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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가로 없는 상업지구의 문제

by 골목길 경제학자

중심가로 없는 상업지구의 문제


1. 서울 상권 현황: 상업지역은 있지만 '중심 가로'는 없다

서울은 세계적인 쇼핑 도시다. 명동, 강남, 홍대, 동대문, 이태원, 성수까지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상업지구들이 도시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결정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 바로 '중심가로'다.


중심가로 문제는 두 가지 차원에서 나타난다. 첫째, 서울시 전체를 대표하는 중심 상업 가로가 없다. 뉴욕의 Fifth Avenue, 파리의 Champs-Élysées, 런던의 Oxford Street처럼 그 도시를 상징하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대표 상업 가로가 서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각 상업지구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분절된 '점'처럼 흩어져 있다. 명동에서 동대문으로, 강남에서 홍대로 이동하려면 지하철이나 자동차를 이용해야 한다.


둘째, 개별 상업지구 내부에서도 중심가로가 부재하다. 강남을 예로 들면, 가로수길, 압구정, 청담, 도산공원 일대가 각각 강력한 개성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인스트리트가 없다. 여러 블록에 상점들이 흩어져 있지만, 그 지구의 중심이 되는 걸어서 경험할 수 있는 가로가 없는 것이다.


가로 문화가 약하다 보니 서울은 주요 상업지구를 동네 이름으로 부른다. 가로수길만이 유일하게 거리 이름으로 된 상업지구의 성공 사례다. 반면 글로벌 도시들은 구체적인 거리 이름이 곧 상업지구의 브랜드가 되는 경우가 많다. "Fifth Avenue에서 쇼핑했다"는 말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지만, "명동에서 쇼핑했다"는 말은 지역명일 뿐, 특정한 거리 경험을 의미하지 않는다.


2. 중심가로 부재의 문제점

이런 이중적 중심가로 부재는 특히 현대 리테일 시장의 변화 속에서 제약 요인으로 작용한다. 온라인 쇼핑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오프라인 상권은 단순한 구매 기능을 넘어선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해야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쇼핑이 레저가 되고, 소비가 문화 경험이 되는 시대에 중심가로와 골목길이 만드는 시너지는 온라인이 절대 제공할 수 없는 핵심 경쟁력이다.


파리의 마레 지구나 뉴욕의 소호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은 단순한 쇼핑이 아니다. 메인스트리트를 걸으며 플래그십 스토어를 구경하고, 골목길로 들어가 숨겨진 부티크를 발견하며, 카페에서 쉬고, 갤러리를 둘러보는 일련의 문화적 경험이다. 이런 '우연한 발견'과 '연속적 경험'은 중심 가로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보행으로 연결된 가로를 따라 걸으며 예상치 못한 매장을 만나고, 골목길로 스며드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현대 소비자들이 추구하는 경험 쇼핑의 핵심이다.


반면 서울의 상업지구들은 이런 경험을 제공하기 어렵다. 도시 차원에서는 여러 상업지구를 걸으며 연결해서 경험할 수 있는 루트가 없다. 명동에서 광화문으로, 서울역에서 명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보행 경험이 단절되어 있어 각 지구를 별개의 목적지로만 방문하게 된다.


지구 차원에서는 각 상업지역 내부에서조차 연속적인 탐험 경험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강남의 가로수길과 청담을 연결해서 걷는 것이 불편하고, 이태원에서도 여러 블록에 흩어진 상점들을 자연스럽게 탐험하기 어렵다. 방문객들은 개별 매장을 목적지로 찾아가는 '점프' 방식의 쇼핑을 할 수밖에 없고, 걸으며 우연히 발견하는 즐거움을 경험하기 어렵다.


