교토는 인구 150만의 대도시다. 경주가 관광산업에 의존하는 관광도시라면, 교토는 관광도시를 넘어 교세라, 닌텐토, 일본전산 등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전자 부품 기업을 보유한 첨단과학도시로 자리 잡았다.
도시 여행자에게 가장 큰 차이점은 상점가와 거리다. <천년 교토의 오래된 가게 이야기>는 교토에서 3대 이상 걸쳐 이어오고 있는 가게 10개의 역사와 경쟁력을 입체적으로 설명하는 책이다. 과연 경주에서 3대 이상 지속된 노포를 몇 개나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노포 선정 기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 경주 상황이 답답해진다. 저자는 교토에는 노포 자원이 풍부해 100년 이상 된 가게만 골라도 충분히 책을 쓸 수 있다고 '자랑'한다. 그가 100년 업력 기준 대신 3대 지속 기준을 선택한 이유는 교토 상점의 다양성 때문이다. 포목, 화과, 주조 등 전통산업 업종에 집중돼 있는 100년 업력 기업들로는 교토 노포의 매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천년 교토의 오래된 가게 이야기>가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는 업종 구성이다. 한국에서는 노포를 보통 오래된 음식점으로 이해하지만, <천년 교토의 오래된 가게 이야기>의 노포는 먹거리뿐만 아니라 볼거리와 살거리를 망라한다. 음식점은 이즈우, 로카 사이칸, 혼케오 와리야 등 3곳에 불과하고, 나머지 7개 점포는 소매업, 숙박업, 공예공방, 서점 등 다양한 업종에 골고루 분포돼 있다.
우리가 교토 상업시설의 규모와 깊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관광산업의 미래에 있다. 오래전부터 여행 트렌드는 자연과 역사에서 도시문화로 옮겨갔다. 2017년 뉴욕타임스가 그해 꼭 방문해야 할 장소로 추천한 52개 중 26개가 도시, 12개가 자연관광지, 그리고 14개가 지역 또는 국가였다. 색다른 체험과 공감을 찾는 도시 여행은 명승지 위주로 여행하는 중장년층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선 이미 보편적인 여행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도시여행자는 단순히 특정 관광명소를 둘러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 도시만의 콘텐츠를 즐긴다. 스마트폰 앱을 통해 도시 곳곳의 숨겨진 자신만의 여행지를 발견하고 직접 찍은 사진과 영상 콘텐츠를 SNS에 일상처럼 공유하며 여행한다.
도시 여행자가 찾는 콘텐츠는 대부분 상업시설이다. 뉴욕타임스가 추천한 공간을 보면 대부분 음식점과 상점이다. 전통문화유적, 자연 명승지, 문화예술시설은 소수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먹거리와 살거리가 풍부한 도시가 성공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도시 여행자에게 인기 있는 상업시설은 교토 노포와 같이 장인정신과 지역 특색이 살아있는 곳이다. 도시 여행자가 다른 도시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음식, 상품, 그리고 체험을 찾기 때문이다.
여행 트렌드가 도시문화 중심의 도시 여행으로 바뀌고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하나다. 왜 교토에는 세계 수준의 상업시설이 풍부한데 경주에는 그런 시설이 부족한 것일까?
교토와 비교해 부족함을 느껴서인지 경주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정작 경주에서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영화 <경주>도, 드라마 <참 좋은 시절>도 경주를 ‘살고 싶은 곳’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정말 경주에 ‘살고 싶은 도시’의 요소가 부족한 것일까?
경주에 들어가 보면 상업 활동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평판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다른 지역 도시에서 찾을 수 없는 상업 문화를 접할 수 있다. 교동 한옥마을이 대표적이다. 다른 도시의 한옥마을이 관광자원으로만 활용되는 것에 비해 이곳은 점잖고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냄으로써 경주의 품격을 높인다.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가게들도 지나치게 상업적이지 않아 좋다.
경주 사람들 역시 도시의 매력을 높이는 요소다. 한옥마을 중심부에 있는 최부잣집 고택의 사람들은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밝히는 데 당당하다. 이 집 마당에는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적은 팻말이 놓여 있다.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다.
