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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 공동체주의의 다음 지평

by 골목길 경제학자

창조성, 공동체주의의 다음 지평

개인해방과 느슨한 연대를 통한 새로운 공동체 모델


1. 공동체 위기

공동체 위기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산업화와 도시화,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전통적인 사회적 유대가 약화되고 있다. 가족 구조의 변화, 종교 참여의 감소, 지역 공동체의 해체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개인들은 점점 더 고립되고 있다.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의 『혼자 볼링 하기』가 보여주듯, 시민사회 참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동호회나 종교 모임, 정치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대신 개인적 관심사에 몰두하거나 온라인 상호작용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 해체는 다양한 사회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사회적 신뢰의 하락, 정신건강 문제의 증가, 정치적 양극화의 심화, 사회적 이동성의 감소 등이 그것이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확대되었지만, 소속감과 의미의 위기는 오히려 심화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동체를 회복하기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장 쉽게 떠 올릴 수 있는 해법은 전통적인 공동체의 복원이다. 하지만 이미 사회에 의해 거부당한 공동체 문화와 제도를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공동체 모델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넘어야 할 가장 큰 관문이 공동체 창조성의 확보다.


2. 전통적인 공동체 모델: 가족, 종교, 동네의 3대 축

서구 사회학과 정치철학의 오랜 전통에서 지속가능한 공동체는 가족, 종교, 동네라는 3대 축 위에 세워진다고 보았다. 이들은 개인과 국가 사이의 중간조직(intermediate institutions)으로 기능하며, 개인의 사회화와 공동체의 결속을 담당해 왔다.


가족은 사회적 자본의 출발점이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가족을 "사회의 첫 번째 학교"라고 불렀으며,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은 가족 내에서 형성되는 신뢰와 협력의 경험이 시민사회 전체의 사회적 자본으로 확장된다고 설명했다.


종교는 초월적 의미와 도덕적 기준을 제공한다.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종교가 개인주의의 과도한 확산을 막고 공동선에 대한 관심을 유지시키는 핵심 역할을 한다고 분석했다. 막스 베버(Max Weber)도 종교적 가치가 사회 전체의 윤리적 토대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동네 공동체는 일상적 상호작용을 통해 실질적 협력을 가능하게 한다.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동네의 "눈과 발"이 자연스러운 감시와 상호부조를 통해 공동체의 안전과 활력을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이 3대 축은 서로 보완적으로 작동한다. 가족에서 배운 신뢰는 종교 공동체에서 확장되고, 종교적 가치는 동네에서 실천되며, 동네의 경험은 다시 가족과 종교 공동체를 강화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


3. 전통적 공동체 모델의 붕괴

20세기 후반부터 전통적 중간조직들은 구조적 위기를 겪기 시작했다. 사회학자들과 정치철학자들은 이를 현대성의 필연적 결과로 분석해 왔다.


가족 구조의 변화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다.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변화하는 친밀성』에서 전통적 가족이 "선택된 관계"로 재편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핵가족화, 이혼율 증가, 1인 가구 확산은 가족의 사회적 자본 생산 기능을 약화시켰다. 크리스토퍼 래쉬(Christopher Lasch)는 『자기애적 문화』에서 가족이 더 이상 사회화의 주요 기관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종교의 세속화도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막스 베버가 예견한 "세계의 탈주술화"는 현실이 되었고,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세속주의 시대』에서 종교가 개인적 선택의 영역으로 축소되었다고 설명했다. 종교 기관의 사회적 영향력은 축소되었고, 공동의 의미 체계를 제공하는 역할도 약화되었다.


지역 공동체의 해체는 도시화와 이동성 증가로 가속화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액체근대』에서 현대인들이 "뿌리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진단했다. 리처드 서넛(Richard Sennett)은 『공동체주의의 몰락』에서 도시의 익명성이 전통적인 이웃 관계를 파괴했다고 분석했다.


Allan Bloom은 『The Closing of the American Mind』에서 상대주의와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공동의 가치와 전통이 해체되면서, 개인들이 방향감각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David Brooks는 『Bobos in Paradise』와 『The Second Mountain』에서 신흥 창의계층조차 의미와 소속감의 위기를 겪고 있으며, 개인적 성취를 넘어선 더 큰 목적을 찾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들의 진단은 공통점을 보인다. 전통적 중간조직의 해체가 개인에게는 자유를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소속감과 의미의 공백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과거로의 회귀나 제도적 해법에 의존했으며, 기술 변화가 가져오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탐구하지 못했다.


