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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도시 영주에서 시작된 건축 주도 지역발전 실험

by 골목길 경제학자

건축 도시 영주에서 시작된 건축 주도 지역발전 실험

‘건축마을 기반 크리에이터 타운’이라는 새로운 도시 모델을 제안하며


“소멸 지역, 도시가 답이다.” 지난 5월 22일, 나는 포틀랜드스쿨 세미나에서 ‘건축마을 기반 크리에이터 타운 조성’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 있는 이 제안은, 사실 한국에서도 이미 시도된 바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경상북도 영주시다.


영주는 '건축 도시'라고 불릴 만큼 한국 공공건축의 혁신을 대표하는 도시다. 2009년 전국 최초로 총괄계획가 제도를 도입했고, 이후 10년 넘게 일관된 디자인 관리 체계를 구축하며 도시공간의 품격을 높여왔다. 이 제도를 통해 영주는 노인복지관, 장애인복지관, 실내수영장, 풍기읍행정복지센터 등 수많은 공공건축 우수작을 배출하며, 도시 전체를 일관된 디자인 전략으로 묶는 데 성공했다. 도시의 하드웨어가 도시의 정체성과 문화를 형성할 수 있다는 확신이 실천으로 이어진 것이다.



건축을 통해 마을을 설계하다: 남산선비마을의 실험

이러한 전략의 정점에 있는 사례가 바로 남산선비마을 도시재생뉴딜사업이다. 2018년 국토교통부 사업에 선정된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도시 정비 사업이 아니라, 건축을 기반으로 한 마을 재구성 실험이었다. 핵심은 선비문화센터, 어린이돌봄도서관, 순환형 임대주택과 주차장 등으로 구성된 ‘인의예지 거점시설’이다.


이 시설들은 단순한 기능 제공을 넘어, 주민 커뮤니티의 물리적 기반으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할머니밥상’이라는 공동체 식당은 지역 주민이 운영하는 경제 활동의 거점이자 복지시설이며, ‘마을라운지’는 커뮤니티 전시공간이자 게스트하우스의 공유공간이다. ‘어린이돌봄도서관’은 돌봄과 여가, 학습이 결합된 다기능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살고, 일하고, 즐기는(職住樂)’ 복합 생활공간이며, 거점시설 간의 연결을 통해 마을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 시스템으로 재구성되었다.*


공모 설계에 참여한 신진건축가들은 지형을 수용하고, 골목길을 복원하며, 옹벽과 담장을 커뮤니티 공간으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쇠퇴한 동네의 일상을 재디자인했다. 이처럼 건축은 단지 하드웨어의 공급이 아니라, 지역의 정체성과 생활양식을 복원하고 확장하는 도구로 작동했다.


우리는 이처럼 작은 건축의 집합이 지역의 큰 변화를 유도하는 사례를 영주에서 보았다. ‘건축마을 기반 크리에이터 타운’은 단지 예쁜 마을을 짓자는 제안이 아니다. 이 모델은 ‘건축 → 커뮤니티 → 창의활동 → 정주경제’라는 단계적 전략을 담고 있다.


건축에서 크리에이터 타운으로

건축만으로는 지역을 지속가능하게 만들 수 없다. 정주를 넘어선 창의적 생산과 자립 경제를 가능하게 하려면, 건축 기반 위에 창의적 활동 생태계, 즉 ‘크리에이터 타운’을 구축해야 한다.


‘크리에이터 타운’이란 크리에이터들이 실제로 거주하고, 일하며, 협업할 수 있도록 설계된 마을 중심의 도시 모델이다. 크리에이터들은 마을의 공간을 콘텐츠 생산의 무대로 삼고, 로컬 자원을 활용해 브랜드를 만들며,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다. 이들이 정착함으로써 마을은 일회성 방문지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정주 공간이 된다.


영주의 실험은 이 모델의 전단계로 볼 수 있다. 건축마을이 제공하는 독특한 공간 환경은 크리에이터의 정주 조건을 만족시키며, 공동체 기반 경제 활동은 크리에이터 타운의 초기 생태계를 형성한다. 즉, 건축마을은 크리에이터 타운으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물리적·사회적 기반을 갖춘 준비된 실험지인 셈이다.


정책으로 확장하기 위한 5가지 제안

영주의 실험이 단발적 성공에 그치지 않고 전국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책적 전환이 필요하다.


