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2010년대 중반 이후 '로컬'이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로컬 비즈니스를 의미하는 로컬은 단순한 유행이나 일시적 현상을 넘어서, 기존의 중앙집권적 경제구조와 대량생산·소비 패러다임에 대한 구조적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정부 또한 이러한 변화에 주목하여 2016년부터 로컬 지원 정책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정부 정책의 체계성과 성과는 다른 문제다.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로컬에 대한 이해 부족과 이견, 생태계적 관점의 부재, 부처 중심 행정 체계의 한계 등으로 인해 정부가 로컬 정책을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이 글은 로컬 현상의 본질과 의미를 재정립하고, 역대 정부의 로컬 정책화 시도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향후 정책 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로컬 현상의 본질은 지역의 고유한 자원, 문화, 정체성을 중시하고, 이를 개인의 생산과 소비 활동에 투영하는 문화다. 생태계 차원에서 보면, 로컬 경제는 기존의 중앙집권적·대기업 중심 경제구조에서 벗어나 지역 중심의 소규모 순환경제를 추구하는 움직임이다. 특히 지역에 뿌리를 내린 지속가능한 사업 모델 창출과 지역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유통구조 혁신이 주요 특징이다.
이러한 로컬 트렌드는 코로나19 이후 가속화된 라이프스타일 변화, 환경·사회적 가치에 대한 관심 증가, 디지털 기술 발달로 인한 공간적 제약 완화 등과 맞물려 더욱 확산되고 있다.
이 트렌드의 깊이와 범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 https://brunch.co.kr/@tmm/51
로컬 현상에 대한 학술적·정책적 접근은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구분된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로컬 정책의 목표 설정과 추진 방식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네경제로서의 로컬
필자가 『머물고 싶은 동네가 뜬다』에서 제시한 이 관점은 로컬을 동네 기반 기업 생태계로 해석한다. 따라서 로컬을 지역발전 수단으로 활용하려면, 자생력 있는 기업 생태계를 조성하여 지역경제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이 접근법은 단기적으로 생태계 지속 가능성, 장기적으로는 지역의 경제적 자립도 향상, 일자리 창출, 인구 유입 등 실질적인 지역발전 효과를 중시한다.
대안경제로서의 로컬
강경환 외(2024)의 『로컬 라이프 트렌드』를 비롯한 연구들은 로컬을 기존 자본주의 경제구조에 대한 근본적 대안으로 접근한다. 이 관점에서 로컬은 대량생산·대량소비 패러다임을 거부하고, 지역 중심의 소규모 순환경제를 통해 사회적·환경적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이해된다. 경제적 효율성보다는 공동체적 가치, 환경 친화성, 사회적 책임을 우선시하는 특징을 보인다.
확장가능 기업생태계로서의 로컬
세 번째 관점은 아직 체계적인 이론서로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정책 현장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관점은 로컬 기업과 소상공인을 지역에 기반하되 전국적 확장이 가능한 새로운 기업 생태계의 주체로 본다. 지역 착근과 동시에 시장 확장성을 추구하며, 기존의 대기업 중심 경제구조와 소규모 지역순환경제 사이의 중간 지점을 지향한다.
경제 중심 접근과 비경제적 접근의 구분 위에서 소개한 세 관점의 공통점은 로컬을 경제 현상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반면, 로컬을 비경제적 현상으로 접근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는 로컬 현상에서 문화기획, 주민자치, 도시재생 등의 사회문화적 요소를 강조하는 관점으로, 경제적 성과보다는 지역 공동체 복원, 문화적 정체성 강화, 시민 참여 확대 등을 우선시한다.
이러한 관점의 다양성은 정책 설계 시 추구하는 목표와 성과지표, 지원 방식의 근본적 차이로 이어지며, 실제 로컬 정책의 혼재와 방향성 부재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로컬을 지역발전 정책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정부의 체계적 시도는 2016년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세 정부에 걸쳐 지속되고 있다. 각 정부는 로컬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 방식과 정책 우선순위를 보여왔다.
