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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트리피케이션 없는 완벽한 골목상권

도쿄 기치조지

by 골목길 경제학자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잡지 모노클(Monocle)이 2014년 ‘완벽한 도시 구역(The Perfect City Block)’을 도해한 포스터를 공개했다.


모노클의 완벽한 블록은 마치 런던의 한 거리를 옮겨 놓은 듯하다. 저층의 타운하우스, 그 뒤에 위치한 작은 공원, 루프탑 테라스와 태양광 패널, 다양한 유형의 건축물과 아기자기한 상점이 가득한 꾸러미 같은 거리. 우리가 좋아하는 거리의 전형이다.


모노클 '완벽한 도시 구역' 포스터 (Source: Monocle)


포스터를 보며 상상해본다.


가장 완벽한 골목상권은 어디일까?


뉴욕, 런던, 파리, 도쿄의 여러 상권이 유력 후보로 떠오른다. 그래도 도쿄에서 한 곳을 선택해야 할 것 같다. 골목상권 자원이 가장 풍부한 도시가 도쿄이기 때문이다. 모노클도 2015년 가장 살 만한(most livable) 도시로 도쿄를 선정하지 않았던가.


수많은 도쿄 골목상권 중에서 모든 기준을 충족하는 이상적인 곳을 고르기란 쉽지 않다. 다행히 도쿄 시민들이 2005-2015년에 걸쳐 11년 연속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동네로 뽑은 곳이 있다.


도쿄 서부 교외 도시 기치조지다.


기치조 속한 무사시노시는 이 지역을 이렇게 소개한다.


기치조지는 모든 것이 다 가능한 곳이다.


도쿄 시민이 선망하는 도시, 기치조지의 비결은 무엇일까?


안정된 부동산 시장과 공동체 정신으로 유지하는 다양하고도 개성 있는 상권이다.


특히, 1991년 자산 버블이 터진 후 고착화된 상업용 부동산의 과잉 공급이 독립 가게들에게 임대료 압박 없는 영업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상권 다양성과 정체성에 크게 기여했다. 매력적인 도시 문화 발전에 경기 침체가 오히려 득이 된 것이다.


기치조지 주택가 (사진-박상애)


까다로운 도쿄 시민들도 반한 기치조지


도쿄 시민들이 기치조지를 꼽은 이유는


위치와 교통, 교육, 공원과 문화시설, 그리고 상권이다.


기치조지는 3개의 전철 노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 시부야, 신주쿠 등 도쿄 시내로의 출퇴근이 용이하다.


도시 전역이 조용하고 전원적인 주택가여서 훌륭한 양육 환경을 제공한다. 중심 상권을 조금만 벗어나면 공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무사시노 학군이 좋은 것도 아이를 가진 가정이 이곳을 선호하는 이유다.


이노카시라 공원


도쿄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이노카시라 공원도 도시의 자랑이다. 공원 남쪽에는 일본 만화 산업의 성지, 지브리 미술관이 위치해 있다. 최소 한 달 전에는 예약을 해야 입장이 가능한 곳이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명성을 느낄 수 있어 항상 많은 관람객으로 붐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제작소, 지브리 스튜디오도 1985년 이곳에서 창업했다. 한적한 교외 도시였던 기치조지는 만화가나 재즈 뮤지션들이 모여들면서 일본 만화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지금도 비 트레인(Bee Train), 코아 믹스(Coamix) 등 다수의 만화 기업들이 이곳에 본사를 두고 있다.


기치조지 상가 지도


이상적인 골목상권, 기치조지


기치조지의 매력은 무엇보다 활기찬 상권의 다양성이다. 에도 시대를 연상케 하는 좁은 길의 상가, 전통시장, 고급 골목상권, 청년문화거리, 백화점과 쇼핑몰 등 풍부한 유형의 상권들은 고유의 개성을 간직한 채 공존한다.


"모든 것이 다 가능한 곳"

"젊음과 자유, 여유로움이 살아있는 곳"

"한 번쯤 살아 보고 싶은 곳"


여행자들의 찬사가 끊이지 않는 기치조지 골목은 완벽에 가깝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모니카 요코초 (사진-김동민)


중심상권은 크게 북부와 남부로 나뉜다. 역 북쪽 게이트로 나오면 바로 맞닥뜨리는 곳이 광장이다. 왼쪽이 종로의 피맛골을 연상하게 하는 ‘하모니카 요코초’다. 작은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이 하모니카 구멍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암거래 시장으로 시작된 상가는 현재 100여 개의 개성 있는 독립 가게가 영업하는 관광 명소다.


아케이드형 전통시장 선로드 입구


광장 정면에는 또 다른 상가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일본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케이드형 전통시장 '선로드(Sun Road)'다. 선로드를 따라 북쪽으로 걸어가면 길 양쪽으로 다양한 가게와 음식점을 만날 수 있다.


