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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종교, 공동체: 지속가능한 동네의 3대 축

by 골목길 경제학자

가족, 종교, 공동체: 지속가능한 동네의 3대 축


1. 헤크먼의 핵심 주장: 우편번호가 아니라 가족이 운명을 결정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제임스 헤크먼의 최근 칼럼 "ZIP Code Is Destiny? Turns Out That's Bunk"는 현대 사회의 가장 뿌리 깊은 착각을 정면으로 도전한다. 바로 "좋은 동네로 이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1990년대 미국의 "Moving to Opportunity" 실험은 이 믿음의 대규모 검증이었다. 저소득 가정들을 고빈곤 지역에서 더 나은 동네로 이주시켰지만, 성인의 고용 성과나 청소년의 교육 성과에는 별다른 개선이 없었다.

헤크먼의 연구는 더 놀라운 사실을 보여준다. 양부모 가정이 많은 지역일수록 사회적 이동성이 높지만, 핵심은 자신의 부모가 결혼한 상태더라도 한부모 가정이 많은 지역에서 자란 아이는 소득 계층을 올라갈 가능성이 낮다는 점이다.


페리 프리스쿨 프로젝트의 후속 연구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성공한 2세대 참가자들의 공통점은 양부모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페리 프로그램의 진정한 혜택은 2세대에서 안정적 결혼을 증가시킨 것이었다.

결론은 명확하다. 우편번호는 운명이 아니다. 가족이 운명이다.


2. 동네 효과의 재해석: 구성원 효과 vs 상호작용 효과

헤크먼의 연구는 동네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 효과의 메커니즘을 새롭게 해석한다. 동네 효과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구성원 효과(Composition Effect)
어떤 사람들이 그 동네에 사는가의 문제다. 안정적인 가족, 교육 수준이 높은 부모, 헌신적인 시민이 많은 동네일수록 모든 주민이 긍정적 영향을 받는다. 헤크먼의 연구는 바로 이 구성원 효과가 압도적으로 중요함을 보여준다.


상호작용 효과(Interaction Effect)
주민들 간의 만남과 네트워크다. 이웃과의 교류, 정보 공유, 상호 지원, 공동 활동이 개별 가정에 영향을 미친다.


헤크먼은 상호작용 효과를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효과만 지나치게 강조하며 구성원 효과를 간과해 온 점이다. 시설을 늘리고 프로그램을 강화하면 상호작용이 개선될 것이라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취약하다.


결론적으로 두 효과는 상호 보완적이지만, 순서가 있다. 먼저 건강한 가족이 있어야 건강한 상호작용이 가능하다. 불안정한 가족 구조에서는 아무리 상호작용을 늘려도 지속가능한 변화는 어렵다. 따라서 정책의 우선순위는 가족을 세우는 데 있다.


3. 종교의 역할: 동네의 정신적 기반과 사회적 허브

헤크먼의 연구는 가족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한 가지가 빠져 있다. 바로 종교다. 종교는 동네의 구성원 효과와 상호작용 효과 모두에 기여하는 핵심 주체다.


첫째, 종교는 초월적 의미와 도덕적 기준을 제공한다. 세속적 가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목적과 윤리적 토대가 종교를 통해 공유된다. 이는 위기 속에서도 동네가 결속을 유지하게 한다.


둘째, 종교는 사회적 허브다. 교회·성당·사찰 같은 종교기관은 동네의 앵커로서 주민들이 정기적으로 모이고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예배, 봉사, 돌봄을 통해 신뢰와 상호 지원의 문화가 형성된다.


셋째, 종교는 갈등을 치유하고 화해를 촉진한다. 용서와 나눔, 희생 같은 종교적 가치는 행정이나 시장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기능이다.


세속화는 종교의 기능을 약화시켰지만, 그 빈자리는 여전히 크다. 의미의 공백, 도덕적 혼란, 공동체 단절은 종교가 제공하던 자원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동네를 위해 종교는 정신적 기반이자 사회적 허브로 다시 인정되어야 한다.


4. 지속가능한 동네의 3대 축: 개인과 동네를 연결하는 중간 조직

지속가능한 동네는 가족, 종교, 공동체라는 세 기둥 위에 세워진다. 이들은 모두 개인과 동네를 연결하는 중간조직이다. 개인은 이 조직들을 매개로 동네와 관계를 맺고, 동네의 규범과 가치는 이들을 통해 개인에게 전달된다. 개인의 영향은 산발적일 수 있으나, 중간조직은 제도와 활동을 통해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효과를 낸다.


가족은 사회적 자본의 출발점이다. 안정된 가정은 개인에게 안전망과 문화적 자산을 제공하며, 동네 전체의 신뢰와 협력을 가능하게 한다.


종교는 초월적 의미와 도덕적 기준을 제공하며, 종교기관은 주민들이 교류하고 협력하는 사회적 허브가 된다.

공동체는 학교, 상권, 주민 모임 같은 네트워크를 통해 가족과 종교를 더 큰 협력망으로 묶는다. 일상의 교류 속에서 실질적 상호 지원이 실현된다.


이 세 기둥은 어느 하나로 다른 것을 대체할 수 없다. 가족 없는 종교는 공허하고, 종교 없는 가족은 쉽게 흔들리며, 공동체 없는 둘은 고립된다. 세 축이 균형 있게 작동할 때 개인과 동네는 함께 번영할 수 있다.


결론: 본질로 돌아가는 용기

헤크먼의 칼럼이 던지는 근본적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정말 지속가능한 동네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 기초가 되는 가족, 종교,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현대 사회는 이런 질문들을 회피해 왔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절대시하면서, 가족에 대한 헌신을 구속으로, 종교적 가치를 미신으로, 공동체적 책임을 억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헤크먼의 연구와 우리의 분석은 이 가치들이야말로 진정한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임을 보여준다.


지속가능한 동네는 가족, 종교, 공동체라는 세 기둥 위에서만 세워질 수 있다. 다른 길은 없다. 이제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참고문헌

Heckman, James J., and Sadegh Eshaghnia. "ZIP Code Is Destiny? Turns Out That's Bunk." The Wall Street Journal, September 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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