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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 건축 주도 지역발전론의 전형?

by 골목길 경제학자

새마을운동, 건축 주도 지역발전론의 전형?


1. 건축 주도 지역발전론이란 무엇인가

건축 주도 지역발전론은 소멸지역이나 낙후지역에 건축마을을 조성해 크리에이터와 창업자를 유치하고, 이를 통해 로컬 브랜드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전략적 접근을 의미한다. 단순한 건물 짓기나 환경 개선이 아니라, 지역의 창의성과 정체성을 담아낼 수 있는 소규모 건축을 통해 로컬 브랜드를 육성하고, 주민 삶의 질과 지역 경제의 자생력을 함께 높이려는 종합적 전략이다.


한국에서 ‘건축 주도’라는 말은 흔히 대형 문화시설이나 공공건축 중심의 개발사업을 연상시키지만, 이 글에서 제안하는 접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는 주민 참여를 바탕으로 지역 고유의 콘텐츠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을 기획하고, 그 안에서 크리에이터들이 자신만의 브랜드를 형성해갈 수 있도록 상가 건물과 가로 환경 중심의 물리적 기반을 마련하는 전략이다. 즉, 건축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브랜드 생태계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인프라로 작동한다.


이 접근법의 핵심은 '공간이 행동을 결정한다'는 믿음에 있다. 건축학에서는 잘 설계된 건축 환경은 주민들의 생활 패턴을 바꾸고, 새로운 경제 활동을 유도하며, 공동체 의식을 강화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개별 건축물의 개선에서 시작해 마을 전체의 공간 구조를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지역 전체의 발전 동력을 창출하는 것이 목표다.


서구에서는 도시재생과 뉴어바니즘 운동을 통해 건축 주도 지역발전론이 발전해 왔다. 이는 주로 산업화 이후 쇠퇴한 도시의 회복을 목표로 한 접근이었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이후 도시재생 논의와 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해 왔다.


그러나 한국에서 건축 주도 지역발전은 2000년대 처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1970년대 한국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산업도시가 아닌 농촌을 대상으로, 전통적 공간 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며 사회구조까지 변화시키고자 했다. 이처럼 물리적 환경 개선을 매개로 지역의 근대화를 이끈 새마을운동은, 오늘날의 도시재생 정책들보다 앞서 성공적으로 실현된 건축 주도 지역발전 모델로 평가할 수 있다.


이 글은 새마을운동을 단순한 농촌개발이 아닌, 한국형 건축 주도 지역발전의 원형으로 새롭게 조명한다. 그리고 그 핵심을 현대적으로 계승해, 크리에이터 경제 시대에 적합한 건축 기반 로컬 콘텐츠 타운 모델을 제안하며, 그 전략적 의미와 구체적 구성 요소를 단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성공 사례? 새마을운동이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은 고도 성장기에 농촌 소득을 높여 사회 전체의 소득 분포를 개선한 세계적인 성공 사례로 인정받는다. 시작한 지 불과 10년 만에 전국 34,000여 개 마을 중 약 16,000개가 정부의 ‘자립마을’ 기준을 충족한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특히 시범 마을을 중심으로 농가소득이 약 5배 증가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새마을운동의 성공 요인을 분석할 때 흔히 '정신 개혁'이나 '의식 변화'에 주목한다.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이 농촌 근대화의 원동력이었다는 설명이다. 물론 이러한 정신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새마을운동의 진정한 혁신은 다른 곳에 있었다.


새마을운동이 다른 개발 정책과 달랐던 점은 물리적 환경 개선을 모든 변화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새마을운동의 3대 기본사업인 '환경개선', '소득증대', '의식개혁' 중에서도 환경개선이 가장 먼저 시작되었고, 이를 통해 다른 모든 변화가 가능해졌다.


3. 새마을운동이 건축 주도 지역발전 사례인 이유

새마을운동의 핵심은 물리적 공간 환경의 변화를 통해 주민의 의식과 경제 활동, 공동체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데 있다. 이러한 건축환경 개선 노력은 (1) 건축 환경을 통한 의식 변화, (2) 공간 구조 변화에 따른 경제 활동 혁신, (3) 표준화된 건축 모델 확산, (4) 주민 참여를 통한 공동체 강화 등 네 가지 측면에서 나타났다.


