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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도시의 비극: 제8화 미술관

by 골목길 경제학자

한국 도시의 비극: 제8화 미술관


1. 도입부: 왜 미술관은 도시를 살리지 못하는가?

한국의 미술관은 문화적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국가의 위상을 드높이고 시민들의 문화적 향유를 위해 조성된 공간이면서도, 정작 그 주변은 도시의 활력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간 수십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문화시설임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은 주변 상권과 도시 활성화에 기여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서구의 도시들에서 미술관은 역사적으로 도시의 문화적 중심지로 기능해 왔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런던의 테이트 모던 등은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상업, 관광, 문화가 어우러진 도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특히 쇠락한 도심을 재생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자원이 바로 미술관이다.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대표적인 사례로, 쇠퇴해가던 공업도시 빌바오를 세계적인 문화관광 도시로 탈바꿈시키며 '빌바오 효과'라는 경제 용어까지 탄생시켰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 역시 화력발전소를 개조한 미술관으로 템즈강 남안 지역의 도시재생을 주도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미술관 주도 지역발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훌륭한 전시와 소장품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주변 지역과의 연결고리가 부족하다. 미술관 관람이 일회성 방문에 그치고, 지역의 지속적인 문화 생태계 형성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전국 곳곳에 크고 작은 미술관들이 건립되었지만, 정작 이들 미술관이 도시의 '문화적 중심지'로 기능하는 경우는 드물다. 왜 한국의 미술관은 도시를 살리지 못하는 것일까?


2.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사례: 최고의 컬렉션, 고립된 문화 공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역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1986년 개관한 과천관은 한국 현대미술의 메카로서 세계적 수준의 컬렉션과 기획전시를 자랑한다. 약 15만㎡의 광대한 부지에 조성된 이 미술관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연간 수십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시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천관 주변의 문화 생태계 형성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미술관이 교외 단지 형태로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주변에 주거지역이나 상업지역이 거의 없어, 미술관 관람 전후에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문화적 콘텐츠가 부족하다. 관람객들은 미술관 관람만을 목적으로 방문했다가 곧바로 떠나는 패턴을 보인다.


과천관의 위치적 특성을 살펴보면 현재 문제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 1980년대 미술관 건립 당시 자연환경과의 조화, 넓은 부지 확보, 조용한 관람 환경 등을 우선시했다. 이는 미술관을 도시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성역'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술관이 도시와 분리된 섬이 되어버렸다. 대중교통 접근성도 제한적이고, 미술관 관람 후 연계할 수 있는 문화적 활동의 선택지가 매우 적다.


3. 과천관이 예외인가? 전국 미술관의 공통된 특징과 서울관의 성공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사례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한국 전역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전국의 거의 모든 주요 미술관들이 과천관 모델을 따르고 있다. 교외 단지 형태로 조성되어 주변 상권과의 연결고리가 부족한 것이 공통적 특징이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관람객 통계는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2023년 통계 기준 각 관별 연간 방문객은 서울관 180만 명, 과천관 65만 명, 청주관 19만 명, 덕수궁관 17만 명이다. 도시와 연결된 서울관이 교외에 위치한 과천관보다 거의 3배 가까운 관람객을 유치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주목할 점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만 놓고 보면 방문객 49%가 20대인 것으로 조사됐다는 사실이다. 젊은 관람객들이 접근성이 좋고 주변 상권과 연결된 미술관을 선호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첫째, 교외 입지의 문제가 가장 크다. 대부분의 한국 미술관들은 도심에서 떨어진 교외나 신도시 지역에 단독 건물 형태로 조성되었다. 넓은 부지 확보와 건립비 절약이라는 현실적 이유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미술관이 도시 일상과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미술관 방문이 특별한 목적을 가진 원거리 이동이 되어버린 것이다.


둘째, 단지형 개발의 한계다. 한국의 미술관들은 대개 하나의 큰 건물과 주차장, 조경시설로 구성된 단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효율적인 관리와 운영에는 유리하지만, 주변 지역과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어렵게 만든다. 미술관 내부에는 카페나 뮤지엄샵이 있지만, 외부 상권과의 연계는 거의 없다.


셋째, 담과 경계의 문제다. 많은 미술관들이 명확한 경계선을 가지고 있어, 미술관 안과 밖이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는 보안과 관리 측면에서는 장점이 있지만, 일반 시민들이 미술관을 일상적으로 접근하기 어렵게 만든다. 미술관이 시민들에게 '특별한 날 가는 곳'이라는 인식을 강화하는 요인이 된다.


