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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Feb 28. 2021

개성이 남았다면

한국 경제에 새로운 모델이 될 도시가 있다. 이 도시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문화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많은 전통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이 곳은 천년 고도로 지역 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남다르다. 특히, 경제 중심 도시인 현 수도에 대한 경쟁심이 유별나 내부적으로 협동심과 단결심이 강하다. 고유의 지역 정체성은 산업경쟁력으로 발현되었다. 이 도시의 기업들은 특유의 지역색에 기반을 둔 철학과 경영방식으로 오랫동안 산업계를 이끌어왔다.


일본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이 도시가 교토인 것을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지역 정체성이 강하기로 유명한 교토는 교세라, 일본전산, 옴론, 닌텐도, 와코루 등 수많은 세계적 기업의 산실이기도 하다. 교토의 산업경쟁력은 독특한 지역 산업생태계와 기업문화에 기인한다. 교토는 교토대학 중심의 산학협력 시스템과 대기업이 신생 기업을 도와주는 기업 간 협력 문화로 자생적인 산업생태계를 구축했다. 또한, 교토 기업은 특유의 지역 문화적 기반을 유지하되 적극적으로 외부 인재를 유치하고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글로컬(glocal)한 경영 방식으로 도쿄 기업과 경쟁한다.


놀랍게도 한국에도 이런 도시가 있다. 바로 개성이다. 개성은 교토와 비슷한 찬란한 문화 역사를 가진 수도였다. 교토의 독립심이 수도를 뺏긴 박탈감에서 비롯되었듯이 개성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수도와 차별화된 지역 문화를 구축했다. 이런 문화 환경에서 독립심이 강한 개성상인 집단이 결성됐다. 이들은 새로운 부기법을 개발하고 독특한 조직체계와 경영제도를 운용하는 등 유교 사회에서 보기 드문 상도와 상철학을 실천했다.


개성상인의 전설은 과거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해방 후 월남한 개성 출신 기업인들이 창업한 개성 기업들이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작가 홍하상은 2004년 저서 '개성상인'에서 아모레퍼시픽, 에이스침대, 삼립식품, 신도리코, OCI, 오뚜기식품, 한일시멘트, 한국제지, 삼정펄프, 한국야쿠르트, 대한유화, 녹십자, 세방여행사, 한국화장품 등 무려 14개 기업을 개성 기업으로 소개했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아직도 '한 우물을 판다' '차입 경영하지 않는다' '신용을 목숨같이 소중히 여긴다' '검소와 절약을 생활화한다' '정치를 멀리한다' 등 개성상인의 경영 원칙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


개성 기업은 그 동안 국가 경제에 대한 기여도가 낮다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산업사회 시대에 주목 받은 기업은 수출을 통해 대기업으로 성장한 제조업 기업이었다. 차입을 꺼리고 한 업종에 집중하면서 내수 경쟁력을 키운 개성 기업은 수출 중심의 대기업만큼 덩치를 키우지 못했다.


그러나 수출산업 경쟁력이 약화되어 내수 산업을 육성해야 하는 지금, 특유의 영업전략과 문화 마케팅에 기반한 개성 기업의 내수 경쟁력이 다시금 주목 받고 있다. 개성 기업의 영업력은 판촉사원이 직접 가정으로 방문하여 상품을 판매하는 방문판매제도에서 잘 드러난다. 1960년대 유통업계에 일대 혁신을 일으킨 방문판매제도는 아모레퍼시픽과 한국야쿠르트가 처음 도입한 제도다.


아모레퍼시픽은 문화 마케팅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했다. 창업자 서성환 회장은 1978년 제주도에 녹차 밭을 조성한 이래 "우리 회사는 제품을 파는 회사가 아니라 문화를 전하는 기업이다"라는 신념으로 사라졌던 녹차 문화를 다시 대중화했다. 또 다른 개성 기업인 에이스침대 역시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입니다' '침대를 바꾸면 아침이 달라집니다' 등의 브랜드 카피를 통해 침대를 단순한 가구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는 문화 상품으로 끌어올렸다.


이제 개성 기업의 경쟁력이 해외 시장에서도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최근 중국 진출로 주가가 가장 크게 상승한 아모레퍼시픽, 삼립식품, 하나투어 중 두 기업, 즉 아모레퍼시픽과 삼립식품이 개성 기업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모레퍼시픽은 방문판매제도를, 삼립식품은 양산빵 판매와 모기업(파리바게트) 식자재 공급을 중국 시장에 그대로 도입하여 현지 경쟁력을 확보했다. 한국 시장에서 오랫동안 축적한 영업과 마케팅 역량으로 중국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탈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벤처산업, 서비스산업, 문화산업 등 새로운 창업 공간이 열리고 있다. 이 공간을 채울 기업가 집단을 키우기 위해서는 한국 기업 문화가 획일적이라는 편견부터 깨야 한다. 개성 기업은 오랜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경영 철학과 방식을 고수해왔다. 그리고 바로 이런 뚝심이 내수와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 강화라는 숙제를 안은 한국 경제에 꼭 필요한 기업가정신이다.


한국 전쟁 이후 잊혀졌던 한국의 비즈니스 중심지 개성. 이 개성이 한국 경제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한국의 미래를 찾는 우리 모두 '다시 개성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적 질문은 남는다. 개성이 남한에 남았다면 자생적인 지역 산업으로 서울을 견제할 수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한국은 보다 균형적으로, 보다 다양하게 발전했을지 모른다. 한국 전쟁 후 개성의 후예들이 한국 경제에서 보여준 독립성을 볼때 충분히 개연성 있는 가설이다. 



출처: 라이프스타일 도시, 위클리비즈,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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