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반지성주의 담론이 확산되고 있다. 가짜뉴스의 범람, 팬덤 정치의 일상화, 전문가 집단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 등을 반지성주의의 징후로 진단하며, 이에 맞서는 지성의 복원을 시급한 과제로 제시한다.
한국 지성주의의 처방전은 일관되다. 시민들에게 더 많은 교육을 제공하고, 미디어 리터러시를 강화하며, 지식인의 사회적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고, 지식인을 계몽의 주체로 설정하는 전형적인 엘리트주의적 접근법이다.
하지만 이런 대응 방식은 다시 생각해야 한다. 왜 시민들이 전문가를 불신하게 되었는지, 왜 기존 엘리트 집단에 등을 돌렸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찾아보기 어렵다.
일부는 지식인의 권위가 절대적으로 존중받던 시절, 소수의 주요 언론사가 여론을 주도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디지털 혁명이 만든 새로운 정보 생태계에서 그런 시대는 이미 불가능하다.
한국의 반지성주의 담론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인물이 리처드 호프스태터(1916-1970)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대표적 역사학자였던 그의 『미국의 반지성주의』(1963)는 한국 지식인들에게 반지성주의 비판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핵심 텍스트로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오독이 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호프스태터를 지성주의의 옹호자로 읽는다. 그들은 호프스태터가 대중의 무지를 비판하고 엘리트의 우월성을 확인해주는 학자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는 완전한 오해다.
호프스태터는 반지성주의를 미국 민주주의의 구조적 특성으로 분석했다. 그는 이를 단순히 무지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특유의 평등주의적 정서와 실용주의 문화가 만들어낸 복합적 현상으로 이해했다. 더 중요하게는, 반지성주의를 엘리트의 오만에 대한 대중의 정당한 반응으로 해석했다.
호프스태터가 미국 사회에서 반지성주의의 주요 동력으로 지목한 것은 기독교였다. 미국의 기독교는 평등주의와 실용주의를 통해 지식인과 과학을 견제해왔다. 이는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지성과 반지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종교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학과 이성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여기서 나온다.
호프스태터는 지성(intellect)과 지능(intelligence)을 구분했다. 반지성주의가 반드시 반지능주의는 아니라는 미묘한 차이도 강조했다. 이런 복잡성을 무시하고 호프스태터를 단순한 지성주의자로 읽는 것은 그의 핵심 통찰을 놓치는 일이다.
호프스태터가 제시한 해법은 단순한 지성주의의 복원이 아니었다. 그는 엘리트들에게 자기 확신이 아니라 겸손(Humility)을 요구했다. 지식인들이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지혜를 인정하고 진정성 있는 태도로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현재 인류가 직면한 총체적 위기 상황에서, 엘리트가 지성주의를 대안으로 주장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기후변화, 팬데믹, 경제 불평등 등 복합적 위기 앞에서 전문가들의 예측과 정책이 번번이 빗나가는 모습을 시민들은 반복해서 목격해왔다. 이런 시민들에게 단순히 더 많은 지식과 더 나은 전문성을 요구하는 접근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반지성주의의 진정한 반대말은 지성주의가 아니라 상식(Common Sense)이다. 상식은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면서도, 맹목적 감정과는 구분된다. 상식은 일상의 경험과 공동체의 오랜 지혜에서 나온다. 때로는 복잡한 이론보다 더 명쾌하게 현실을 꿰뚫는다.
상식은 엘리트와 대중을 갈라놓지 않는다. 오히려 둘 사이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공통의 언어가 된다. 미국 독립혁명 시기의 정치사상가 토머스 페인(1737–1809)은 『상식』(1776)을 통해 미국 독립이라는 급진적 선택을 대중적으로 설득했다. 당시 엘리트의 언어가 아닌, 상식의 언어로 역사를 움직인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상식은 전 세계 정치 담론에서 핵심 키워드로 떠올랐다. 그 배경에는 엘리트의 실패가 있었다. 기술, 무역, 인권, 환경, 부동산 등 주요 정책 영역에서 엘리트들은 현실의 중산층 삶과 괴리된 이념이나 내부 경쟁 논리에 따라 정책을 설계했고, 이는 대중의 불신과 저항을 불러왔다.
