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전 세계가 겪는 위기의 본질은 정치의 위기도, 경제의 위기도 아니다. 사회의 위기다.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민주주의인가, 성장인가? 아니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을 잃었다. 바로 사회 그 자체다.
경제는 생산과 분배의 체계이고, 정치는 권력과 통치의 체계다. 그렇다면 사회는 무엇인가? 사회는 신뢰, 규범, 연대의 체계다. 사람들이 서로를 믿고, 공유된 가치를 따르며, 함께 살아가는 능력—이것이 사회력(social power)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인류는 수많은 경제·정치 체제를 겪었다. 수렵채집, 농경, 봉건, 자본주의, 부족사회에서 제국, 민주국가로 이어지는 변화 속에서도 인류는 살아남았다. 왜였을까? 사회의 뼈대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가족이 있었고, 종교가 있었고, 공동체가 있었다.
이 세 기둥이 인간에게 안전망을 제공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신뢰의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경제가 무너져도 가족이 버텼고, 전쟁이 일어나도 교회가 피난처였으며, 정치가 혼란해도 공동체가 질서를 지켰다.
경제와 정치의 모든 힘은 사회력 위에 세워질 때만 지속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가족·종교·공동체라는 세 기둥이 동시에 흔들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력의 실종은 한국에서 특히 심각하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명 미만, 1인 가구는 전체의 3분의 1, 무종교 인구는 급증하고, 사회적 신뢰는 추락했다. 한국은 세 기둥이 서로를 끌어내리며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력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첫 세대다.
첫째, 가족은 사회력의 근간이다.
이 문제를 가장 명확히 지적한 인물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헤크먼이다. 그는 “좋은 동네보다 좋은 가정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다”라고 단언했다. 최근 그가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밝힌 연구는 분명하다. 아동의 성과를 좌우하는 것은 지역이 아니라 부모의 선택과 헌신이다. 복지국가가 부모의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다. 가족은 인간의 첫 사회이자 신뢰의 학교다.
둘째, 종교는 사회의 도덕적 토대였다.
막스 베버가 말했듯, 자본주의는 탐욕이 아니라 금욕적 직업윤리 위에서 성장했다. 종교는 근면·정직·신뢰라는 무형의 규범을 제공했다. 종교가 쇠퇴하면 사회는 의미의 공백에 빠지고, 시장은 법으로만 작동하려 한다. “무엇이 옳은가”라는 질문 자체가 사라진다.
셋째, 공동체는 사회적 자본이 형성되는 공간이다.
로버트 퍼트남은 『나 홀로 볼링』에서 미국의 사회자본 붕괴를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함께 볼링을 치지 않고, 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며, 이웃을 신뢰하지 않는다. 공동체가 사라지면 신뢰도, 호혜도, 협력의 기술도 함께 무너진다. 민주주의는 자발적 결사체에서 배우는 타협의 예술 위에 세워지지만, 그 토대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구호뿐이다.
우리는 쉼 없이 개혁을 외친다. 불평등을 줄이고, 성장을 되살리고, 민주주의를 심화하겠다고 약속하지만—세상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경제와 정치는 사회력을 전제로 작동한다. 그 토대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아무리 정교한 정책도 헛돈다.
가족이 해체되면 사람들은 미래에 투자할 이유를 잃는다. 자녀가 없으면 교육에, 가족이 없으면 저축에 의미를 느끼지 않는다. 종교가 사라지면 사회의 도덕적 규범이 증발한다. 단기 이익과 기회주의가 지배하고, 신뢰는 사라진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협력 능력이 사라진다. 정책이 아무리 좋아도 실행 주체가 없다.
한국의 상황은 특히 심각하다. 산업화 과정에서 전통적 공동체는 해체됐고, 새로운 결사체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유교적 가족 규범은 약화되었지만, 그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가족 모델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종교는 급성장과 급락을 반복하며 사회의 도덕적 중력을 잃었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 최저 출산율, 최고 자살률, 최저 사회 신뢰도를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가족·종교·공동체는 ‘좋은 것’이 아니라, 경제와 정치가 작동하기 위한 전제다. 이 토대가 무너지면 모든 개혁은 모래 위의 성이 된다.
