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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치조지의 상권 디자인

by 골목길 경제학자

기치조지의 상권 디자인


완벽한 골목상권을 찾아서

2017년, 나는 골목길 자본론에서 기치조지를 "완벽한 골목상권"이라고 극찬했다. 도쿄 시민들이 2005년부터 2015년까지 11년 연속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동네로 선택한 곳. 모든 것이 다 가능한 곳이라는 무사시노시의 소개는 과장이 아니었다.


당시 기치조지를 완벽하게 만든 요인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임대료 안정, 둘째는 상권 디자인이었다.

임대료 안정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무라(村) 정신으로 대표되는 공동체 문화, 사찰이라는 비영리 대지주의 존재, 주거지역의 상업 용도 전환을 견제하는 주민들의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1991년 버블 붕괴 이후 30년 가까이 지속된 부동산 침체가 구조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을 억제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상황은 변했다. 2024년 기준으로 기치조지는 여전히 '살고 싶은 동네' 상위권이지만, 2010년대 후반부터 임대료가 상승했고 관광객도 크게 늘었다. 기치조지역에서 니시오기쿠보역까지 고가하 재개발도 진행 중이다. 과거의 '완벽한 균형'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임대료가 아니라 상권 디자인이다. 기치조지가 보여준 네 가지 설계 원칙은 부동산 시장의 변동과 무관하게 작동할 수 있는 도시 디자인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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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선 설계 (Circulation): 전통시장을 통과하는 길

기치조지역 북쪽 게이트를 나서면 광장이 나온다. 그리고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역에서 백화점으로 가려면 반드시 전통 상점가를 지나야 한다는 것을.


이것은 법적 규제가 아니다. 도시 조례가 그렇게 강제한 것도 아니다. "현대식 유통과 골목 상권이 공존해야 도시가 경쟁력을 갖는다"는 공동체 전체의 합의가 만들어낸 동선이다.


한국의 많은 상권에서 역 출구는 곧바로 대형 쇼핑몰이나 백화점으로 연결된다. 또는 넓은 대로를 따라 프랜차이즈 매장들이 즐비한 메인스트리트가 형성된다. 유동인구는 그곳에 집중되고, 골목 안쪽의 독립 가게들은 고사한다.


기치조지는 정반대다. 가장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동선 위에 전통시장 선로드가 있다. 아케이드형 지붕 아래 양쪽으로 다양한 가게와 음식점이 늘어서 있다. 백화점에 가려는 사람도, 쇼핑몰에 가려는 사람도, 일단 이 전통 상점가를 경험한다.


동선이 곧 경제다. 사람의 흐름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누가 살아남고 누가 도태되는지가 결정된다. 기치조지의 동선 설계는 가장 약한 고리인 전통시장을 가장 강한 위치에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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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계 설계 (Interface): 담 없는 백화점

기치조지에서 두 번째로 놀라운 것은 백화점과 골목의 관계다.


한국에서 백화점은 대개 거대한 건물로 골목과 단절되어 있다. 담벽이 있거나, 넓은 주차장이 있거나, 최소한 넓은 보도가 백화점과 골목 사이를 갈라놓는다. 백화점은 하나의 독립된 성(城)처럼 골목상권과 분리된다.


기치조지는 다르다. 백화점이 담벽이나 주차장 없이 골목길에 바로 면해 있다. 역 북쪽의 파르코 백화점과 동급백화점, 역 남쪽의 마루이 백화점 모두 골목과 직접 접한다.


이 설계가 만들어내는 효과는 강력하다. 대형 매장과 작은 가게를 자연스럽게 오가는 동선이 만들어진다. 백화점에서 나온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골목으로 흘러든다. 골목을 걷던 사람들은 문턱 없이 백화점으로 들어간다.


경계를 어떻게 디자인하느냐가 공존을 결정한다. 높은 담은 독점을 만들고, 낮은 경계는 순환을 만든다. 기치조지의 백화점들은 골목상권의 적이 아니라 이웃으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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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프랜차이즈 배치 (Placement): 골목 속의 유니클로

기치조지를 걷다가 유니클로 앞에서 나카미치(중도통리) 쇼핑거리가 시작되는 것을 보았을 때의 놀라움을 잊을 수 없다.


한국에서 유니클로는 대로변 코너 자리를 차지한다.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곳, 가장 시야가 트인 곳,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곳. 프랜차이즈는 당연히 프리미엄 입지를 선점한다.


