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자동차 산업 최강국이다. 도요타, 혼다, 닛산, 스즈키 등 글로벌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으며, 글로벌 판매 1위인 도요타는 2024년 전 세계에서 1,082만 대의 차량을 판매했다. 도요타 단독으로도 대부분의 국가 전체 생산량을 압도하는 규모다.
그런데 일본의 수도 도쿄는 자동차 이용 비중이 매우 낮은 도시다. 도쿄의 교통수단 분담률을 보면 철도가 36.7%, 도보가 27.3%, 자전거가 16.3%를 차지한다. 자동차는 고작 14.2%에 불과하다. 일본은 자동차를 대량생산하면서도 수도는 자동차 없이 사는 도시를 만들었다. 이 역설적인 상황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도쿄가 동네 중심의 보행 도시로 성장한 데는 세 가지 요인이 작동했다: 역사문화적 기원, 자연환경의 제약, 그리고 교통정책의 선택이다.
도쿄의 보행 중심 도시구조는 단기간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 뿌리는 400년 전 에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도 로우시티에서 형성된 콤팩트한 동네 구조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도쿄의 공간 골격으로 계승되었고, 20세기 철도 개발 시기에는 ‘역 중심 생활권’으로 재구성되었다.
도쿄의 전신인 에도는 교토나 오사카와 다른 성격의 도시였다. 교토가 황실과 귀족의 도시였고 오사카가 일본 상업의 중심지였다면, 에도는 무사의 도시였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열면서 에도성 주변에는 산킨코타이(參勤交代, 다이묘가 정기적으로 에도에 체류하는 제도) 제도에 따라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저택이 들어섰고, 이른바 야마노테(山手, High City) 지역이 형성되었다.
에도 역사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Edward Seidensticker)가 명명한 이 '하이시티'는 고지대에 위치한 무사 계급의 거주지였다. 반면 저지대에는 시타마치(下町, Low City)가 형성되었다. 1603년 이후 간다산을 허물어 저습지를 매립하면서 니혼바시를 중심으로 광대한 시가지가 조성되었다. 니혼바시는 에도와 교토를 잇는 고카이도 도로의 기점으로, 여기서 남북으로 신바시, 교바시, 니혼바시, 간다를 가로지르는 번화가가 형성되었다.
로우시티에는 여러 지방의 상인들과 장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며 막부와 다이묘에게 물자와 노역을 조달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직업과 출신지별로 특정 구역에 모여 살았다는 점이다. 스루가초, 오와리초, 가가초 등의 마을 이름은 각 토목공사를 담당한 다이묘의 국명에서 따온 것이고, 각 마을(초)은 동업자 중심의 자치적 공동체로 기능했다.
이러한 직업·계급 중심의 콤팩트한 마을 구조가 에도 특유의 동네 문화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일터와 주거지가 가까운 도보 생활권 안에서 살았고, 각 동네는 필요한 상점과 서비스를 갖춘 자족적 단위였다. 1657년 메이레키 대화재 이후 에도는 방재 도시로 재편되면서 도로를 확장하고 료고쿠바시를 건설했지만, 마을 단위의 콤팩트한 공동체 구조 자체는 유지되었다.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도쿄는 급속한 근대화를 겪었다.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전차가 개통되면서 로우시티의 전통문화는 일부 약화되었다. 그러나 파리나 뉴욕처럼 대규모 재개발을 통해 도시를 완전히 뒤엎지는 않았다.
이러한 제한은 기술적 한계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은 아직 내진 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다.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없었기에 에도 시대의 좁은 가로망과 저층 건물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과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도시가 두 차례 파괴되었지만, 재건 과정에서도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한 전면 재개발은 자제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가로 체계 위에 다시 저층 주택을 올리는 방식으로 도시가 복구되었다.
결과적으로 에도 로우시티의 콤팩트한 동네 구조는 근대 도쿄로 이어졌다. 직업 중심의 집주 관행은 사라졌지만, 도보 생활권 단위의 자족적 동네라는 공간 구조는 20세기 내내 도쿄의 기본 골격으로 남았다. 이것이 철도 개발 시기에 '역 중심 생활권'이라는 형태로 재생산되는 토대가 되었다.
