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문화지구는 모순적 공간이다. 문화 창작과 향유의 중심지가 되어야 할 공간이면서도, 정작 그곳에서는 살아있는 문화가 창출되지 않는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정한 문화지구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그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구의 문화지구들은 역사적으로 도시의 창의적 활력을 대변해 왔다. 런던의 소호, 파리의 몽마르트르,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 등은 예술가와 창작자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공간으로 발전했다. 이들 지역은 정부의 지정 없이도 창의적 에너지의 집적을 통해 도시 문화의 트렌드를 선도하며, 전 세계 젊은이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공식 문화지구는 다르다.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지정하고 예산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 창작의 허브로 기능하지 못한다. 전국에 단 6곳뿐인 공식 문화지구는 서울 3곳(인사동, 대학로, 서초음악문화지구), 지방 3곳(파주 헤이리, 인천 개항장, 제주 저지예술인마을)에 불과하다. 이 중 시민들이 인지하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2018년 지정된 서초음악문화지구를 아는 서울 시민을 찾기 어려운 현실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왜 한국의 문화지구는 문화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일까?
서초음악문화지구는 이 역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예술의 전당을 중심으로 한 서초동 일대는 국내 최고 수준의 클래식 음악 인프라를 자랑한다. 콘서트홀, 오페라하우스, 리사이틀홀 등 세계적 수준의 공연장이 집적되어 있고, 연간 수백 편의 고품격 공연이 열린다. 국립국악원, 서울아트센터 등 국가급 문화시설도 인근에 위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초음악문화지구는 진정한 의미의 문화지구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물리적 단절이다. 예술의 전당과 주변 지역 사이에는 8차선의 남부순환로가 가로막고 있어, 문화시설과 배후 상권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이 차단되어 있다.
문화 생태계의 부재는 더욱 심각한 문제다. 예술의 전당에서는 세계적인 공연이 열리지만, 그 주변에는 음악가들이 일상적으로 모이고 교류하는 공간이 없다. 음악 관련 소상공인이나 스타트업의 집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은 곧바로 떠나고, 지역은 다시 조용해진다. 문화시설은 있지만 문화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생태계는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서초음악문화지구의 역사를 살펴보면 현재 문제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 1980년대 예술의 전당이 건립될 당시부터 이 지역은 '문화 섬'으로 계획되었다. 주변 도시 조직과 분리된 채 거대한 문화시설만 들어선 구조였다. 특히 남부순환로의 확장은 이러한 단절을 더욱 심화시켰다. 결과적으로 예술의 전당은 한국 클래식 음악의 메카가 되었지만, 주변 지역의 문화적 활성화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서초음악문화지구의 사례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한국의 공식 문화지구가 공통적으로 직면한 구조적 문제를 보여준다. 전국 6곳의 공식 문화지구 대부분이 시설은 있지만 생태계는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첫째, 문화지구 법제도 자체의 구조적 모순이 가장 큰 문제다. 현행 「지역문화진흥법」에 따른 문화지구는 예술가와 문화예술 시설 보호를 주목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문화지구로 지정되면 해당 지역 내에서 지자체가 조례로 특정 영업이나 시설을 금지하거나 제한할 수 있고, 건축물 용도 변경도 까다로워진다. 예술가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실제로는 지역 상권의 자유로운 발전을 억제할 수 있는 규제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규제 중심의 문화지구 제도는 지자체장들로 하여금 문화지구 지정을 기피하게 만드는 핵심 요인이다. 문화지구 지정이 지역 활성화보다는 각종 제약과 갈등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업 제한으로 인해 기존 상인들의 반발이 예상되고, 새로운 창업자들의 진입도 어려워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 문화지구는 보호를 위한 보호에 머물며, 역동적인 문화 생태계 형성에는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
둘째, 하드웨어 중심의 접근이 두 번째 문제다. 한국의 문화지구 정책은 문화시설 건립과 물리적 환경 조성에 집중되어 있다. 인사동과 대학로도 전통문화시설과 공연장 중심으로 조성되었지만,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창작자들의 자생적 생태계 형성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문화지구를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고, 문화가 '자라는' 환경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다.
셋째, 관 주도의 하향식 개발 방식이 문제다. 대부분의 공식 문화지구는 정부나 지자체의 계획에 의해 위에서 아래로 조성되었다. 창작자들의 자발적 집적과 상호작용보다는 행정적 효율성과 가시적 성과를 우선시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접근은 형식적인 문화지구는 만들 수 있지만, 창의적 에너지가 넘치는 살아있는 문화 생태계를 형성하기는 어렵다.
