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도시의 주역은 창조계급과 소상공인이다. 도시학자 리처드 플로리다가 처음 주목한 창조계급은 미술가, 음악가, 디자이너 등 문화예술인뿐 아니라 과학자, 창업자, 기술자 등 창의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직업군을 포함한다. 한국의 대표적인 창조도시 홍대 기준으로 보면 스타트업, 디자인과 콘텐츠 기업, 그리고 예술가가 창조계급으로 분류된다.
리처드 플로리다는 도시 성장을 견인하는 창조인재 유치가 도시 경쟁력을 결정하며, 이를 위해서는 도시산업, 아웃도어 등 창조계급이 선호하는 도시 어메너티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이트라이프, 바, 레스토랑, 서점, 로컬숍 등 도시산업은 소상공인이 주로 활동하는 업종이다. 도시산업이 경쟁력으로 대두되면서 문화예술인과 함께 도시문화를 창출하는 소상공인도 관광객과 창조계급을 유치하는 중요한 성장동력으로 인식한 것이다. 홍대에서도 개성과 감각 있는 상업시설의 운영자가 예술가만큼 홍대 문화를 창출하는 크리에이터로 인정받는다.
우리가 창조도시를 건설한다면 창조계급과 소상공인 중 누구를 우선적으로 육성해야 할까? 이 질문이 좋은 질문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굳이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창조계급과 소상공인을 동시에 유치하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창조계급과 소상공인은 상호 호혜적인 거래 관계이기 때문에 한 그룹이 다른 그룹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리고, 소상공인 비즈니스 자체가 콘텐츠 중심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창조기업과 소상공인 기업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소상공인은 창조계급이 창출하는 '부수적인' 산업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소상공인 정책 논의에서 한 번은 거쳐가아 하는 주제다. 소상공인을 강조한 리처드 플로리다 조차 소상공인을 핵심 창조계급이나 창조 전문직과 다른 서비스산업 노동자로 분류한다,
창조산업과 소상공인 고용 창출 과정을 보면 누가 누구에게 더 의존하는지를 가름할 수 있다. <직업의 지리학>을 쓴 엔리코 모레티는 창조산업이 서비스산업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입장이다. 첨단기술 일자리 하나가 다른 부분의 일자리 5개를 창출한다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한다.
모레티 논리를 따르면 서비스산업 노동자가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지는 분명해진다. 실리콘밸리 같이 첨단산업 일자리가 많은 도시로 가야 양질의 일자리를 확보하기 쉽고 지속적인 임금 상승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첨단산업을 보유하지 않은 도시는 난감해진다. 모레티가 첨단산업을 보유한 슈퍼스타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역산업의 기원에 대한 경제 지리학의 보편적인 견해는 '우연성'이다. 실리콘밸리의 하이테크, 로스앤젤레스의 엔터테인먼트, 휴스턴의 에너지 산업은 역사, 환경, 지리, 문화, 창업가 등 다양한 요소가 개입한, 거의 우연에 가까운 상황이 만든 산업이라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하이테크 산업 생태계를 새롭게 건설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고 말한다. 조시 러너(Josh Lerner ) 하버드대 경영대 교수는 <Boulevard of Broken Dreams>에서 세계 각국이 시도한 제2의 실리콘밸리 건설 프로젝트들은 성공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실패로 점철됐다고 주장한다.
특정 지역에 인재가 집중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정부 개입으로 이를 바꿀 수 없다는 주장은 지역발전을 포기하자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설사 지리적 분포의 효율성을 믿는다고 해도 현실 세계에서 지역발전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수없이 많다. 첫째, 아비지트 배너지와 에스테르 뒤플로의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에서 설명하듯이 빈곤 지역의 노동자들이 경제학자들이 기대하는 대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는다. 둘째, 인재와 자본의 지리적 집중이 과밀화, 부동산 가격 상승 등 그 혜택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도시의 주민에게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 셋째, 복지, 환경, 사회 비용 등 낙후 지역을 낙후 상태로 관리하는 비용이 그 지역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지역발전 비용보다 작지 않다. 넷째, 지역이 새로운 지역 산업을 개척하기 어렵다는 일부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세계의 수 없이 많은 도시들이 새로운 산업으로 도시를 살린다.