도쿄가 저층 도시 구조를 유지하게 된 데는 자연환경의 제약이 결정적이었다. 반복되는 지진과 화재는 고층 건축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도쿄는 수평으로 확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형성된 저층 확산 구조는 역설적으로 대량 수송 수단으로서 철도 건설을 필수 조건으로 만들었다.
1600년부터 1945년까지 에도/도쿄에는 25~50년 주기로 대규모 재해가 발생했다. 1657년 메이레키 대화재는 1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1923년 관동 대지진은 14만 명이 사망했으며,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도시의 절반이 파괴되었다.
이러한 재해 경험은 도쿄의 건축 형태를 근본적으로 규정했다. 고층 건축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목조 2~3층 주택과 5~7층 저층 맨션을 중심으로 한 저층·중밀도의 도시가 재건되었다.
저층 건축 중심의 건축환경은 나아가 도쿄의 교통체계를 결정했다. 도쿄는 저층 구조를 유지하며 교외로 확장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대량 수송 수단으로서 철도 건설을 필수적으로 만들었다. 재해 대응을 위한 저층 선호가 역설적으로 철도 중심 도시를 만든 것이다.
저층 도시 구조가 철도를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면, 일본 정부의 교통정책은 그 철도망을 어떻게 건설하고 운영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핵심은 민간 철도 회사에게 역세권 개발권이라는 경제적 특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 선택이 도쿄를 자동차가 아닌 철도 중심 도시로 만들었다.
앞서 본 것처럼, 저층 도시 구조의 유지는 철도 건설을 불가피하게 했다. 하지만 정부 재정만으로는 광대한 철도망을 구축할 수 없다.
일본 정부는 민간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매우 강력한 제도적 인센티브를 도입했다. 민간 철도 회사에게 노선 개발권과 함께 역 주변 부동산 개발권을 부여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인센티브가 아니라 상당한 경제적 특권이었다. 철도 회사는 운임 수입뿐만 아니라 역세권 개발을 통해 막대한 추가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일본 최초의 사철은 1881년 설립된 일본철도였지만, 1906년 철도국유화법으로 주요 간선이 국유화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도쿄 교외 개발을 위해 새로운 사철들이 등장했다. 도큐, 세이부, 도부, 오다큐, 게이오, 게이큐, 게이세이 등 9개의 대형 사철이 도쿄 근교에 철도망을 건설했다. 1927년에는 도쿄 최초의 지하철(아사쿠사~우에노)이 개통되었다. 이후 도쿄의 철도망은 지상 철도인 사철 및 국철(현 JR)과 지하철(도쿄 메트로, 도에이 지하철)이 결합된 통합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도쿄의 사철은 단순히 철도만 운영하지 않았다. 역 주변에 주택지를 개발하고, 백화점과 상업시설을 건설하며, 학교와 병원까지 유치했다. 철도 회사가 주택, 비즈니스, 소매, 문화시설을 수직적으로 통합하는 사업 모델을 확립한 것이다.
이러한 역세권 개발 전략은 각 동네의 자족성을 극대화했다. 역에서 도보 10~15분 거리에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갖춰졌다. 출퇴근은 철도로 하고, 일상생활은 역 주변에서 완결되는 구조였다. 자동차가 없어도 생활에 불편이 없었다.
역세권 경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국철도 1987년 민영화 이후 JR로 재출범하면서 역 상업시설 개발에 적극 나섰다. 도쿄역, 신주쿠역 등 주요 터미널역에 대형 쇼핑몰이 들어섰다. 결과적으로 저층-철도-역세권이라는 3박자 구조가 도쿄 동네의 프로토타입이 되었다.
도쿄가 보행 도시를 유지하는 최종 장치는 1962년에 도입된 차고증명제도(車庫証明制度)다. 이 제도는 자동차를 구매하려면 반드시 주차 공간을 확보해야 하며, 그 주차 공간이 거주지에서 500m 이내에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주차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자동차 등록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제도는 물리적 제약과 정책적 선택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좁은 가로망에 노상 주차를 허용하면 교통마비가 불가피했다. 동시에 역세권 개발로 막대한 자산을 축적한 철도 회사들이 자동차 중심 개발을 반기지 않았을 것이다. 차고증명제도는 자동차 산업의 성장을 국내가 아닌 수출로 유도하는 정책적 선택이었다.