건축 환경 개선을 통한 의식 변화

새마을운동은 초가지붕 개량, 담장 개선, 마을 안길 정비 등 가장 기본적인 건축 환경 개선부터 시작했다. 이것이 단순한 환경 정비가 아니라 혁명적 변화였던 이유는, 수백 년간 지속되어 온 농촌의 공간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나 기와로 바꾸고, 흙담을 시멘트 담장으로 교체하며, 구불구불한 마을길을 직선으로 정비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은 '근대적 삶'을 체험하게 되었다. 깨끗하고 정돈된 공간에서 살게 된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근대적 생활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공급된 기와집과 양철지붕집이 가져온 미적 변화다. 전통 초가지붕에서 주황색 기와나 은색 양철지붕으로 바뀌면서 마을 전체의 시각적 통일성이 만들어졌다. 일부 지역에서는 지붕 색을 통일하여 컬러 테마 마을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붕 색의 통일성은 오늘날 신안군의 퍼플섬이나 장성군의 옐로시티와 같은 컬러 테마형 지역 마케팅의 원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공간 구조 변화를 통한 경제 활동 혁신

마을 안길 정비와 진입로 개선은 단순한 교통 편의 증진을 넘어 농촌 경제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 트럭이 마을 안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되면서 농산물 유통 구조가 바뀌었고, 새로운 농기구와 기술의 도입이 가능해졌다. 공동 작업장, 창고, 마을 회관 등 공동 시설의 건설은 협동조합 활동의 물리적 기반이 되었다.


표준화된 건축 모델의 전국 확산

새마을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표준화된 건축 모델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는 점이다. 새마을 주택의 표준 설계도, 마을 회관의 표준 모델, 공동 시설의 표준 구조 등이 개발되어 전국에 보급되었다. 표준 모델은 개별 마을의 재정 여건과 무관하게 일정 수준의 건축 환경을 보장하는 효과가 있었으나, 지역 고유의 건축 다양성이 희생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주민 참여를 통한 건축 과정의 공동체화

새마을운동에서 건축 환경 개선은 주민들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이루어졌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담장을 쌓고, 길을 정비하고, 지붕을 개량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의식이 강화되었다. 건축 과정 자체가 사회적 학습의 장이 되었고, 협동의 경험을 통해 마을 공동체의 역량이 강화되었다.


4. 현대 크리에이터 경제에 맞는 새마을운동: 건축 기반 로컬 콘텐츠 타운

오늘날 인구 감소와 경제 침체로 위기에 처한 지역들은, 단순한 지원이 아닌 근본적인 생활환경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때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성공 경험은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할 가치가 있다. 새마을운동이 농업 경제 시대에 건축 환경 개선을 통해 농촌 사회를 혁신했다면, 21세기 크리에이터 경제 시대에는 어떤 새로운 접근이 필요할까? 답은 새마을운동의 핵심 DNA를 계승하되, 창의적 경제 활동을 지원하는 건축 기반 로컬 콘텐츠 타운 조성에서 찾을 수 있다.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접근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농업 경제 시대에 맞는 건축 주도 지역발전 모델이었다면, 21세기 소멸 위기 지역에는 크리에이터 경제에 맞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 현재 지역 소멸 위기를 겪고 있는 군청 소재지들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물리적 환경 개선이 아니라, 창의적 경제 활동을 지원하는 건축 환경의 조성이다.


건축마을에서 로컬 콘텐츠 타운으로

새마을운동의 현대적 계승이 바로 '건축마을 기반 로컬 콘텐츠 타운' 조성이다. 새마을운동이 초가지붕 개량과 담장 정비를 통해 근대적 농촌을 만들었다면, 로컬 콘텐츠 타운은 개성 있는 건축물의 집적을 통해 창의적 공간을 조성한다.


경주 황남동의 한옥마을, 전주 풍남동의 전통 건축 집적지, 제주 전농로의 단독주택 단지 등은 모두 독특한 건축적 매력을 가진 '건축마을'들이다. 이러한 공간들은 외부 방문객을 유치할 뿐만 아니라, 크리에이터들이 정착하여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새마을운동의 DNA 계승

로컬 콘텐츠 타운 조성은 새마을운동의 핵심 DNA를 계승한다. 먼저 환경 개선의 우선순위 측면에서 로컬 콘텐츠 타운도 물리적 건축 환경 개선부터 시작한다. 개성 있는 건축물들이 집적된 '건축마을' 조성이 모든 변화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중앙정부가 개발한 표준 설계도를 전국에 배포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을 단위 건축 개선을 유도한 대표 사례다. 로컬 콘텐츠 타운은 새마을운동의 ‘표준 설계도’ 배포 방식에서 착안해, 전국 동일 설계가 아닌 지역 맞춤형 건축 유형 모델을 개발하고 이를 유사한 환경을 가진 지역에 맞게 응용·확산하는 전략을 따른다. 예컨대, 수직 혼합형 상가주택(일명 '무지개떡건축'), 원도심 복합형 캠퍼스, 개방형 커뮤니티 상가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모델은 주민이 합의한 마스터플랜을 기반으로 적용되며, 성동구 성수동의 붉은 벽돌 건축물 지원 사례처럼, 공공 지원이 공동체적 실천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단계적 접근 방법론도 새마을운동의 것을 따른다. 새마을운동이 환경개선 → 소득증대 → 의식개혁 순으로 진행되었듯이, 크리에이터 타운도 여가(樂) → 일자리(職) → 주거(住) 순으로 단계적으로 조성한다.


