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정체성: 절제의 미학

by 골목길 경제학자

베를린 정체성: 절제의 미학


나는 베를린을 좋아한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도시의 재건 역사다. 재건의 원인이 무엇이든, 도시를 새롭게 다시 만들어낸 그 과정 자체에 깊은 매력을 느낀다. 전후 급박한 재건 과정에서 베를린은 다른 유럽 도시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이 도시에는 고풍스러운 연속성도, 과시적인 장식도, 전통적 미학도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베를린의 거리는 솔직하게 투박하고, 건축물은 명료하게 기능적이며, 도시 중심부는 낮고 소박한 스카이라인을 유지한다.


유럽의 다른 수도들은 각자의 역사적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파리는 역사적 연속성과 예술적 과시가 도시 전체에 스며있고, 로마는 고대 제국과 교황청의 화려함이 여러 층위로 겹쳐진 도시다. 프라하는 중세의 모습이 마치 동화처럼 보존되어 있으며, 런던은 금융 중심지, 왕실의 권위, 산업혁명의 흔적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이런 도시들과 달리, 베를린은 단절과 재시작의 도시다.


베를린의 특이한 도시 풍경은 흔히 '전쟁 파괴의 결과'로만 설명된다. 이는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베를린은 연합군의 대규모 폭격과 1945년 소련군의 지상 총공세로 도심 전체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특히 미테(Mitte),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프리드리히스하인(Friedrichshain) 같은 중심 지역은 거의 완전한 폐허가 되었고, 역사적 기념물과 공공건물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전쟁 직후 베를린은 일상적 도시 기능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베를린 어반스케이프의 진정한 특이점은 단순한 재건의 필요성을 넘어선다. 흥미로운 것은 베를린이 다른 전후 도시들처럼 과거의 모습을 '복원'하는 대신,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무전통(anti-tradition)'의 실험성,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새롭게 '재창조(reinvention)'하는 담대함, 때로는 고통스러운 기억에 대한 의도적인 '거부(rejection of memory)'의 성격 등 재건의 접근법을 다양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 츠바이크는 이미 19세기말의 베를린을 "어떠한 참된 전통도 또 그리고 수백 년의 옛 문화도 존재하지 않은다는 사실이 젊은이들을 새로운 시도로 유혹하는" 도시로 표현했다.


그러나 나는 베를린의 건축 정체성을 표현하는 단어로서 '절제(restraint)'라는 개념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베를린의 절제는 단순히 폐허 이후의 실용적 선택이 아니라, 폐허 이전부터 존재했던 문화적 기질과 종교적 윤리, 그리고 과잉의 역사에 대한 의식적인 윤리적 거리 두기의 결과물이다.


독일의 도시 계획과 건축은 오래전부터 표면적 아름다움보다는 내재적 기능성, 화려한 장식보다는 목적에 충실한 실용성을 우선시해 왔다. 이런 태도는 독일어로 '작실리히카이트(Sachlichkeit)' 또는 '쯔베크메씨히카이트(Zweckmäßigkeit)'로 표현되며, 각각 '사물 그 자체의 본질', '목적에 적합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개념들은 단순한 미적 취향이나 스타일을 넘어,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윤리적 기반이 되었으며, 독일 사회와 도시 문화 전반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민족성과 질서: 독일적 미학의 기반

독일 문화는 라틴적 미학이나 앵글로색슨의 실용성과는 다른 고유한 심층을 가진다. 중앙집권이 약하고 수많은 영방국가로 구성된 신성로마제국의 유산 속에서 독일은 '형식'과 '질서'를 통해 통합을 추구하는 전통을 발전시켜 왔다.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한 통일 이전까지 독일은 300개 이상의 소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이런 분절된 역사는 역설적으로 '독일성(Deutschtum)'에 대한 집착과 '질서(Ordnung)'를 통한 통합의 갈망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민족적 기질은 특히 건축, 도시계획, 산업 디자인 등 공간의 조직 방식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정렬성과 비례감각, 군더더기 없는 조형, 기능에 기반한 구조 설계는 단지 미적 취향이 아니라 삶을 조직화하려는 문화적 태도의 표현이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발전한 독일 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과 베를린 분리파(Berliner Secession)는 이러한 태도를 산업사회의 맥락에서 재해석했다. 특히 헤르만 무테지우스(Hermann Muthesius)는 "양식이 아닌 유형(Typisierung, 표준화)"을 통해 건축과 디자인이 사회적 질서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르만 낭만주의의 정서 역시 외향적 장식보다 숲, 어둠, 깊이, 조화, 통제 같은 이미지와 친숙했으며, 이는 단순히 미학의 취향을 넘어서 '사물과 자기 자신을 조직적으로 다스리는 삶의 태도'로서의 미학, 곧 질서지향적 민족성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조는 베를린 도시 설계에서도 중요한 원칙으로 작용했다. 19세기 초 레노(Peter Joseph Lenné)와 싱켈(Karl Friedrich Schinkel)이 설계한 베를린의 공원들—티어가르텐(Tiergarten), 클라인글리니케(Glienicke), 프리드리히스하인(Friedrichshain)—은 자연을 그대로 두는 영국식 풍경식 정원이 아니라, 자연과 문화의 중간지대로서 '조절된 자연(regulierte Natur)'을 구현했다.