결국 서울의 각 상업지구는 개별적으로는 훌륭하지만, 이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보행 중심의 연결 고리가 없고, 각 지구 내부에서도 중심축이 부재해 파편적 경험만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 경제 시대에 서울이 글로벌 패션 도시로 성장하는 데 구조적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3. 원인: 역사적 단절과 계획의 부재

중심가로 부재 현상의 원인은 역사적 단절과 계획적 설계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서울 상권은 세 단계를 거쳐 형성되었다. 일제강점기 근대적 상업가로 조성, 1960년대 이후 자동차 중심 도시 개발,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주거지 기반 골목상권의 부상이다.


조선시대 서울에는 종로라는 명확한 중심 상업 가로가 있었다. 동대문과 경희궁을 잇는 동서축의 중심이었던 종로는 시전행랑이 늘어선 전형적인 상업 거리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를 바탕으로 을지로, 태평로 등을 추가 조성하며 의도적으로 상업 가로를 확장했다.


하지만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런 연속성은 단절되었다. 급속한 재건 과정에서 장기적 도시계획보다는 즉각적 필요가 우선되었다. 1960년대 이후 서울의 개발은 지하철역 중심, 자동차 도로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파리의 오스만 대로나 뉴욕의 그리드 시스템처럼 보행자를 고려한 체계적 가로 설계는 없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부상한 골목상권들을 보면 이런 특징이 더욱 뚜렷하다. 홍대, 연희동, 서촌, 북촌, 이태원, 한남동, 도산공원 등 현재 서울을 대표하는 트렌디한 상권들은 예외 없이 주거지에서 형성되었다. 이들은 시작부터 중심가로가 없는 상태에서 성장한 것이다. 골목길의 매력과 주거지의 일상성이 결합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지만, 그 지구를 관통하는 메인스트리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3단계로 형성된 상권들은 모두 기존 도시 조직 위에 덧씌워진 상업 기능이지, 처음부터 상업 가로를 염두에 둔 계획적 설계가 아니었다. 이것이 해외의 성공적 패션 스트리트와 서울의 근본적 차이다.


4. 해결 방안: 연결과 네트워크의 도시

해결 방안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우선 도시 차원에서는 서울의 현실을 고려할 때 하나의 거대한 메인스트리트를 새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파리 모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파리 역시 단일한 메인스트리트는 없다. 대신 각각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여러 상업 축들이 네트워크를 이룬다. Champs-Élysées, Rue Saint-Honoré, Avenue Montaigne이 서로 다른 매력으로 특화되어 있으면서도 보행으로 연결 가능한 거리에 위치한다.


서울도 기존 상업지구들을 연결하는 보행 중심의 축을 강화해야 한다. 종로에서 명동으로, 명동에서 을지로로 이어지는 연결성을 높여 도심 상업벨트를 구축하고, 이를 서울을 대표하는 상업 축으로 브랜딩해야 한다. 지하철 연결만이 아닌, 지상에서 걸으며 경험할 수 있는 상업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다.


지구 차원에서는 각 상업지역 내부에 명확한 중심가로를 조성해야 한다. 강남의 경우 가로수길, 압구정, 청담, 도산공원 일대를 관통하는 보행 중심의 메인스트리트를 구축해야 한다. 홍대, 성수, 명동도 마찬가지로 각 지구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중심가로를 만들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순한 물리적 연결이 아니라, 각 가로가 고유한 캐릭터와 브랜드 스토리를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동시에 거리 중심의 브랜딩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 지역명 중심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거리 이름을 중심으로 한 상업지구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한다. 가로수길의 성공이 이런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상업 가로들도 지역명이 아닌 고유한 거리 이름으로 브랜딩해야 한다.


서울이 진정한 상업도시가 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상업지구 간의 보행 연결성과 상업지구 내의 중심가로다. 이 두 차원이 만날 때 세계적 브랜드들이 입점하고 싶어 하는 '주소'가 탄생할 것이다. 그 주소는 단순한 지역명이 아니라, 걸으며 경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거리여야 한다. 서울의 미래는 결국 이런 연결된 길들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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