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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도시의 비극: 제5화 시청사

by 골목길 경제학자

한국 도시의 비극: 제5화 시청사


1. 도입부: 왜 시청사는 도시를 살리지 못하는가?

시청사는 도시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다. 시민들의 일상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행정 서비스의 중심지로서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공공 공간이다. 또한 시청사는 도시의 상징성과 정체성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기능하며, 주변 지역의 상권과 도시 활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핵심 시설이다.


서구의 도시들에서 시청사는 역사적으로 도시 중심부에 위치하며 도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기능해 왔다. 파리의 오텔 드 빌, 런던의 시청사, 브뤼셀의 시청사 등은 단순한 행정 건물을 넘어 도시의 문화적 랜드마크이자 시민들의 일상적 만남의 장소로 자리 잡았다. 이들 시청사 주변은 자연스럽게 도시의 가장 활력 있는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상업과 문화, 시민 활동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도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시청사는 다르다. 1990년대 이후 전국 각지에서 시청사의 이전과 신축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정작 새로운 시청사 주변은 도시의 활력 있는 중심지로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대한 예산을 투입해 최신 설비를 갖춘 현대적 청사를 건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사는 주변 상권 활성화와 도시 재생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시청사 이전으로 인해 기존 원도심이 공동화되면서 도시 전체의 활력이 오히려 감소하는 현상이다. 왜 한국의 시청사는 도시를 살리지 못하는 것일까?



2. 부산시청사 사례: 연산동 이전의 한계

부산시청사는 이 역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1998년 부산광역시는 중구 중앙동에 있던 구 청사를 연제구 연산동으로 이전했다. 식민지 잔재 청산과 광역시에 걸맞은 규모의 청사 건립이라는 명분으로 추진된 이 사업은 연면적 11만 7,258㎡, 지하 3층 지상 28층 규모의 대규모 청사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산동으로의 시청 이전은 예상과 달리 도시 활성화에 한계를 보였다. 시청 이전 초기 일시적 활성화를 경험했던 연산동 상권은 시간이 지나면서 지속적으로 쇠퇴하고 있다. 2022년 기준 연산교차로 반경 1.5km 음식·숙박 업소 수는 전년 대비 27% 감소했다. 시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산동은 고립된 업무 지구로 남았을 뿐 주변 지역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원도심인 중구 일대가 시청사 이전으로 인해 급격한 공동화를 경험했다는 점이다. 부산의 진정한 중심지였던 광복동, 남포동 일대는 시청사라는 핵심 앵커를 잃으면서 상권과 문화적 활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결과적으로 부산은 명확한 도심 없이 기능이 분산된 도시 구조를 갖게 되었고, 이는 서울과의 문화적 격차를 더욱 벌어지게 만든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3. 부산시청사가 예외인가? 전국 시청사 이전의 공통된 비극

부산시청사의 사례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한국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1990년대 이후 전국 각지에서 추진된 시청사 이전과 신축 사업들은 도시 활성화보다는 오히려 도시의 공동화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시청사 이전이 원도심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시청사는 도시의 핵심 앵커 시설로서 주변 상권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시청사가 이전하면서 원도심에서 공무원, 민원인, 관련 업체 종사자들의 유동인구가 대폭 감소했고, 이는 주변 상권의 직접적인 타격으로 이어졌다. 특히 오랜 기간 시청사 주변에 형성된 법무사, 행정사, 음식점, 카페 등의 생태계가 한순간에 무너지면서 원도심 전체의 활력이 급격히 저하되었다.


둘째, 새로운 시청사 지역은 계획적 개발의 한계를 드러냈다. 대부분의 새로운 시청사는 신도시나 개발지구에 건설되어 주변에 충분한 상업·문화 인프라가 부족했다. 시청사 자체는 현대적이고 효율적으로 건설되었지만, 주변 지역은 공무원들이 업무 시간에만 머무르는 '9 to 6' 공간으로 제한되었다. 업무시간 외에는 인적이 드문 정부청사 지구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셋째, 도시의 중심성과 접근성이 저하되었다. 많은 시청사가 교통 접근성이나 도시 중심성보다는 부지 확보의 용이성을 우선시하여 위치를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접근성이 떨어지고, 도시 내 다른 중요 시설들과의 연계성도 약화되었다. 이는 시청사의 본래 기능인 시민 서비스 제공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4. 서울시청사 해결책 - 원위치 재건축의 성공

이러한 문제를 피해 간 대표적 성공 사례는 서울시청 사다. 서울시는 1980년 박영수 시장이 서초동 이전을 제안한 이후 오랜 논란을 거쳐, 최종적으로 원위치 재건축을 선택했다. 이 결정 과정에는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다.


1980년 박영수 서울시장이 서초동으로의 청사 이전을 결정한 이후, 서울시청사 이전 문제는 수십 년간 지속된 논란거리였다. 1987년 염보현 시장과 1995년 최병렬 시장은 각각 현재 자리에서의 재건축을 결정했지만, 1995년 조순 시장이 첫 민선 시장으로 당선된 후 다시 이전론이 대두되었다. 조순 시장은 100인의 시민위원회까지 구성해 용산 이전을 결정하고, 녹사평역 인근 부지에 180m 높이의 통합청사 건설 계획을 완성했다. 녹사평역의 거대한 규모도 이때 계획된 기간 교통망 정비의 결과물이다. 후임인 고건 시장 역시 용산 이전을 지지했다.