결과적으로 도쿄의 주차 비용은 월 3~5만 엔(약 30~50만 원) 수준이다. 불법 주차를 하면 1~1.8만 엔의 벌금이 부과되는데, 이는 한국의 3배 수준이다. 도쿄에서 자동차를 소유하고 운행하는 것은 매우 비싼 선택이다.
주차 규제는 공급(주차 공간 확보 의무)과 수요(높은 주차 비용) 양 측면에서 자동차 소유를 구조적으로 억제한다.
도쿄의 도시 진화가 만들어낸 결과는 ‘대중교통 중심의 동네기반 저층·중밀도 도시', 즉 TNM(Transit-Neighborhood-Mid-Density) 도시다. 1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도쿄의 기본 단위는 동네이며, 이는 에도 시대의 마을 공동체 구조에서 기원한다. 2장에서 보았듯이 이러한 동네는 저층·중밀도라는 일관된 물리적 구조 위에 자리 잡고 있고, 3장에서 다룬 철도 중심의 대중교통 시스템은 이 동네들을 촘촘히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이 세 요소가 결합하여 도쿄는 TNM 도시라는 독특한 도시 모델을 형성하게 되었다.
도쿄의 도시 모델은 이처럼 동네 기반 구조, 저층·중밀도 환경, 대중교통 중심 시스템이 서로를 전제하는 하나의 통합된 구조다. 이 세 요소는 단일한 기원이 아니라, 에도의 역사적 유산, 자연재해, 그리고 교통정책이라는 서로 다른 요인이 결합해 형성된 복합적 산물이다.
동네 구조, 저층·중밀도, 대중교통은는 서로 고립된 특징이 아니다. 이들이 결합될 때 비로소 도시의 기본 작동 원리를 형성한다. 도쿄의 동네는 생활 기능이 보행 가능한 거리 안에서 완결되는 단위이며, 이러한 동네들이 대중교통을 통해 병렬적으로 연결되면서 거대한 생활권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 도시의 중심부와 주변부가 위계적으로 서열화되는 것이 아니라, 동네가 기본 단위로 작동하는 구조가 도시 전체의 조직 원리가 된다.
저층·중밀도 환경은 이러한 동네 구조가 유지될 수 있는 물리적 토대다. 고층·초고밀 도시에서 흔히 나타나는 주거–상업 분리나 기능 단절이 적고, 도보 생활권이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23구 전역에 걸친 밀도의 균일성은 우연이 아니라 역사적 선택과 기술적 제약이 만들어낸 결과이며, 이 균일성 덕분에 동네 단위의 생활권이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갈 수 있었다. 바로 이 물리적 환경이 TNM 도시의 지속성을 뒷받침한다.
철도 중심의 대중교통 체계는 이러한 동네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순환 시스템이다. 저층·중밀도 도시에서 자동차보다 철도가 효율적이라는 구조적 조건 위에서, 사철–지하철–JR로 구성된 통합 철도망은 거대 중심부로의 집중을 억제하면서도 동네 간 이동성을 확보한다. 이는 동네의 자족성과 도시 전체의 통합성을 동시에 유지하는 도쿄만의 도시 작동 방식이며, 세 요소가 결합할 때 비로소 하나의 체계로 완성된다.
일본은 1960~80년대 자동차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면서도, 도시정책에서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산업정책은 수출을 위한 자동차 생산에 집중한 반면, 도시정책은 철도와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그리고 보행 환경을 중심으로 한 TNM 도시 구조를 선택했다.
이 분리 전략 덕분에 일본은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했다. 자동차를 만들어 수출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루는 동시에, 자동차 없이 걷고 철도를 이용하는 쾌적한 도시를 만든 것이다. 철도 회사들의 경제적 영향력은 자동차 중심 도시로의 전환을 구조적으로 제한했으며, 정부는 이 균형을 정책적으로 제도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