1. 총괄계획가 제도의 전국 확대

영주는 총괄계획가 제도를 통해 권역별 공공건축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도시 전체를 설계해 왔다. 이 제도는 단일 건축물 중심의 설계를 넘어, 도시 전체의 공간 전략을 기획하는 데 필수적이다. 중앙정부는 이 제도를 제도화하고, 지방정부는 건축가와 협업할 수 있는 실행 구조를 갖춰야 한다.


2. 건축 중심 도시재생 예산 구조 개편

현재 도시재생 사업은 공정률 중심 예산 집행과 물리적 성과에 치우쳐 있다. 창의적 건축이 실현되기 위해선 설계 단계에 더 많은 시간과 자원이 투입되어야 하며, 커뮤니티 기반 운영비용도 예산에 포함되어야 한다. 가격입찰 대신 제안공모와 디자인 감리 방식이 표준이 되어야 한다.


3. ‘건축마을 기반 크리에이터 타운’의 제도적 승인
이 모델은 상권활성화, 도시재생 지역 등 기존 정부 사업 대상지로 분류되지 않는 새로운 유형이다. 국토부, 문체부, 농식품부, 중기부 등 다양한 부처가 ‘지역활력타운’, ‘15분 도시’, ‘문화지구’, ‘소멸 대응 전략’ 등 각자의 도구를 통합해 이 모델을 지원해야 한다.


4. 거리와 동네 단위의 생활밀착형 디자인 전략

영주의 경우, 그동안 개별 공공건축물의 품질을 높이는 방식으로 건축 기반 도시재생을 추진해 왔다. 노인복지관, 장애인복지관, 실내수영장처럼 건물 하나하나의 건축적 완성도는 매우 높았지만, 여전히 도시 전체의 거리나 동네 단위에서 기능과 분위기를 조율하는 작업은 부족했다. 앞으로의 건축도시 전략은 단일 건축물의 완성도를 넘어, 거리와 동네 단위의 연속된 공간구성 속에서 거점과 일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


5. 주민과 건축가의 협력으로 지속가능한 운영체계 구축
영주 남산선비마을의 핵심은 ‘디자인’이 아니라 ‘거버넌스’에 있었다. 마을 식당, 도서관, 게스트하우스를 주민과 건축가가 함께 기획하고 운영할 수 있었기에 지속 가능했다. 물리적 시설에 공동체 역량을 결합한 ‘건축 기반 마을 경제’가 확립되어야 한다.


결론: 건축은 도시의 문화를 설계하는 도구다

영주의 건축 실험은 ‘건축을 통한 마을 설계’에서 ‘건축을 통한 지역경제 설계’로 확장되고 있다. 이 모델은 인구 5천 명 규모의 군청 소재지에서도 충분히 적용 가능하다. 전국의 소멸 위기 지역이 영주 모델을 참고해 자신만의 건축마을을 기획하고, 크리에이터 타운 또는 로컬 콘텐츠 타운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면, 한국의 지방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건축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건축은 단순히 공간을 짓는 기술이 아니라, 지역의 삶을 재구성하고 미래의 방식을 제안하는 도구다. 이제 우리는 마을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영주가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지금은 그 실험을 전국으로 확장할 시간이다.


*현재 스테이 외의 남선센터 시설은 올 하반기 오프닝을 목표로 리모델링 중이다.


참고문헌

모종린. (2025.4.14). 소멸지역에 건축마을? 『골목길 경제학자의 브런치』.

영주시. (2019a). 도시재생뉴딜사업 남산선비마을 인의예지 거점시설 설계공모 공고문. 영주시 공고 제2019-509호.

영주시. (2019b). 도시재생뉴딜사업 남산선비마을 인의예지 거점시설 설계공모 선정결과 공고. 영주시 공고 제2019-720호.

영주시. (2019c). 남산선비마을 인의예지 거점시설 설계지침서.

모노리스 건축사사무소. (2020). 남산선비마을 인의예지 거점시설 설계 당선작 중간보고서.

영주시 도시과, 건축공간연구원. (2024). 영주시 공공건축관리 발표자료: 디자인이 아름다운 도시 영주, 공공건축물로 도시를 변화시키다.

오공환. (2025.6.27). “도시건축디자인 이끌 총괄계획가들, 영주에 모였다.” 『건축신문』, 제10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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