프로테스탄티즘과 절제의 윤리

베를린은 카톨릭보다 루터교 전통이 뿌리 깊은 도시다. 16세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Joachim II)가 1539년 루터의 종교개혁을 수용한 이후, 베를린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루터의 개신교는 형식적 경배보다 내면의 신앙, 장식보다 본질, 쾌락보다 절제, 영혼보다 양심을 강조했다. 그의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원칙은 중세 카톨릭의 화려한 의례와 성상 숭배를 거부하고, 개인의 직접적인 신앙 체험과 성서 해석을 중시했다.


그 결과 종교개혁 이후 독일은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노동을 신성시하고 일상의 실용성을 숭배하는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는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지역에서 특히 강했는데, 척박한 자연환경과 빈번한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프로테스탄트적 근면함(protestantischer Fleiß)은 생존 전략이자 도덕적 미덕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ederick William I, 1713-1740)의 통치 시기에 형성된 '프로이센적 덕목(preußische Tugenden)'—의무충실(Pflichtbewusstsein), 검소함(Sparsamkeit), 청렴(Redlichkeit), 규율(Disziplin)—은 루터교의 윤리를 세속적 통치 원리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교회 건축에서도 성상이나 스테인드글라스보다는 공간의 명료성과 음향의 효과, 설교의 청취에 최적화된 구조가 강조되었고, 바로크적 화려함보다는 은밀한 빛과 구조적 안정성을 통해 신을 느끼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베를린의 대표적 루터교 교회인 성 마리엔 교회(St. Marienkirche)와 도름(Berliner Dom)은 카톨릭 성당의 화려한 장식이나 초월적 수직성과는 달리, 균형 잡힌 비례와 '말씀의 집(Haus des Wortes)'으로서의 기능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정신은 20세기 초 바우하우스 운동으로 현대화된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거나 '장식은 범죄다'라는 구호는 사실상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건축적 번역이었다. 바우하우스 창립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는 루터파 목사의 아들로, 그의 미학 이론에는 프로테스탄트적 절제와 합리성이 깊이 스며있었다. 그는 "불필요한 것을 배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원칙을 강조했는데, 이는 루터의 "신앙은 장식이 아니라 본질에 있다"는 가르침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의 유명한 격언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Less is More)"는 프로테스탄트적 검소함의 모더니즘적 재해석이었다. 바우하우스는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도덕적 태도로서의 절제미였으며, 절제는 미학이기 이전에 신념이었고, 그 신념이 도시를 형성했다.


과잉의 역사, 절제의 전환

베를린은 단지 절제된 도시가 아니라, 반복된 과잉의 기억 위에 세워진 절제의 도시다. 프리드리히 대왕, 비스마르크, 히틀러, 스탈린에 이르기까지 베를린은 권력의 중심이자 과시의 실험장이었다.


18세기 프로이센을 이끈 프리드리히 2세는 계몽군주로 불리지만, 도시와 사회 전반에 군사적 질서와 통제된 미학을 이식했다. 궁정, 관청, 공원은 모두 기하학과 질서의 힘을 시각화하는 방식으로 배치되었고, 공공건축은 국민 계몽과 군사조직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이는 이후 독일 도시계획의 형식주의적 전통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후반, 비스마르크는 '철혈정책'을 통해 독일을 통일하면서 권위주의적 질서와 행정국가의 상징으로서의 도시계획을 강화했다. 베를린의 황궁, 관공서, 철도망은 이 시기에 대규모로 구축되었고, 도시는 국가기계의 효율성과 권력의 상징성을 동시에 표현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 과시적 기능주의는 이후 제2제국과 나치 시대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계승된다.