현대적 혁신 요소

동시에 로컬 콘텐츠 타운은 21세기 경제 환경에 맞는 혁신적 요소들을 포함한다. 직주락 근접성을 통해 일하고, 살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이 가까이 위치하여 크리에이터들의 삶의 질을 높인다. 디지털 인프라 구축을 통해 원격 근무와 디지털 콘텐츠 생산을 지원하는 최첨단 인프라를 마련한다.


개방적 상가와 공유 공간을 조성하여 크리에이터들 간의 교류와 협업을 촉진한다. 또한 로컬 브랜드 육성을 통해 지역의 특성을 활용한 지속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한다.


브랜드 생태계 중심 모델로의 전환

로컬 콘텐츠 타운은 단순히 지역에 흩어진 콘텐츠를 한데 모으는 것을 넘어, 로컬 콘텐츠를 활용해 새로운 브랜드를 잉태하고 성장시키는 공간이다. 콘텐츠는 시작점이고, 브랜드는 진화의 결과다. 이 과정을 가능하게 하려면 단순한 창업 공간 제공이나 공동 마케팅을 넘어서, 개별 창작자들이 로컬 정체성을 기반으로 고유한 브랜드를 구축하고 확장해 나갈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로컬 콘텐츠 타운은 바로 그 조건을 체계적으로 마련하는 브랜드 생태계 전략이다.


이 점에서 로컬 콘텐츠 타운은 과거 새마을운동과 명확히 구분된다. 새마을운동은 마을 단위의 공동 작업장, 협동조합, 공동 생산시설을 중심으로 공동 경제를 설계한 사업이었다. 즉, 마을 주민들이 하나의 공동체로서 함께 일하고 함께 이익을 나누는 구조였다.


반면 로컬 콘텐츠 타운은 각기 다른 콘텐츠 기반의 창작자들이 독립된 브랜드 주체로서 지역 내에 공존하고, 공간, 유통, 네트워크, 디자인, 교육 등 다양한 인프라를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브랜드로 성장해간다. 이들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고 협업하는 느슨한 생태계를 형성하며, 그 자체로 지역의 다원성과 창의성을 반영하는 새로운 공동체 모델이다.


결국 로컬 콘텐츠 타운은 공동 생산이 아닌 공동 성장을 위한 플랫폼이다. 로컬 콘텐츠가 브랜드로 진화할 수 있도록 돕는 창의적 생태계를 통해, 지역은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자립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얻게 된다.


새마을운동 2.0으로서의 로컬 콘텐츠 타운

새마을운동은 건축 주도 지역발전론의 중요한 성공 사례다. 물리적 환경 개선을 통해 주민 의식을 변화시키고, 경제 활동을 혁신하며, 공동체를 강화한 총체적 발전 모델이었다. 오늘날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들에 필요한 것은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방법론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새로운 모델이다. 건축마을 기반 로컬 콘텐츠 타운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새마을운동 2.0'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농업 경제 시대의 지역발전 모델이었다면, 로컬 콘텐츠 타운은 크리에이터 경제 시대의 지역발전 모델이다. 건축 환경의 개선을 통해 지역의 자립성과 공동체 역량을 강화한다는 철학은 동일하지만, 오늘날에는 창의성과 다양성을 중심으로 한 지속가능한 발전 전략으로 진화하고 있다.


투입 자원의 관점에서 보면, 새마을운동 1.0이 철근과 시멘트라는 물리적 인프라를 공급했다면, 새마을운동 2.0은 디자인과 콘텐츠라는 창의적 인프라를 공급하는 사업이라 할 수 있다.


소멸 위기에 처한 지역들이 다시 활력을 찾기 위해서는 새마을운동의 성공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 건축 주도 지역발전론의 전형인 새마을운동의 DNA를 계승하면서도, 21세기 크리에이터 경제에 맞는 새로운 모델로 발전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로컬 콘텐츠 타운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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