넷째, 획일적인 문화지구 모델의 적용이다. 지역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비슷한 유형의 문화시설과 프로그램을 반복적으로 도입하는 경향이 있다. 파주 헤이리, 인천 개항장, 제주 저지예술인마을 등 각각 다른 지역적 맥락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지구로서의 차별화된 정체성과 특색을 찾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추진하는 대표적 해법은 문화도시 사업과 문화산업단지 구상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8년 문화도시 제도를 도입하여 지역별로 문화도시를 지정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문화산업단지 조성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적 접근이 과연 진정한 문화지구를 만들 수 있을까?
국내 문화도시 사업 사례를 살펴보면 그 한계가 명확하다. 현재까지 지정된 문화도시들은 주로 생활문화 확산과 문화향유권 증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분명히 의미 있는 성과이지만, 새로운 문화 콘텐츠를 창출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창작 생태계 형성과는 거리가 있다. 대부분의 문화도시 사업이 기존 문화시설의 확충과 문화프로그램의 양적 확대에 머무르고 있어, 홍대나 성수동과 같은 창의적 에너지의 집적지를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문화산업단지 구상은 더욱 우려스럽다. 제조업 중심의 산업단지 모델을 문화산업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시도는 문화 창작의 본질적 특성을 간과한 것이다. 문화는 격리된 단지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된 도시 공간에서 다양한 주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창출된다. 전국의 지식산업센터들이 분양과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은, 단지형 개발로는 진정한 창작 생태계를 형성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의 정책 접근이 문화지구와 문화도시, 문화산업단지 사이의 명확한 역할 분담과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 제도가 각각 다른 목적과 기능을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비슷한 사업들을 중복적으로 추진하고 있어 정책 효과가 분산되고 있다.
한국의 문화지구가 진정한 문화 창작의 허브가 되기 위한 대안적 접근은 무엇일까? 필자는 현행 법제도의 근본적 개정을 통한 건축 주도 크리에이터 타운의 개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지구 조성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지역문화진흥법의 개정이다. 현재의 보호 중심 문화지구 제도를 활성화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홍대, 성수동, 한남동과 같이 이미 문화 생태계가 형성된 지역을 공식 문화지구로 지정하고, 이들 지역의 성공 요인을 제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현재 이러한 지역들은 자생적으로 형성되었지만 공식적인 지원체계가 없어, 젠트리피케이션이나 임대료 상승 등의 위기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핵심은 건축환경 중심의 접근이다. 홍대가 성공한 이유는 대학가의 저층 건축물들이 제공하는 유연하고 다양한 공간 때문이다. 작은 규모의 공간들이 밀도 있게 모여 있어, 예술가, 소상공인, 스타트업이 각자의 필요에 맞는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보행 친화적인 가로환경이 자연스러운 만남과 교류를 촉진했다.
개정된 문화지구 제도는 예술가, 소상공인, 스타트업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영업 제한이 아닌 영업 지원, 시설 통제가 아닌 시설 육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홍대의 성공 요인인 '인디, 소셜, 디자인' 문화가 바로 이러한 세 주체의 협업에서 나온 것이다. 정형화된 문화시설보다는 유연하게 활용 가능한 복합공간, 창작자들의 경제적 활동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지원이 더 중요하다.
지역별 특성을 반영한 차별화된 접근이 필요하다. 모든 지역이 홍대를 그대로 복제할 필요는 없다. 각 지역의 고유한 문화 자원과 산업 기반을 활용하여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크리에이터 타운을 조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전주는 한식과 전통문화, 부산은 영화와 해양문화, 제주는 자연과 관광을 기반으로 한 차별화된 문화지구가 가능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향식 접근이다. 정부가 위에서 계획하여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창작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이고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제도적,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건축 주도 크리에이터 타운은 단순히 새로운 문화공간을 만드는 것을 넘어, 지역의 창의적 경제 생태계를 구축하는 전략이다. 이를 통해 지역은 고유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고, 창의적 인재를 유치하며, 궁극적으로 지속가능한 지역 발전의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한국의 문화지구가 진정한 문화 창작의 중심지가 되기 위해서는, 시설 중심의 하드웨어 접근이 아니라, 창작자들의 생태계를 기반으로 한 크리에이터 타운 조성이 필요하다. 건축이 주도하는 크리에이터 타운은 단순히 문화적 활성화를 넘어, 한국 각 지역이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과 창의적 경쟁력을 확보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