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화라는 이름의 선택
1950년대, 미국 정치학은 혁명을 맞이했다. 행태주의(Behaviorism)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 혁명의 목표는 명확했다. 정치학을 과학으로 만드는 것. 측정 가능하고, 예측 가능하며, 검증 가능한 학문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 이후 1980년대에는 합리적 선택 이론(Rational Choice Theory)이 등장하며 이러한 과학화의 흐름을 더욱 가속화했다.
과학화는 분명 매력적인 목표였다. 더 이상 규범적 논쟁에 머물지 않고, 실증적 데이터로 정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과학화를 위해서는 인간의 복잡한 동기를 단순화해야 했다.
그리고 합리적 선택 이론이 선택한 가정은 명료했다. 모든 정치인은 선거 승리 확률을 극대화한다. 이 가정 하에 세워진 가설들은 놀라운 설명력을 보였다. 특히 중위투표자 정리는 정당의 이념적 수렴 현상을 설명하며 정치학은 드디어 과학이 된 것처럼 보였다.
합리적 선택 이론이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된 현상 중 하나는 바로 미국 의원들의 투표 행태였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의원들은 재선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 지역구 이익은 이러한 투표 행태 분석에서 핵심 변수로 작용했다.
이론이 현실을 만들 때
대학원 시절, 나는 교수님께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이런 가정과 가설이 실제 정치인의 행동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가설 설정을 위한 가정이 오히려 실제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정치학 이론이 "정치인은 개인 이익을 추구한다"라고 말한다면, 정치인 스스로도 "나도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내가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미국이나 한국이나 "선거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것이 상식으로 통한다. 다양한 정당이 경쟁하는 민주주의에서 항상 이길 수는 없는데도 말이다. 건강한 민주주의라면 져도 일상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런 시스템 하에서 경쟁은 정책 경쟁이 되어야 하고, 져도 올바르게 지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기술화: 정치는 어떻게 기술이 되었나
정치학 과학화의 영향은 이론에만 머물지 않았다. 실제 정치 행태도 변했다. 단순히 이기는 것을 넘어, 이기기 위한 모든 기술을 개발하고 동원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 공학이 정치 현장에 자리 잡았다.
이런 분위기 전환과 함께 정치 전문가의 성격도 바뀌었다. 정치철학자나 정치학자보다는 폴스터(여론조사 전문가), 선거 전략가, 데이터 분석가 같은 정치공학 전문가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무엇이 옳은가"보다 "무엇이 이기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됐다.
정치는 이제 하나의 기술(技術)이 됐다. 어떤 메시지가 어느 집단에게 먹히는지, 어떤 타이밍에 어떤 이슈를 제기해야 하는지, 어떻게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해야 하는지. 정치는 공동체의 선을 추구하는 행위에서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기술 체계로 변모했다.
대중문화도 이런 변화를 포착했다. 정도를 따르는 고귀한 품격의 정치인보다는, 여론조사에 민감하고 미디어 이미지 관리에 능숙한 정치인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탈진실화: 이기기 위해서라면 진실은 필요 없다
기술화의 끝에는 더 심각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탈진실(post-truth)의 정치다. "정치인은 이기려 한다"는 과학적 가정에서 시작해, "이렇게 하면 이긴다"는 기술로 발전했고, 결국 "이기기 위해서라면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단계에 도달했다. 객관성과 실증을 추구했던 과학화가 역설적으로 사실과 진실을 무시하는 정치로 귀결된 것이다.
가짜뉴스,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 감정에 호소하는 포퓰리즘. 사실 확인보다는 감정적 공감이, 정책 논쟁보다는 진영논리가 정치를 지배하게 됐다. PC(Political Correctness) 논쟁과 그에 대한 반발 모두 진정한 정책 토론을 대체하며, 정치를 표면적 언어 싸움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흐름의 극단에는 법과 규범을 무시하는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이 있다. 권력 획득과 유지를 위해서라면 민주적 절차마저 훼손하는 정치인들. 2013년 방영된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는 이런 정치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놀랍게도 드라마는 예언이 됐다. 허구 속 정치인들이 현실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제 사람들은 정상적인 도덕적 잣대로 정치인을 평가하기가 어렵다고 느낀다. "정치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냉소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과학과 도덕 사이에서
정치학의 과학화는 분명 성과를 냈다. 정치 현상을 더 정확하게 측정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잃었다.
바로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유교 전통이 강조했던 정치의 윤리적 토대다. 정치인은 단순히 권력을 얻는 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선을 추구하는 자여야 한다는 원칙 말이다. 측정하기 어렵고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우리는 이를 포기했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측정 가능한 승리 확률이 측정하기 어려운 진정성을 압도했고, 기술이 윤리를 대체했다.
문제는 과학화 그 자체가 아니었다. 과학화가 의도하지 않게 기술화로, 다시 탈진실화로 이어진 것이 문제였다. 이런 결과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정치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단순히 설명력을 높이는 과학화에 그치지 않고, 윤리적 판단을 돕는 과학화가 필요하다.
로버트 퍼트넘, 사무엘 헌팅턴, 프란시스 후쿠야마와 같이 현실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정치학자들은 모두 도덕적 토대 위에서 과학적 분석을 수행했다. 그들은 학자의 가치에 기반한 이상적인 질서나 시스템을 설정한 후, 이를 실현하지 못하는 현실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분석하며 그 차이를 줄이고자 했다.
이처럼 "어떻게 이기는가"를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정치가 공동체에 이로운가"를 실증적으로 탐구하는 정치학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길이다.
정치학의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과학과 도덕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균형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