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세 가지 관점으로 본 '지정생존자'

by 골목길 경제학자

세 가지 관점으로 본 '지정생존자(Designated Survivor)'


추석 연휴에 2016-2019년 방영된 '지정생존자'를 다시 완주했다. 이 드라마는 국회의사당 폭탄 테러로 대통령과 내각 전원이 사망한 후, 의전서열에 따라 지정생존자로 대피해 있던 주택도시개발부 장관 톰 커크먼(키퍼 서덜랜드 분)이 갑작스럽게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정치 경험도 부족하고 권력에 대한 야심도 없던 학자 출신 정치인이 국가적 위기 속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정치 스릴러다.


커크먼 대통령은 당파적 이익 추구와 권모술수가 일상이 된 현실 정치에 절망하는 우리가 진심으로 원하는 리더의 표상일지 모른다. 위기 때마다 "옳은 일이 무엇인가"를 묻고 그 답을 찾으려는 그의 진정성에서 우리는 신선함과 희망을 느낄 수 있다.


나에게 이 드라마가 특별히 흥미로웠던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양극화된 민주주의에서 제3의 길을 선택한 정치인의 성공을 보여준다. 둘째, 커크먼은 학자 출신이다. 어떤 시대는 학자를 리더로 필요로 하며, 미국의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일 수 있다. 셋째, 개인적인 이유다. 드라마 속에서 커크먼은 코넬대학교 졸업생으로 나온다. 나의 모교이기도 한 코넬대학교의 정체성이 커크먼이라는 캐릭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했다.


1. 양극화 시대의 무소속 정치인

커크먼은 민주당도 공화당도 아닌 무소속 대통령으로 등장한다.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유권자들은 진영 싸움에 빠져 타협과 협치를 거부하는 기존 정당 시스템에 실망하고 있다. 정당은 국민을 위해 일하기보다는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정책보다는 이념 대립이 정치를 지배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좌도 우도 아닌,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제3의 선택지를 찾고 있다.


커크먼은 바로 그런 갈망이 투영된 캐릭터다. 그의 리더십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정직함(honesty), 열정(passion), 그리고 신념(conviction)이다. 정치적 이해관계보다 원칙을 우선시하는 그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이상적일 수 있지만, 바로 그 이상주의가 시청자들에게 희망을 준다. 정치가 원래 이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2. 학자 출신 리더십의 시대적 필요성

학자 출신답게 커크먼은 끊임없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다양한 관점을 수렴하며, 이념이 아닌 증거에 기반해 결정을 내린다. 진실 자체가 협상 대상이 되어버린 시대에, 진실을 신중하고 정직하게 추구하는 것을 직업적 정체성으로 삼는 리더의 모습은 깊은 울림을 준다.


실제로 미국 역사에서 교수 경력을 가진 대통령들이 있었다. 존 퀸시 애덤스는 하버드에서 웅변학과 논리학을 가르쳤고,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신시내티 대학교 헌법학 교수이자 학장을 역임했으며, 버락 오바마는 시카고 대학교 로스쿨에서 헌법학을 가르쳤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 시대에 필요한 이상주의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프린스턴 대학 교수이자 총장이었던 우드로 윌슨이다. 윌슨의 이상주의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국가에 희망을 주었고,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연맹 창설을 통해 전후 국제질서의 기반이 되었다.


역사는 학자 출신 리더십이 예외적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리더십이 필요한 특별한 시기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은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증거를 따르고, 자신의 주장이 틀렸음이 입증되면 기꺼이 생각을 바꾸며,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학자적 자질—정직함과 지적 성실성—이다.


3. 코넬의 평등주의 전통

드라마는 여러 장면에서 코넬 사인을 보여주며, 특히 첫 에피소드에서 커크먼은 코넬 스웻셔츠를 입고 대통령 선서를 한다. 이 상징적인 장면은 권력의 최정점에 섰지만 여전히 자신의 뿌리를 잃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학부 모교인 코넬대의 역사는 커크먼의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흥미로운 맥락을 제공한다. 코넬은 1865년 설립 당시부터 당시 동부의 엘리트 대학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설립자 에즈라 코넬의 비전은 "누구나 어떤 학문이든 배울 수 있는 기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랜드그랜트 대학으로서 코넬은 부유층만이 아닌 일하는

사람들도 접근 가능한 실용적 교육을 강조했고, 주요 대학 중 가장 먼저 여성을 받아들였다.


이런 평등주의적 정신은 커크먼의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 그는 근본적으로 선량하고, 실용적이며, 정당이나 이념이 아닌 사람들을 섬기는 데 헌신한다. 컬럼비아에서 가르친 도시계획과 주택정책은 상아탑의 추상적 학문이 아니라 매우 실용적이고 사람 중심적인 분야다. 이는 코넬이 강조해 온 실용 교육의 정신과도 맥이 닿아 있다. 드라마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이런 맥락에서 코넬을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버드나 예일이 아닌 코넬을 선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정생존자'는 단순한 정치 스릴러를 넘어, 우리가 어떤 리더십을 원하는지, 정치가 본래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완벽하게 정직하고, 당파를 초월하며, 증거에 기반해 결정하는 리더.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바로 그 비현실성이 우리에게 현재 정치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 드라마를 보며 우리는 잠시나마 "정치가 이럴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리고 그 희망이, 어쩌면 변화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이 드라마는 세 시즌에 걸쳐 방영되었으나, 시즌 간 캐릭터와 주제의 일관성에 문제가 있다. 특히 Netflix로 제작사가 바뀐 시즌 3에서 커크먼은 정치적 승리를 위해 진실을 숨기는 등 그가 견지해 온 정직함과 원칙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시즌 1-2에서 구축된 캐릭터의 핵심 가치와 배치된다. 이 리뷰는 ABC에서 방영된 시즌 1-2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드라마가 처음 제시한 이상주의적 비전에 초점을 맞추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창조성, 공동체주의의 다음 지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