정부별 로컬 정책 추진 현황
박근혜 정부(2016): 지역 생활문화 청년 혁신가 사업
문재인 정부(2019): 로컬 크리에이터 육성 사업
윤석열 정부(2022~2025): '지역의 자생적 창조능력 강화' 국정과제
윤석열 정부의 로컬 국정과제 구성
윤석열 정부는 로컬 지원을 공식 국정과제로 격상시키며 다음과 같은 세부 사업을 추진했다:
중기부: 로컬 크리에이터 육성, 로컬 콘텐츠 중점 대학 지원, 로컬 브랜드 창출
행안부: 로컬 브랜딩 활성화
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로컬 국정과제는 구조적 한계를 보였다. 규모 면에서는 소규모 실험 사업 수준에 머물렀고, 추진 체계 면에서는 부처 통합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국정과제는 관련 부처들이 협력하는 통합 사업으로 추진되지만, 로컬 국정과제는 부처별 개별 사업으로 분산 추진되었다.
한편, 국토부(지역특화재생), 행안부(청년마을), 해수부(어촌신활력), 문체부(대한민국문화도시) 등 다른 부처들도 과거 정부에서부터 이어온 소지역 활성화 사업에서 '로컬' 용어를 부분적으로 활용했으나, 이들은 공식적인 국정과제 체계에 포함되지 않아 정책 간 통합성과 연계성이 부족했다.
지방시대위원회의 로컬 콘텐츠 생태계 구축 시도
2023년 말 출범한 지방시대위원회는 부처 합동 사업으로 '로컬 콘텐츠 생태계 구축 사업'을 제안하여 로컬 정책의 통합적 접근을 시도했다. 이 사업의 핵심은 소멸지역 거점에 로컬 메이커스페이스(마을 공동작업장)를 조성하여 지역 기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2024년 하반기 중기부가 사업 논의에 착수했으나, 현재 추진이 중단된 상태다.
관련 보고서: https://www.prism.go.kr/homepage/asmt/popup/1833000-202300003
위에서 언급된 정책 외에도 여러 부처와 기관에서 로컬과 연관된 다양한 정책 사업들이 추진되었다. 각기 다른 정책 목표를 추구한 이들 사업은 로컬 정책 환경의 복잡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중기부의 '강한 소상공인' 성장지원 사업
강한 소상공인 성장지원은 중기부의 별도 국정과제로, 소상공인의 경쟁력 강화와 성장을 목표로 한다. 로컬을 바라보는 세 번째 관점을 반영한 사업이다. 이 사업이 일부 로컬 크리에이터 기업을 지원 대상에 포함하면서, 정책 현장에서는 로컬 정책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두 사업은 근본적으로 다른 정책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강한 소상공인 사업은 기업의 확장성(Scale Up)과 시장 경쟁력 향상에 중점을 두는 반면, 로컬 크리에이터 사업은 지역 착근(Scale Deep)과 지역 생태계 기여를 우선시한다. 두 접근법은 상호 보완적이지만, 정책 목표와 지원 방식에서 명확한 차별화가 필요하다.
중기부의 상권활성화 사업
2023년 이후 중기부 지역상권과가 추진하고 있는 상권기획자, 상권투자 펀드 등은 로컬 국정과제와는 무관하게 지역상권법 실행 과정에서 파생된 것이다. 구체적인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공식 문서는 찾기 어려우며, 건축공간연구원이 수행한 정책연구 정도가 확인 가능하다.
로컬 콘텐츠 생태계 구축은 기본적으로 지역 자원을 활용한 지역 기업과 창업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지역 생산과 소비를 선호하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계속 증가하면, 이 수요를 만족하기 위한 생태계는 어떤 형태로던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정부는 로컬 현상이 지역발전에 기여하고 적절한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생태계 구축과 지원에 나서면 된다.
이 결정을 할 때 정책과 현실 간의 괴리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미래 경제를 첨단산업과 기술혁신 중심으로 이끌고자 하지만, 실제 창업과 일자리 수요는 소지역, 청년, 비기술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이 세 분야는 다음과 같은 구조적 특성을 갖는다:
소지역: 대도시 집중형 산업정책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적 특수성
청년: 안정적 대기업 일자리보다는 창의적이고 의미 있는 일자리 선호
비기술: 첨단기술 중심의 혁신정책 대상에서 소외되는 전통적·서비스업 영역
이러한 현실적 수요 구조를 고려할 때, 대도시 중심의 대규모 기업 육성이나 첨단기술 중심의 기존 산업정책으로는 실제 창업 생태계 수요를 효과적으로 충족하기 어렵다. 따라서 실제 수요에 기반한 창업과 기업 생태계를 구축하려면, 지역의 고유한 자원과 문화를 활용하는 로컬 콘텐츠 생태계 접근이 현실적이고 불가피한 선택이다.
결국 로컬 정책은 이상적 비전 추구가 아닌, 현실적 수요에 대응하는 정책적 대안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