그런데 기치조지의 유니클로는 역 북쪽 출구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나카미치 거리 입구에 있다. 7층짜리 건물 전체가 유니클로지만, 이 건물은 대로변 독점이 아니라 골목 상점가의 시작점에 서 있다. 유니클로 옆에서 중도통리가 시작된다. 독립 가게들이 모여 있는 개성적인 쇼핑거리로 들어가는 관문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더 놀라운 것은 유니클로가 2014년 이 매장을 오픈하면서 취한 전략이다. 광고에 기치조지 지역 주민들과 상인들을 등장시켰다. 7층에는 '기치조지 스페셜 플로어'를 만들어 지역 안경점과의 콜라보레이션 상품을 전시하고, 나카미치 상점회의 신사 미코시(神輿)까지 디스플레이했다. "지역 밀착형 매장"을 표방하며 기치조지라는 동네 속으로 녹아들려 했다.


이것은 단순히 유니클로의 선택이 아니다. 상권 전체가 프랜차이즈를 골목 생태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되, 그들이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도록 배치를 통제한 결과다.


프랜차이즈를 어디에 두느냐가 골목의 운명을 결정한다. 대로변에 집중시키면 골목은 죽는다. 골목 입구에 적절히 배치하면 공존이 가능하다. 기치조지는 프랜차이즈조차 골목 설계의 일부로 통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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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상권 구획 (Zoning): 정체성의 영토

기치조지의 가장 놀라운 설계는 상권 구획이다.


역 북쪽 광장을 중심으로 세 갈래 길이 뻗어 있다. 왼쪽으로 가면 하모니카 요코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암거래 시장으로 시작된 이곳은 작은 상점 100여 개가 다닥다닥 붙어 하모니카 구멍처럼 보인다. 서민적이고 거친 매력의 골목이다.


정면으로 가면 선로드 전통시장. 아케이드 지붕 아래 실용적인 가게들이 늘어선 일상의 시장이다. 서쪽으로 가면 중도통리 쇼핑거리. "상점마다 고유한 분위기와 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의 그림처럼 잘 어울린다"는 평을 받는 약 540m 길이의 현대적 상점가다.


역 남쪽으로 가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이노카시라 공원으로 연결된 나나이바시도리는 '미니 하라주쿠'라 불릴 만큼 젊은이들 취향의 거리다. 잡화점, 인테리어 용품, 카페, 레스토랑이 자유롭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만든다.


그리고 백화점과 쇼핑몰 지역은 따로 구획되어 있다. 역 북쪽에는 파르코와 동급백화점이, 역 남쪽에는 마루이 백화점이 자리잡고 있다. 역과 직결된 아트레와 키라리나 케이오 같은 역세권 쇼핑몰도 각자의 영역에서 성업한다.


각기 다른 상권이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며 공존한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전통시장은 신선식품을, 대형마트는 공산품을 판매하는 식으로 분업한다. 하모니카 요코초의 거친 매력이 중도통리의 세련됨을 침범하지 않고, 백화점의 화려함이 전통시장의 소박함을 압도하지 않는다.


이것이 상권 구획의 힘이다. 획일화가 아니라 다양성. 독점이 아니라 공존. 단일 메인스트리트가 아니라 다층적 상권 구조.


상권 디자인이라는 솔루션

한국은 지금 자영업 위기로 고민하고 있다. 정부는 금융 지원, 임대료 규제, 업종 전환 지원 등 다양한 정책을 쏟아낸다. 하지만 누구도 상권 디자인을 말하지 않는다.


자영업자 10명 중 7명이 상권에서 매장을 운영한다. 도소매업, 숙박·음식점업, 교육서비스업, 보건업, 개인서비스업. 이들의 매출은 상권 경쟁력에 달려 있다.


상권 건축물의 힘이 사람을 끌어모은다. 하지만 건축물만으로는 부족하다. 가로와 동선 설계가 그만큼 중요하다.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하다.


좋은 건축물이 있어도 동선이 잘못되면 죽는다. 매력적인 가게가 있어도 경계가 단절되면 고립된다. 훌륭한 프랜차이즈가 있어도 배치가 잘못되면 생태계를 파괴한다. 다양한 상권이 있어도 구획이 없으면 획일화된다.


기치조지는 이 모든 것을 보여준다. 동선 설계, 경계 설계, 프랜차이즈 배치, 상권 구획. 이것이 상권 디자인의 네 가지 핵심 요소다.


기치조지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상권 디자인이라는 솔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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