‘바른말’하는 경주 사람은 식당에서도 만날 수 있다. 유명한 냉면집인 ‘평양냉면’의 벽에는 ‘상인 일기’라는 제목의 액자가 걸려 있다. 주인의 상(商)철학을 담은 글은 이렇게 끝난다. "상인은 오직 팔아야만 하는 사람. 팔아서 세상을 유익하게 해야 하는 사람. 그렇지 못하면 가게 문에다 묘지라고 써 붙여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경주가 ‘전통’에만 기대는 것은 아니다. <참 좋은 시절>이 1970년대를 풍경으로 그린 경주 도심의 골목길은 이제 다른 도시가 부러워하는 도시 재생 자원이 됐다. 시내 곳곳에 자리 잡은 고분과 골목길을 배경으로 개성 있는 카페가 속속 들어서고 있다. 2000년대 중반에 시작된 골목상권 붐이 경주에 도착한 것은 2016년이다. 황남동 포석로 입구에 브런치 카페 노르딕이 들어선 이후 시작된 포석로 상권은 일 년 만에 황남동을 꽉 채웠다.
황리단길이라 불리는 포석로는 이제 경주를 대표하는 상권으로 부상했다. 대릉원흑백사진관, 배리삼릉공원, 도란도란게스트하우스, 기와양과점, 홍앤리식탁 등 2018년 글로벌 에페어즈 매거진 모노클이 추천한 경주 장소 모두가 황남동에 위치해 있다.
영남 지역의 주요 도시에서 사랑받는 커피전문점 ‘슈만과 클라라’는 경주에서 창업하고 본점을 운영하는 기업이다. 영남이 자랑하는 프렌치 레스토랑 ‘11 체스터필드웨이’ 역시 경주에 있다. 경주에 국제 수준의 커피전문점과 프렌치 레스토랑이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전통과 자부심이 살아 있는 도시만이 도시의 품격을 지키고 높이는 기업을 창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주에는 ‘살고 싶은 도시’의 요소가 많지만 미디어를 통해 부각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사람들의 도시 인식에 미디어가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다. 많은 젊은이가 선망하는 뉴욕 라이프스타일도 알고 보면 드라마가 만든 이미지다. 미국 작가 찰스 몽고메리는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에서 드라마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 미국 TV 드라마들은 대부분 교외에서 사는 가족들의 삶을 묘사했지만, 1990년대 이후 미국에서 인기를 끈 프렌즈(Friends),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 같은 드라마들은 도심의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묘사했다. (…) 이전 세대와 다른 이야기와 이미지를 대중매체에 세례 받은 신세대가 성인이 되면서, 미국에서 각광받는 주택 형태도 바뀔 가능성이 있다."
지역의 도시에 대한 젊은 세대의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미디어가 지역의 도시를 ‘그리운 도시’로만 묘사하는 행태부터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살고 싶은 도시’로 만들기 위한 시의 노력도 계속되어야 한다. 지금 경주에서 부족한 한 가지는 지역 경제를 견인할 지역 산업이다. 고유의 문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업과 산업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경주의 과제다.
어떤 산업이 경주다운 산업인지는 쉽게 연상할 수 있다. 경주는 이미 관광, 법주, 한과 등 전통적인 색채가 강한 도시에 어울리는 산업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사찰 음식, 템플스테이, 명상원 등 불교를 기반으로 한 ‘힐링’ 산업을 더한다면 경주다운 색깔을 지닌 산업이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경주가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일본의 교토와 같이 지역의 자부심에 기반한 하이테크 산업을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토는 일본 문화의 중심지라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전자부품 산업을 개척했다. 교토의 자부심이 도쿄보다 더 우수한 제품을 만들고 교토와 차별화될 수 있는 기술과 산업을 개발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면서 이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경주는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문화도시다. 경주가 ‘그리운 도시’에 그치지 않고 ‘살고 싶은 도시’가 될 때, 그리고 이러한 지방 도시가 더욱 많아질 때, 한국은 문화강국이 될 수 있다. 한국 사회와 경주의 협력을 통해 경주를 더 많은 사람이 살고 싶어 하는 창조도시로 만드는 일, 이것이 문화융성과 창조경제 시대를 여는 우리의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출처: 라이프스타일 도시, 위클리비즈,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