가족, 공동체, 종교 해체의 위험을 경고한 곳은 미국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논의 자체가 빈약하다.
정치철학자 패트릭 드닌은 『자유주의는 왜 실패했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유주의는 실패해서 위기에 빠진 것이 아니라,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의 통찰은 단순하지만 날카롭다. 자유주의는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가족, 종교, 공동체 같은 중간조직을 체계적으로 약화시켰다. 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교회의 권위를 벗기고, 가부장의 지배를 끝내면서 개인의 자유를 확장했다. 그것은 분명 진보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간을 지탱하던 사회적 기반이 함께 무너졌다.
결국 남은 것은 무력한 개인, 거대한 국가, 전능한 시장뿐이다. 개인은 자유로워졌지만 고립되었다. 선택의 폭은 넓어졌지만, 그 선택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자유는 남았지만, 의미는 사라졌다. 좌파의 국가 자유주의는 평등을 위해, 우파의 시장 자유주의는 효율성을 위해 중간조직을 약화시켰다. 서로 다른 노선이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묶어주던 끈이 끊어진 것이다.
앨런 블룸이 『미국 정신의 종말』에서 지적했듯, 가치 상대주의는 진리 추구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젊은 세대를 정신적 공허 속에 빠뜨린다. 자유주의는 개인을 해방시켰지만, 개인이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래서 자유는 남았지만, 관계는 사라졌다.
시장도 국가는 사회력을 대신할 수 없다. 시장은 모든 것을 거래하지만 사랑을 만들지 못하고, 국가는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토크빌의 경고처럼, 중간조직 없는 민주주의는 전제주의로 변한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인간학적 진실이다. 인간은 원자적 개인이 아니라 관계적 존재다. 의미는 고립된 선택이 아니라 공유된 전통에서 나온다. 자유는 무구속이 아니라 소속 속에서 가능하다.
그렇다면 사회력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첫째, 교육이 다시 인간의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
앨런 블룸이 『미국 정신의 종말』에서 지적했듯, 현대 대학은 자유를 말하면서도 진리를 잃었다. 모든 가치가 상대화된 강의실에서 학생들은 무엇이 옳은지, 왜 살아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 대학은 다시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공간, 즉 진리 탐구의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 진정한 교육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의미의 회복이다.
둘째, 종교와 신앙 공동체를 사회의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수행해 온 돌봄, 빈곤 구제, 공동체 형성의 역할을 존중할 때 사회의 도덕적 토대가 복원된다.
셋째, 시민적 결사체를 재활성화해야 한다. 퍼트남이 제안했듯, 시민들은 자발적 모임 속에서 신뢰와 협력을 배운다. 오늘날 그 역할은 오프라인의 협동조합이나 마을기업뿐 아니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창작자 커뮤니티 네트워크에서도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21세기의 가족, 종교, 공동체는 과거와 다를 것이다. 더 평등하고, 더 개방적이며, 더 유연한 형태일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적 기능—안전망, 의미, 신뢰—은 변하지 않는다.
경제와 정치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사회력 위에 올바르게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사회는 가족, 종교, 공동체라는 세 기둥 위에서만 세워질 수 있다.
역사는 언제나 무너진 토대 위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본질로 돌아가는 용기다.
Heckman, James J., and Sadegh Eshaghnia. "ZIP Code Is Destiny? Turns Out That's Bunk." The Wall Street Journal, September 4, 2025.
Deneen, Patrick J. Why Liberalism Faile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18.
Bloom, Allan. 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 New York: Simon & Schuster, 1987.
Putnam, Robert D. Bowling Alone: The Collapse and Revival of American Community. New York: Simon & Schuster,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