플로리다의 입장은 다르다. 모레티와 마찬가지로 창조계급과 창조산업이 도시경쟁력을 결정한다고 믿지만, 도시산업을 단순히 창조산업의 파생산업으로 인식하지는 않는다. 창조계급과 소상공인의 관계에서 있어서도 도시문화가 관광객과 창조인재를 유인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도시산업이 창조계층 일자리를 창출할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나아가 도시 어메니티, 관용, 개방성 등 지역 자산을 개발해 새로운 창조산업을 개척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전 세계의 많은 도시가 플로리다의 제안을 수용해 도시산업과 연결된 문화 재생 사업에 투자한다.
그 결과 문화시설과 도시산업 투자로 성공한 도시가 늘어난다. 구겐하임미술관을 유치해 쇠락한 도시 공장 지역을 재생한 빌바오, 탈산업화 과정에서 침체된 도심에 문화시설, 축제, 골목길 벽화로 활력을 불어넣은 멜버른, 스포츠와 문화산업을 살려 부활한 맨체스터. 여기에 포틀랜드, 피츠버그, 베를린, 오스틴 등 기존 첨단산업에 도시산업과 문화산업을 접목한 도시를 추가하면 성공사례는 더 늘어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도시와 문화 산업으로 창조도시를 건설한 도시가 어디일까? 광주, 전주, 경주, 안동 등 문화자원과 문화산업으로 성장동력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도시가 많다. 하지만 플로리다가 강조하는 도시 어메니티로 창조도시로 탈바꿈한 도시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도시 내부로 눈을 돌리면 플로리다의 창조도시론을 지지하는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서울 서부 지역의 홍대앞이다. 홍대 앞(이하 홍대)은 역사적으로 3단계 과정을 거쳐 한국의 대표적인 창조산업의 중심지로 도약했다.
1단계가 1980년대 시작된 문화지구화다. 홍익대 미대를 중심으로 홍대는 예술가 작업실, 갤러리, 미술학원이 집적된 문화지구로 자리 잡았다. 2단계가 대중문화 산업의 진입과 상업화다. 1990년대 신촌의 청년문화가 홍대로 이전하면서 홍대는 클럽, 라이브 뮤직, 인디뮤직 등 대안문화 산업이 번성했고 이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상업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3단계가 2010년대 이후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홍대 문화의 산업화다. 커피전문점, 독립서점, 코워킹 스페이스 등 혁신적인 도시산업 브랜드뿐 아니라 연예기획사, 콘텐츠 제작사, 디자이너 패션기업, 화장품 기업, 소프트웨어 개발자 등 문화산업과 창조산업 기업이 홍대에 둥지를 트기 시작했다. 이제 홍대는 위의 표가 보여주듯이 한국을 대표하는 독립 브랜드를 지속적으로 배출하는 창조산업 중심지가 됐다.
산업 집적 통계도 홍대 지역의 산업화를 보여준다. 2016년 통계청 전국사업체조사 자료로 집계한 서울의 골목산업(도시산업), 문화창조산업의 집적도를 살펴보자. 서교동은 전체 사업자 기준으로 골목산업이 서울에서 1위, 문화창조산업도 12위에 오른 비중 있는 지역이다. 소상공인 사업체로 한정하면 서교동의 위상은 더욱 높아진다. 서울에서 소상공인 골목산업은 2위, 문화창조산업도 4위에 랭크된 도시산업 중심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상위권에 속한 다른 지역이다. 상위 15위에 랭크된 지역은 예외 없이 종로, 중구, 강남, 여의도 등 서울의 비즈니스 중심지거나, 가산동, 구로동, 상암동 등 정부가 조성한 창조산업 지구다. 평범한 생활권 지역에서 도시산업과 문화창조산업의 허브로 도약한 동네는 서교동이 유일하다.
산업화 초기 서교동은 문화예술인 중심의 무대였지만,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면서 서교동을 산업 중심지로 키워낸 주역은 소상공인이다. 이들이 개척하고 일궈낸 도시산업이 토대가 되어, 창조계급과 창조산업을 유치하는 데 성공한 지역이 바로 홍대다.
홍대 사례가 산업정책에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도시문화로 경쟁하는 탈물질주의 경제에서 정부가 할 일은 혁신적인 소상공인을 육성해 창조산업에 필요한 도시문화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다. 산업사회에서 하던 방식대로 사람이 없는 지역에 창조산업 단지를 조성해놓고 막연하게 인재가 모이길 기대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홍대와 같이 문화예술인, 소상공인, 대학이 밀집된 지역을 중심으로 창조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탈산업사회의 산업정책이다.
1차 수정 202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