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체성이 뚜렷한 도시를 좋아한다. 그래서 도시 관련 책도 그 도시만의 정체성으로 시작하는 책을 선호한다. 뤼벡의 정체성은 너무나 명확하다. 도시 어디에서나 '한자도시 뤼벡(Hansestadt Lübeck)'이라는 표지를 볼 수 있다. 심지어 차량 번호판에도 'HL'이라는 한자도시의 약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한자(Hanse)'는 독일어로 '상인 집단' 또는 '교역 연합'을 의미하는 중세 독일어에서 유래했다.
한자도시란 중세 시대 북유럽과 발트해 지역의 무역을 주도했던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의 일원이었던 도시를 의미한다. 이 정체성은 뤼벡의 도시 구조부터 시민들의 생활방식까지 깊이 영향을 미쳤다. 좁은 골목길, 붉은 벽돌 건물, 상인들의 화려한 저택과 창고들이 이 도시의 상업적 전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내가 베를린 여행 중에 뤼벡을 방문한 이유는 이 도시가 가진 경제사적 의미 때문이었다. 케네디 백악관에서 안보보좌관으로 일한 경제사학자 월트 로스토우(Walt Whitman Rostow)는 그의 고전 '경제성장의 제단계(The Stages of Economic Growth)'에서 시장경제가 민주주의와 문화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을 '부덴브로크 동학'이라고 표현한다. 토마스 만의 소설 '부덴브로크 가문의 사람들'에서 착안해, 기업을 일군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는 공직이라는 명예를 선택하고, 손자는 기업과 공직을 마다하고 예술을 선택하면서 기업가 가문이 쇠락하는 패턴을 의미한다. 로스토우에 따르면, 국가도 비록 성격은 다르지만 길게 보면 이 동학의 궤적을 따라간다고 한다.
소설가 한은영의 여행기도 기여했다. 그녀는 2016년 3달 동안 베를린에 체류하면서 뤼벡으로 여행을 떠났다(한은영, 2018, 『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 뤼벡은 그녀가 베를린 체류 기간 중 유일하게 기차로 여행한 도시였다. 한은영 작가가 뤼벡에 끌린 이유는 나와 마찬가지로 토마스 만 때문이다. 만 소설의 경제사적 의미를 언급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만을 작가로 좋아한다. 카프카가 별로여서 프라하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자동맹의 역사와 정체성
뤼벡은 1143년에 설립되어 1159년 제국자유도시 지위를 획득했다. 12세기 초 발트해 중심의 무역 네트워크로 시작된 한자동맹이 점차 체계화되었을 때, 뤼벡은 이미 그 중심도시로서 '한자의 여왕(Queen of the Hanse)'이라 불렸다. 뤼벡의 뛰어난 지리적 위치(발트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전략적 입구)와 상업적 영향력은 도시의 번영을 가져왔다.
뤼벡법(Lübeck Law)은 100개 이상의 발트해 연안 도시들에 전파되었고, 한자 무역의 표준이 되었다. 16-17세기부터 대서양 무역 루트의 발달, 30년 전쟁, 강력한 국가들의 등장으로 한자동맹과 뤼벡의 영향력이 쇠퇴했지만, 그 역사적 유산은 도시의 DNA에 깊이 새겨져 있다.
한자동맹은 1669년 마지막 한자회의 이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지만, 뤼벡, 함부르크, 브레멘은 1937년까지 '자유 한자도시'라는 헌법적 자치 지위를 유지하며 도시 자율성과 무역 중심 정체성을 보존했다. 토마스 만의 소설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은 뤼벡이 19세기에도 중요한 무역항으로서 영향력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1835년부터 1877년까지 뤼벡에서 번영하고 쇠퇴하는 상인 가문의 4대에 걸친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도시의 상업적 중요성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뤼벡에는 소설의 배경이 된 실제 상인 주택을 개조한 토마스 만 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은 소설 속 부덴브로크가의 저택으로 알려져 있으며, 작가와 뤼벡의 상업적 역사를 함께 조명하고 있다.