4. 새로운 공동체 모델의 등장: 크리에이터 경제

전통적 중간조직의 해체가 불가역적 현실이 된 상황에서, 학자들과 실천가들은 새로운 공동체 모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다양한 공동체 실험들이 시도되었고, 이 과정에서 개인의 창조성을 통한 공동체 복원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이러한 실험들의 대표적인 현재 모델이 바로 크리에이터 경제다. 크리에이터 경제는 창작과 노동이 통합된 새로운 경제 모델로, 개인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극대화하면서도 팬덤과 커뮤니티를 통한 느슨한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19세기 윌리엄 모리스의 아르티장 유토피아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것"을 꿈꾸었다면, 크리에이터 경제는 "모든 사람이 크리에이터가 되는 세상"을 현실화하고 있다.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이 개인을 해방했듯이, 디지털 플랫폼과 창작 도구들은 창작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개인의 창조력을 증폭시킨다.


크리에이터 경제는 창조성과 연대를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 크리에이터는 자신만의 고유한 콘텐츠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팬덤과의 직접적 관계를 통해 의미 있는 공동체를 형성한다. 전통적 공동체가 동질성을 기반으로 했다면, 크리에이터 경제의 공동체는 창조성과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다.


5. 크리에이터 경제와 3대 중간조직

크리에이터 경제가 단순히 새로운 일자리나 경제 모델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공동체 복원의 동력이 되려면, 전통적인 3대 중간조직과의 연결점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핵심적 통찰이 나온다. 모든 중간조직이 개인의 크리에이터 플랫폼으로 기능할 때만 진정한 공동체 복원이 가능하다.


이는 전통적 중간조직을 폐기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가족, 종교기관, 동네 공동체라는 기존 틀을 유지하면서도, 그 작동 방식을 개인의 창조성을 지원하고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가족은 각 구성원이 자신만의 콘텐츠와 네트워크를 가지면서도, 가족이라는 플랫폼에서 서로의 창조성을 지원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전통적 가부장적 위계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다양한 창작 활동을 연결하고 증폭시키는 협력적 플랫폼으로 진화해야 한다.


종교기관은 단순한 예배 공간을 넘어 구성원들의 다양한 창작과 사회적 기여를 연결하는 허브로 기능해야 한다. 종교적 가치와 의미를 현대적 창작 활동을 통해 실현하고 공유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동네 공동체는 주민들이 각자의 전문성과 창작물을 공유하고 협업하는 로컬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골목상권도 적어도 원도심 중심부에서는 단순한 소비공간이 아니라 크리에이터들의 창작과 비즈니스가 실험되는 창조산업 생태계로 진화해야 한다.


6. 공동체주의의 미래

이렇게 재구성된 중간조직들은 느슨한 연대의 새로운 모델을 가능하게 한다. 각자는 독립적인 크리에이터로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여러 중간조직을 통해 다층적이고 유연한 연대를 형성한다.


전통적 공동체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면, 새로운 공동체는 개인의 창조성이 곧 공동체 복원의 동력이다. 개인이 더 창조적일수록 공동체는 더 풍요로워지고, 공동체가 더 다양할수록 개인의 창조성은 더 발현된다.


이는 서구의 개인주의와 동아시아의 집단주의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다. Allan Bloom과 David Brooks가 서구적 맥락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탐구했다면, 새로운 공동체 자유주의는 창조성을 매개로 한 개인과 공동체의 상생이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다.


이 모델의 핵심은 선택적 소속에 있다. 개인은 자신의 관심사와 창작 활동에 따라 여러 공동체에 동시에 참여할 수 있으며, 각 공동체에서의 역할과 기여도 다양할 수 있다. 전통적 공동체의 운명적 소속과 달리, 개인의 자발적 선택과 창조적 기여에 기반한 참여가 가능하다.


이러한 공동체주의는 현재 진행 중인 실험들을 통해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메이커 스페이스, 코워킹 공간, 크리에이터 하우스, 소셜 벤처 등이 그 구체적 사례들이다. 이들은 모두 개인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면서도 협력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새로운 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공동체주의의 미래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창조적 전진에 있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연대라는 두 가치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성이라는 매개를 통해 새롭게 통합하는 것이 21세기 공동체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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