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은 한국 도시의 또 다른 역설적 공간이다. 도시의 랜드마크이자 상권의 중심지로 여겨지지만, 정작 주변 상권과 도시 전체의 활성화에는 기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거대한 상업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백화점은 섬처럼 고립되어 주변 지역과의 유기적 연결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서구 도시에서 백화점은 도시 중심가의 활력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런던의 해로즈, 파리의 갤러리 라파예트, 뉴욕의 메이시스는 단순한 쇼핑 공간을 넘어 도시 문화의 허브로 기능했다. 이들 백화점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상점과 카페, 문화 공간이 형성되어 도시의 활력 있는 중심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한국의 백화점은 다르다. 화려한 외관과 풍부한 상품을 자랑하지만, 정작 주변 상권은 침체되어 있고 도시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하지 못한다. 특히 수도 서울의 중심 상권인 명동에서조차 롯데백화점이라는 거대한 앵커 시설을 두고도 지역 전체는 반복적인 위기에 빠져있다. 왜 한국의 백화점은 도시를 살리지 못하는 것일까?
명동 롯데백화점은 이 역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서울의 대표적인 중심 상권인 명동에 위치한 롯데백화점은 수십 년간 이 지역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기능해왔다. 하루에도 수만 명의 고객이 드나드는 거대한 상업 시설이며, 신세계백화점과 함께 명동 상권의 핵심 앵커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동 상권은 오랜 침체를 겪어왔다. 코로나19 이전부터 시작된 공실률 증가와 매출 감소는 팬데믹을 거치며 더욱 심화되었다. 2021년 나이키 서울 명동, 2022년 애플스토어 명동 오픈에 이어, 2022년 하반기부터 외국인 관광객 유입이 본격화되면서 2023년 들어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외국인이 아닌 서울 시민이 찾는 프리미어 상권의 지위를 회복해야 온전히 부활했다 할 수 있다.
명동의 구조적 문제는 명확하다. 롯데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이라는 강력한 집객 시설이 존재하지만, 이들과 주변 가로 상권 사이의 연결성이 부족하다. 남대문로 8차선 대로가 백화점과 명동길을 물리적으로 분리하고 있으며, 열악한 보행 환경으로 인해 백화점 고객들이 자연스럽게 골목상권으로 이동하지 못한다. 또한 외국인 관광객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업종 구성으로 인해 내국인들에게는 매력적이지 않은 상권이 되어버렸다.
세계 어느 선진국이 수도 중심부의 공동화를 방치할까? 명동의 위기는 단순한 지역 문제가 아니라 국가 자존심의 문제다. 수도의 중심 상권을 살리지 못하는 나라가 앞으로 닥칠 복합 위기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명동의 사례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한국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서울 잠실, 여의도, 신촌, 부산 센텀시티, 대구 동대구역 등 전국 대부분의 백화점 중심 상권은 백화점 자체의 집객력과 무관하게 주변 지역 활성화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 도시 계획 측면에서 백화점과 주변 상권의 분절이 가장 큰 문제다. 대부분의 한국 백화점은 대로변에 위치하여 주변 가로 상권과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백화점 앞 넓은 도로는 보행 접근성을 저해하고, 백화점 내부 고객들이 주변 상권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것을 방해한다.
둘째, 백화점의 단지형 구조가 문제다. 백화점들은 자동차 고객을 위한 대형 주차장과 주차장 직통 입구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보행자와 주변 상권과의 연결을 차단한다. 이러한 단지형 구조는 백화점 내부에서 완결적인 쇼핑 환경을 제공하려는 폐쇄적 경영 방식과 결합되어, 고객들이 백화점 밖으로 나갈 필요성을 줄인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백화점을 방문해도 주변 상권에는 긍정적 효과가 전달되지 않는다.
셋째, 백화점 중심의 개발 방식이 주변 소상공인들의 성장을 저해한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백화점은 임대료 상승을 유발하고, 소규모 창의적 업체들의 진입 장벽을 높인다. 또한 백화점 내부에 입점하지 못한 지역 업체들은 고객을 잃어버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명동 활성화를 위해 지금까지 다양한 해결책들이 제안되어 왔다. 보행환경 개선 사업으로 명동길을 완전 보행자 전용 구역으로 확대하고, 남대문로와 을지로의 보행 접근성 개선을 통해 광화문과의 연결성을 강화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또한 명동을 단순한 쇼핑 지구가 아닌 문화와 쇼핑이 결합된 복합 문화 지구로 발전시키기 위해 소규모 공연장, 전시 공간, 체험형 문화 시설 등의 도입이 제안되었다.
업종 다양화를 통해 화장품과 패션 위주의 단조로운 구성을 개선하고, 푸드코트, 서점, 라이프스타일 매장 등을 유치하여 내국인 고객의 방문 동기를 높이자는 방안도 논의되었다. 아울러 명동의 높은 임대료가 소상공인의 진입을 막고 프랜차이즈만 남게 만든다는 문제 인식하에, 상가임대차보호법 강화나 지역 상품권 발행 등을 통한 임대료 부담 완화 방안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책들은 모두 미봉책적 성격이 강했다. 지역 상품권 발행을 통한 단기 소비 진작, 유휴 공간을 활용한 청년 창업 지원, 임대료 조정 등은 단기적 효과는 있을지 모르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아무도 기존 재생 방식으로 명동 난제를 해결할 것으로 믿지 않는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대규모 재개발이 오히려 기존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더 큰 상업 시설은 더 높은 임대료를 의미하고, 이는 소상공인들을 더욱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한 획일화된 대형 상업 시설은 지역의 고유한 특성과 정체성을 희석시켜, 장기적으로는 상권의 매력도를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명동 재생을 위해서는 서울시와 중앙정부가 참여하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새로운 정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서울 비전 2030' 계획이나 용산 개발 계획과 연계하여 추진하면 된다. 문제는 접근 방식이다.