이런 변화된 정치 환경에서 필요한 지도자는 단순한 엘리트가 아니다. 마틴 구리와 에즈라 클라인의 2025년 대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뉴욕타임스 팟캐스트 <에즈라 클라인 쇼>에서 진행된 이 대화에서, 2016년과 2020년 투표를 거부했던 마틴 구리가 2024년 트럼프에게 투표한 이유는 단순한 정치 성향이 아니라, 엘리트에 대한 구조적 불신이었다. 그들은 공공선에 헌신하면서도,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에서 효과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새로운 리더십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오바마는 그 사례 중 하나다. 그는 공익적 엘리트의 가치를 체화하면서도,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시민과의 직접 소통에 능했다. 그는 기존 제도의 권위만으로는 신뢰를 얻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가치와 소통을 함께 실천하는 새로운 리더십 모델을 보여주었다. 단순한 메시지 전달이 아니라, 시민과의 관계 자체를 재설계한 것이다.
결국 지성주의의 반지성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은 현장으로의 회귀가 아닐까. 지식인이 자신의 지식에만 의존하지 않고, 현실을 체험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현장성 복귀의 시도는 20세기 초 미국의 사회비평가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의 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1922년 『유토피아 이야기』에서 산업사회의 메가폴리스(대도시) 중심 체제를 비판하며, 과학과 예술이 지역 공동체와 유리된 채 추상화되는 문제를 지적했다. 멈퍼드가 주목한 해법은 영국의 '지역 조사(Regional Survey)' 모델이었다. 이는 "전문가의 지식을 지역에서 통합하고자 하는 시도"로, "도서관과 연구소를 향한 전문가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향한 현장의 적극적인 활동가를 연결시킬 수 있는 다리"가 되는 것이었다.
영국에서 19세기 말 지역 조사 운동을 시작한 스코틀랜드의 도시계획가 패트릭 게디스(Patrick Geddes)는 상아탑을 벗어나 지역 현장에서 직접 조사하고 계획하는 방법론을 실제로 개발하고 실천했다. 게디스의 접근법은 지식인이 현장으로 돌아가 대중과 소통하며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실용주의적 공동체 정신의 구현이었다.
현장성을 갖춘 지식인이 고려해볼 만한 소양은 네 가지다. 첫째는 현장 소통이다. 일방적 계몽이 아닌 현장에서 대중과의 진정성 있는 교감, 네트워크형 소통 환경에서의 쌍방향 대화를 시도해볼 수 있다. 둘째는 현장 상식이다. 복잡한 이론보다 현실에 기반한 상식을 존중하고, 토머스 페인이 보여준 것처럼 상식을 통해 엘리트와 대중을 연결하는 공통의 언어를 모색해볼 수 있다. 셋째는 현장 지식이다. 상아탑에서 나온 추상적 이론보다 현장에서 축적된 살아있는 경험과 지혜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가 도움이 될 것이다. 넷째는 현장 공동체 정신이다. 개인의 이익이나 정파적 이해관계보다 현장 공동체의 공공선과 장기적 안목을 우선하는 가치를 지향해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현장성을 갖춘 지성의 회복을 고민해볼 때가 왔다. 엘리트의 오만도, 대중의 맹목도 아닌, 현장성을 갖춘 지성에서 우리 사회의 미래를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김유태. "지성과 반지성 사이 …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매일경제, 2025년 6월 16일.
모종린. "상식의 시대." 매일경제, 2021년 10월 16일.
모종린. "선비의 종말?" 골목길 경제학자의 브런치, 2025.
양지호. "'나도 너만큼 똑똑해'… 반지성주의, 전문가 혐오서 시작한다." 조선일보, 2022년 5월 14일.
Klein, Ezra, and Martin Gurri. "A Theory of Media That Explains 15 Years of Politics." The Ezra Klein Show, New York Times, February 25,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