오늘날 '한자'라는 이름은 품질, 신뢰성, 정직함의 상징이 되었다. 독일의 많은 기업들이 이 역사적 가치를 브랜드에 활용한다. 루프트한자(Lufthansa) 항공사가 대표적이며, 밴드에이드 제품을 만드는 한자플라스트(Hansaplast), 식품회사 한자푸드(Hansafood) 등 다양한 기업들이 한자 이름을 사용한다.
한자 브랜딩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한자 상인들의 신뢰와 품질에 대한 헌신, 국제적 개방성이라는 가치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대 독일 비즈니스 문화에서 중요시되는 정확성과 신뢰의 가치는 한자 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다.
뤼벡 방문객들은 2015년에 개관한 유럽 한자 박물관(Europäisches Hansemuseum)에서 한자동맹의 전체 역사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구시가지 북쪽 끝에 위치한 이 박물관은 중세 수도원 건물을 현대적 건축물과 조화롭게 결합하여 만들어졌으며, 한자 상인들의 일상생활부터 국제 무역 네트워크, 정치적 영향력까지 600년에 걸친 한자동맹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상호작용형 전시와 역사적 재현, 멀티미디어 요소들을 통해 방문객들은 단순한 관람을 넘어 중세 한자 무역의 세계를 직접 체험할 수 있으며, 뤼벡이 이 강력한 상인 연합의 중심지로서 가졌던 위상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현재 뤼벡은 1987년 지정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역사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관광업이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그러나 뤼벡은 단순한 '박물관 도시'가 아니다. 한자 정신은 오늘날 뤼벡 경제의 다양한 측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중소기업과 장인 정신이 살아있는 제조업체들이 여전히 뤼벡의 경제 기반을 형성한다. 마지판 제조업체인 니더레거(Niederegger)는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한자 시대의 품질에 대한 헌신을 이어가고 있다. 뤼벡 항구를 중심으로 한 무역과 물류 산업은 현대적 형태로 한자 시대의 상업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뤼벡의 도시 구조와 건축
뤼벡의 도시 구조는 현대 도시계획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중세 상인 도시의 특징인 직주근접(집과 일터가 가까움), 복합용도(한 건물에서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짐), 활기찬 상업가로(걷기 좋은 거리) 등은 자동차 중심, 기능 분리형 현대 도시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뤼벡의 콤팩트한 도시 구조는 탄소 배출을 줄이고 지속가능한 도시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상인주택의 유산은 뤼벡 건축의 핵심 특징이다. 디엘렌하우스(Dielenhaus)라 불리는 전형적인 한자 상인주택은 전면이 좁고 깊이가 긴 구조로, 거리에 면한 1층은 상점이나 사무실로, 위층은 주거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주택 중앙에 위치한 대형 홀(Diele)은 상품 보관과 거래가 이루어지는 핵심 공간이었으며, 뒤쪽으로는 창고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직주통합과 효율적 공간 활용의 훌륭한 사례다. 뤼벡의 고급 상인주택들은 화려한 박공벽(Gable)과 벽돌 장식으로 소유주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면서도, 기능적 요구를 완벽히 충족시켰다.
골목길과 중정은 뤼벡 도시 조직의 또 다른 특징이다. 주요 상업 가로에서 뻗어나간 작은 골목길(Gänge)은 도시의 모세혈관 같은 역할을 하며, 내부 블록으로의 접근성을 높인다. 이 골목길을 따라 발달한 중정(Höfe)은 반공적 공간으로, 공동체 생활의 중심지였다. '간게쾨르퍼샤프튼(Gangkörperschaften)'이라 불리는 작은 주택 단지들은 공동의 우물, 정원, 세탁 공간을 공유하며 소규모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이러한 미세한 도시 조직은 현대의 슈퍼블록과 달리, 인간 척도의 걷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냈다. 오늘날 이 골목길과 중정들은 주택, 소규모 상점, 공방, 카페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며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한자도시 뤼벡은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도시가 어떻게 상업과 공동체, 자율성과 국제성이라는 가치를 건축과 일상 속에 새겨왔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사례다. 오늘날 지역성과 세계성이 충돌하는 도시정책의 갈림길에서, 뤼벡은 그 오래된 미래를 조용히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