명동과 한국 백화점 중심 상권의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성공적인 해외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도쿄의 기치조지는 백화점과 골목상권이 성공적으로 공존하는 모델을 보여준다.
기치조지는 도쿄 시민들이 살고 싶어하는 동네로 자주 선정되는 곳이다. 이 지역의 가장 큰 특징은 대형 백화점(도큐, 마루이, 파르코)과 전통적인 골목상권(하모니카 요코초, 선로드, 나카미치)이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점이다.
기치조지에서 백화점과 골목상권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공간 구조의 차이다. 기치조지 백화점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담장이 없다는 점이다. 도큐, 마루이, 파르코 등 대형 백화점들은 주변 골목길과 직접 연결되어 있어 고객들이 백화점을 나와 자연스럽게 골목상권으로 이동할 수 있다. 또한 역에서 나와 백화점이나 대형 쇼핑몰로 가려면 반드시 전통 상점가를 지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는 법적 규제가 아니라 도시 전체가 다양성의 중요성에 공감한 결과다.
둘째, 강력한 공동체 문화다. 일본 전통의 무라(村) 정신에 기반한 상인회는 대형 업체와 소형 업체 간의 자율적 상생 협약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대형마트는 전통시장이 선점한 신선 식품을 판매하지 않는 방식으로 분업한다.
셋째, 안정적인 임대 시장이다. 기치조지의 대지주는 사찰로, 비영리적 특성으로 인해 임대료 급상승이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1991년 이후 지속된 일본의 부동산 침체는 구조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을 억제하는 환경을 만들었다.
넷째, 주민들의 적극적 참여다. 기치조지 주민들은 지역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 유흥업소 입지를 저지하는 등 지역 정체성 보호에 적극적이다.
명동을 비롯한 한국 백화점 중심 상권의 재생을 위해서는 기치조지 모델을 참고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핵심은 백화점을 고립된 섬이 아니라 지역 전체 상권의 일부로 통합하는 것이다.
백화점 단절 극복을 위한 구체적 방안
첫째, 남대문로 차로 축소와 보행환경 개선이다. 현재 남대문로는 신세계백화점, 롯데백화점과 명동 가로상권을 물리적으로 분리하는 장벽 역할을 하고 있다. 남대문로의 차로를 현재 8차로에서 4차로로 축소하고, 그 공간을 보행로와 광장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백화점 고객들이 자연스럽게 명동 골목상권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보다 많은 건널목 건설이다. 현재 명동 지역의 횡단보도는 턱없이 부족하다. 남대문로, 을지로, 퇴계로 등 주요 도로에 50미터마다 횡단보도를 설치하여 보행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해야 한다. 특히 롯데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에서 명동길로 바로 연결되는 횡단보도를 추가 설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명동지하상가와 회현동지하상가의 역할 재조정이다. 현재 지하상가들은 지상 상권과 경쟁 관계에 있어 상권 분산 효과를 내고 있다. 지하상가는 교통 연결 기능에 집중하고, 상업 기능은 지상으로 이전하여 명동길과 골목상권의 활성화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지하상가 공간은 문화 전시, 공연, 휴게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넷째, 백화점의 단지화 저지다. 신세계와 롯데가 주변 부지를 매입하여 거대한 상업 단지를 조성하려는 시도를 막아야 한다. 대신 백화점 주변의 소규모 필지들은 독립적인 상업 공간으로 유지하되, 백화점과의 연결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발해야 한다. 기치조지처럼 백화점에 담장을 없애고 주변 골목길과 직접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리적 연결성 강화 방안
다섯째, 광화문과의 보행 접근성 제고다. 현재 광화문과 명동은 한 동네가 아니다. 남대문로, 을지로 등 연결 도로의 보행 환경이 열악하고, 롯데타운, 은행 본사 단지 등 대단지가 보행 흐름을 방해한다. 남대문로를 보행친화적 대로로 재정비하고, 을지로에는 문화가로 조성을 통해 광화문-명동 간 도보 이동을 활성화해야 한다.
여섯째, 동대문 DDP와의 연결성 강화다. 동대문 DDP와 명동을 연결하는 2차선 마른내길을 쾌적한 문화가로로 재생하여 두 지역 간 도보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 이를 통해 명동-DDP-광화문을 잇는 원도심 문화벨트를 조성할 수 있다.
문화 콘텐츠와 상생 협약
셋째, 문화 콘텐츠 강화다. 최근 피크닉, 페이지 명동, 로컬스티치 회현 등 민간 재생 사업자들이 명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명동 재미로'와 같은 콘텐츠 중심 거리 조성도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민간의 창의적 활동을 지원하고 확산시켜야 한다.
넷째, 상생 협약 체계 구축이다. 신세계와 롯데 같은 대기업과 지역 소상공인 간의 상생 협약을 통해 기치조지식 분업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백화점은 고급 상품과 서비스에 집중하고, 골목상권은 개성 있는 로컬 콘텐츠를 담당하는 방식이다.
다섯째, 직주락센터 조성이다. 명동 재생의 장기적 목표는 상업시설과 오피스뿐만 아니라 주거 기능까지 포함한 복합 지구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회현동, 남산동 등 배후 지역의 재개발을 통해 상주인구를 늘리고, 관광객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명동이 백화점과 골목상권이 상생하는 크리에이터 타운으로 재탄생한다면, 이는 단순히 경제적 활성화를 넘어 서울이라는 도시의 정체성과 문화적 가치를 재발견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수도의 중심 상권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동시에 지역 고유의 매력을 지닌 공간으로 발전할 때, 비로소 한국 도시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