4. 정부 해결책 - 미술관 복합화와 편의시설 확충의 과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들이 추진하는 대표적 해법은 미술관 복합화와 편의시설 확충이다. 기존 미술관에 공연장, 교육시설, 레스토랑 등을 추가하거나, 신축 미술관을 문화복합시설 형태로 건립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설 중심의 접근만으로는 미술관을 중심으로 한 지속적인 도시 활성화를 이루기에 한계가 있다.


국내 미술관 복합화 사례를 살펴보면 그 과제가 명확하다. 대부분의 미술관 복합화 사업이 미술관 건물 내부나 부지 내에 추가 시설을 배치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러한 시설들은 미술관 관람객들에게는 편의를 제공하지만, 미술관 외부의 주변 지역과의 유기적 연결로는 이어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오히려 미술관 내부에 모든 편의시설이 집중되면서 관람객들이 외부로 나가지 않게 되는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이러한 복합화 시설들의 운영 지속성이다. 초기 투자비는 많이 들지만 실제 이용률이나 수익성이 떨어져 유지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지방 도시의 미술관들은 관람객 수 자체가 제한적이어서 복합시설의 지속가능성이 더욱 의문시된다.


미술관 복합화는 대개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하드웨어 중심의 접근이다. 이는 관람객들의 실제 수요나 지역의 문화적 특성보다는 가시적 성과를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결과적으로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도시 활성화 효과는 제한적인 또 다른 도시 문제를 양산할 위험이 있다.


5. 건축 주도 크리에이터 타운이 답이다

한국의 미술관이 진정한 도시 활성화의 중심이 되기 위한 대안적 접근은 무엇일까? 필자는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모델을 벤치마킹한 건축 주도 크리에이터 타운의 개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술관 중심 도시재생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미술관과 상권 사이의 접근성 개선이다. 2013년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성공한 이유는 삼청동이라는 기존 문화상권과 담 없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울관은 과천관과 달리 도심 한복판에 위치하며, 미술관 관람 전후에 삼청동길의 갤러리, 카페, 공예품점 등을 자연스럽게 이용할 수 있다. 미술관과 상권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상호 시너지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핵심은 미술관 접경지역의 건축환경 조성이다. 삼청동의 성공 요인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인접한 저층 건축물들이 제공하는 다양하고 유연한 문화 공간 때문이다. 작은 규모의 갤러리, 아트숍, 카페들이 미술관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미술관 관람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또한 보행 친화적인 골목길 환경이 미술관과 상권 사이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기존 미술관에서도 이러한 접근이 가능하다. 미술관과 주변 지역을 연결하는 핵심 지점에 중간 매개 역할을 하는 건축물들을 공급함으로써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미술관에 편의시설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관 관람객과 지역 주민이 자연스럽게 만나고 교류할 수 있는 건축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미술관 중심 크리에이터 타운은 예술가, 소상공인, 스타트업이 미술관을 매개로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공간이다. 삼청동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기존 문화상권과 결합하면서 독특한 아트 생태계를 형성한 것처럼, 다른 지역의 미술관들도 지역 고유의 문화적 자원과 결합하여 차별화된 크리에이터 타운으로 발전할 수 있다.


지역별 특성을 반영한 차별화된 접근이 필요하다. 모든 미술관이 삼청동을 그대로 복제할 필요는 없다. 각 지역의 고유한 문화적 자원과 예술적 전통을 활용하여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크리에이터 타운을 조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도자기로 유명한 지역의 미술관은 도예 공방과 연계하고, 전통공예가 발달한 지역의 미술관은 공예 작가들과 협업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향식 접근이다. 정부가 위에서 계획하여 시설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예술가들과 문화 관련 소상공인들이 자발적으로 미술관 주변에 모이고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삼청동이 자연스럽게 문화상권으로 발전한 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그 중심에 자리잡은 것처럼, 미술관 정책도 이러한 자생적 동력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한국의 미술관이 진정한 도시 활성화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시설 중심의 하드웨어 접근이 아니라, 미술관과 상권 사이의 접근성을 높이는 건축적 개입을 통한 크리에이터 타운 조성이 필요하다. 과천관의 고립된 단지 모델에서 벗어나 삼청동 서울관의 도심 연결 모델로 전환할 때, 미술관은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도시 문화 생태계의 진정한 허브가 될 수 있다. 건축이 주도하는 미술관 중심 크리에이터 타운은 단순히 미술관의 기능 확장을 넘어, 한국 각 지역이 미술관과 상권의 유기적 연결을 통한 새로운 문화도시 모델을 구축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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