히틀러와 알베르트 슈페어는 베를린을 '세계수도 게르마니아'로 재편하고자 했다. 계획된 도시 구조는 권력의 상징화, 거대성과 위압감, 통제된 동선을 핵심으로 삼았으며, 건축은 전체주의 미학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후 베를린은 이러한 기억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기념의 공간을 절제된 건축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대표적 사례인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은 대리석이나 조각상이 아닌, 무표정한 콘크리트 블록의 반복을 통해 침묵과 반성을 구현하고 있다.


1949년 동독 수립 이후, 동베를린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건축의 실험장이 되었다. 카를마르크스알레는 노동계급을 위한 거리라면서도, 실제로는 체제의 위엄을 시각화한 스탈린 양식의 기념비적 거리였다. 베를린은 이 시기를 지나며 건축의 정치적 도구화, 미학의 선전화, 권력의 형식주의를 경험했고, 이는 절제된 도시 설계에 대한 반작용을 낳았다.


절제의 미학, 현장에서 읽다: 한세비에텔, 다렘, 크로이츠베르크

베를린의 절제된 어반스케이프는 책이나 도면이 아니라 거리와 건물, 골목과 풍경 속에서 더 또렷하게 체험된다. 실제로 도시를 걸으며 관찰한 세 지역—한세비에텔, 다렘, 크로이츠베르크—은 서로 다른 역사와 계층, 문화적 성격을 지니면서도 절제된 구성, 기능적 공간, 기억의 거리 두기라는 공통된 미학을 보여준다.




1957년 서베를린에서 열린 국제건축전시 '인터바우'의 핵심 구역이었던 한세비에텔은 전후 재건의 실험장이자 바우하우스 정신의 현대적 구현이었다. 전 세계 건축가들이 참여해 장식 없는 주거 단지와 도시 구성을 실험했으며, 이는 절제된 민주주의 도시의 이상형을 보여주는 공간이 되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복원'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도시 질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지역은 절제된 모더니즘 건축의 상징으로 평가된다.



베를린 남서부의 다렘은 왕립 박물관과 대학, 연구소가 밀집한 전통적 교양지대다. 그러나 베를린의 대표적인 부촌임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주택가와 상업 공간은 유럽 귀족 도시와 같은 과시적 건축이 아닌, 벽돌과 목재, 슬레이트 지붕, 낮은 울타리로 구성된 조용하고 단정한 풍경으로 구성된다. 자연에 열려 있으면서도 절도 있는 공간 배치는 교양 있는 부르주아적 절제의 공간 미학을 드러낸다. 다렘은 베를린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소로, 절제는 빈곤의 결과가 아니라 안정성과 교양을 표현하는 삶의 방식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한때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로 불렸던 크로이츠베르크는 오늘날에도 베를린에서 가장 혼성적이고 실험적인 동네다. 그러나 이곳의 실험은 형태의 과잉이 아니라, 오히려 형식의 해체를 통한 절제된 표현에 가깝다. 재개발 대신 덧댐과 조립, 리사이클된 재료, 벽화와 비어 있는 공간의 활용은 이 지역이 미완성과 비어 있음의 힘을 아는 동네임을 보여준다. 젊은 예술가와 이민자, 대안적 커뮤니티가 서로 충돌하고 뒤섞이는 과정에서 조화는 절제된 질서 속의 자율성이라는 베를린적 가치와 맞닿아 있다.


결론: 절제의 지속가능성

베를린의 어반스케이프는 단순히 전후 재건이나 기능주의 디자인의 결과가 아니라, 독일적 질서와 신교적 절제, 그리고 과잉의 역사에 대한 윤리적 반성의 결과다. 베를린은 절제된 도시가 되기를 선택했으며, 이 절제는 역사를 정직하게 마주하기 위한 최소한의 형식으로, 도시의 침묵 자체가 가장 강한 표현이 된다. 캠프너(Kampfner)는 베를린의 절제성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베를린은 끊임없이 해체되고 다시 조립되는 도시다. 역사적 단절 위에 새로운 시대가 또다시 얹힌다.”


그러나 베를린은 역사적으로 과잉과 절제 사이의 진자 운동을 반복해 왔다. 1989년 장벽 붕괴 이후 난민과 이민자를 수용하면서도 2010년대 후반부터 이에 대한 반작용이 AfD 같은 극우 정당의 성장으로 나타났다. 베를린의 절제미는 단순한 스타일이 아닌 윤리적 선택으로, 권력의 과시를 거부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방식이다. 이 도시가 미래의 도전 속에서 절제와 과잉 사이의 창조적 긴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참고문헌

슈테판 츠바이크. 어제의 세계. 지식공작소, 1944(2001).

Kampfner, John. In Search of Berlin. London: Atlantic Books,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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