그러나 2002년 이명박 시장이 이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곳을 위해 몇 조씩 들이는 건 좋지 않다"는 실용주의적 접근과 함께, 시청 이전에 따른 이해관계자들 간의 갈등 문제를 고려해 원위치 재건축을 결정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오세훈 후보가 현 부지 재건축을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되면서 20여 년간 지속된 시청사 이전 논란은 완전히 종지부를 찍었다.


서울시청사의 원위치 재건축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기존의 도시 중심성과 접근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청사의 기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명동, 을지로, 종로 등 서울 원도심의 상권과 문화적 생태계를 보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시청 주변의 법무사, 행정사 사무실부터 오랜 전통을 가진 음식점, 카페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도시의 연속성이 보장되었다.


또한 서울시는 제2청사, 제3청사를 시청 인근에 분산 배치하는 방식으로 행정 공간을 확충했다. 이는 원도심 전체에 공무원과 민원인의 유동인구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면서 주변 상권의 안정적 기반을 제공했다. 서울시청 주변은 여전히 서울의 핵심 비즈니스 지구이자 관광 명소로 기능하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 활동과 시민 참여의 중심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5. 건축 주도 크리에이터 타운이 답이다

부산시청사와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대안적 접근은 무엇일까? 필자는 부산시청사의 원도심 복귀를 통한 크리에이터 타운 조성을 제안한다.


부산시청사는 연산동에서 원도심으로 복귀해야 한다. 광복동, 남포동, 영도로 이어지는 부산의 역사적 중심축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앵커 역할을 해야 한다. 부산의 진정한 정체성은 동래에서 시작해 영도에 이르는 원구도심 라인에 있다. 이 라인을 중심으로 도시를 재구성할 때 부산은 다시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시청사의 원도심 복귀는 단순한 이전이 아니라 부산이 그동안 서울에 뒤졌던 원도심 건축마을의 복원과 직결된다. 서울과 부산 원구도심의 결정적 차이는 1990년대 원구도심 보존 여부에 있었다. 서울이 북촌, 서촌, 을지로, 성수동 등 다양한 원구도심 건축마을을 보존해 2000년대 이후 문화적 재생의 토대로 활용한 반면, 부산은 대부분의 원구도심이 재개발로 사라졌다. 시청사의 원도심 복귀는 이 잃어버린 건축마을을 되찾는 첫 번째 단계다.


구체적으로 시청사는 광복동이나 남포동 일대로 복귀하되, 기존 건물들을 활용한 분산형 청사 구조를 고려할 수 있다. 하나의 거대한 청사보다는 여러 건물에 분산 배치된 청사가 도시 조직과 더 유기적으로 결합할 수 있다. 이는 원도심 전체에 공무원과 민원인의 유동인구를 고르게 분산시켜 상권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연산동의 기존 시청사는 이 지역의 새로운 성격에 맞는 시설로 전환되어야 한다. 연산동과 양정동은 이미 9,000여 세대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주거 중심 지역으로 자리 잡았다. 거대한 시청사 건물은 이 주거 지역을 지원하는 도서관, 대학 캠퍼스, 문화센터, 평생교육원 등의 근린 시설로 전환될 수 있다. 이는 연산동을 단순한 베드타운이 아닌 교육과 문화가 있는 품격 있는 주거지역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크리에이터 타운은 시청사를 중심으로 하되, 대기업 자본이 아닌 개인 창작자들의 집적과 협업이 공간과 문화를 형성하는 도시 모델이다. 부산 원도심의 광복동, 남포동, 영도는 이러한 크리에이터 타운이 형성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부산항의 해양 문화, 국제시장의 상업 전통, 영도의 조선업 유산 등 지역 자원을 활용한 콘텐츠 제작과 생산을 지원하는 메이커스페이스를 구축해야 한다. 이 공간은 단순한 작업 공간을 넘어, 교육, 네트워킹, 마케팅, 판매까지 통합적으로 지원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해야 한다. 해양 문화 디자인, 수산물 가공 및 요리, 패션 및 공예, 디지털 콘텐츠 등 부산의 특색을 살린 다양한 콘텐츠 개발이 가능하다.


원도심 콘텐츠는 지역 자원을 활용한 로컬 콘텐츠뿐 아니라, 커피, 베이커리, 독립서점, 게스트하우스, 복합문화공간 등 글로벌 콘텐츠와, 공유 주거 및 공유 오피스와 같은 직주락 콘텐츠를 함께 포함해야 한다.


특히 부산은 부산국제영화제, 부산비엔날레 등 국제적 문화 행사의 전통을 가지고 있어 이를 연중 지속되는 문화 생태계로 발전시킬 잠재력이 크다. 부산국제영화제 역시 해운대 센텀시티가 아닌 광복동 원도심으로 복귀해야 한다. 영화제가 원도심에서 개최될 때 진정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광복동 일대의 기존 극장과 상가, 골목길이 자연스럽게 영화제 공간으로 활용되면서 영화제 기간뿐만 아니라 연중 지속되는 영화 문화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 영화, 현대미술, 디자인,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창작자들이 모여 작업하고 협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면, 부산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문화 창작 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부산시청사가 진정한 도시의 심장이자 활력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연산동의 고립된 행정타운이 아니라, 원도심을 기반으로 한 크리에이터 타운 조성이 필요하다. 건축이 주도하는 크리에이터 타운 조성은 단순히 경제적 활성화를 넘어, 부산이라는 도시의 정체성과 문화적 가치를 재발견하고 강화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동래에서 영도까지 이어지는 부산의 원구도심 라인은 한국 근현대사의 축약이자 해양문화의 보고다. 이 라인을 중심으로 시청사가 복귀하고 크리에이터 타운이 조성될 때, 부산은 다시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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