하모니카유코초와 선로드가 북서쪽 상가라면, 북동쪽에는 전형적인 도쿄 쇼핑 거리인 ‘나카미치’가 자리 잡고 있다. 한 여행 안내서는 이 길을 "상점마다 고유한 분위기와 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의 그림처럼 잘 어울려진다"라고 소개한다. 유명 커피 체인점과 대기업 브랜드가 잠식한 천편일률적 골목상권과 확연히 다르다.


이노카시라 공원에서 기치조지역으로 향하는 거리


대표적인 남부 상권은 이노카시라 공원으로 연결된 ‘나나이바시도리’다. 전통시장, 백화점, 전문점이 즐비한 북쪽 상가와는 달리 이 곳은 '미니 하라주쿠'라고 불릴 만큼 젊은이들 취향의 잡화점, 인테리어 용품, 카페, 레스토랑 등이 즐비하다. 자유롭고 여유로운 기치조지의 청년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기치조지 상권의 특별함은 전통시장과 독립 가게로 채워진 골목길과 백화점과 대형 쇼핑몰이 들어선 대로의 공존이다.


도큐, 마루이, 파르코 백화점뿐만 아니라 기라리나 게이오, 아트레 등 대형 쇼핑몰 등이 성업 중이다.


대형 상가와 골목길의 공존


다양한 상점가는 어떻게 공존하는가?


전문가들은 일본 골목상권이 각기 다른 정체성을 유지하는 이유를 전통적인 무라(村) 정신으로 설명한다.


공동체의 룰을 어긴 자에 가해지는 집단적인 제재 양식에 의해 철저히 지켜지고, 그 결과로 강력한 공동체 의식과 사상의 일체화를 강조하는 집단주의 문화가 확고히 구축된다.


일본은 상권 내 상인들 간 공동체 문화가 강해 임대료 자체 규제, 대형-소형 가게 상생 등 사회적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한다.


상생 노력이 가장 드러나는 부분은 상점가들의 고유 영역 존중이다. 각 상점가는 다른 상점가의 업종이나 상품에 침범하지 않는다. 예컨대, 대형마트는 전통시장이 선점한 신선식품을 판매하지 않는 것으로 분업한다.


공간 디자인에서도 상호 존중 전통을 엿볼 수 있다. 임상균 동아일보 기자는 기치조지의 공동체 정신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골목길 속 유니클로 매장 (사진-김승훈)

"기치조지는 역에서 나와 백화점, 전문 쇼핑몰 등 대형 매장으로 가려면 반드시 전통 상점가를 지나도록 설계됐다. 법으로 대형 매장이 골목 상권과 몇 미터 이상 떨어져야 한다거나 역을 중심으로 전통 시장과 현대식 상가의 위치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치조지의 이런 구조는 도시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현대식 유통 업체와 골목 상권이 공존하면서 다양성을 갖춰야 한다는데 도시 전체가 공감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물론 공동체 규범이 자율적으로만 집행되는 것은 아니다. 상인들은 상인회를 구성해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관련 지자체는 물론, 다른 상점가의 상인회, 지역 주민회 등과 협력하는 거버넌스 체제를 구축했다.

상권 거버넌스에서 지역 주민들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기치조지 상점가 주변에는 양호한 환경을 갖춘 주거 지역이 있어 상점가와 지역 전반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관심도가 높다... 지역 내 치안 및 안전 문제에 민감하기 때문에 안전한 마을 만들기를 위한 활동에 적극적이다... 실제로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반대로 유흥업소 입지가 무산된 사례도 있다."


젠트리피케이션 없는 골목상권의 성장


도시계획 관점에서 가장 부러운 점은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재다. 도쿄에서 주목받는 상권임에도 젠트리피케이션 논란은 들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공동체 문화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건물주와 상인들 간 공동체가 형성되어 비공식적인 임대료 규제가 작동한다.


둘째, 기치조지의 대지주는 사찰이다.


사찰 소유지가 많아 토지 매입을 통한 상가 개발이 어렵다. 사찰의 비영리적 특성으로 임대료가 급상승하는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셋째, 상권의 무분별 팽창을 견제하는 주민들의 노력이다.

이곳에서는 주거 건물을 상업 용도로 쉽게 전용해주지 않아 프랜차이즈 업소의 대규모 진입을 어렵게 만든다.


넷째, 1991년 버블이 터진 이후 지속된 부동산 침체는 구조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기 어려운 환경을 만들었다.


이 중 경제학 관점에서 흥미로운 요인은 부동산 경기의 침체다. 1980년 후반 일본 부동산 시장 버블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버블이 터진 후 도쿄에서는 주택 가격이 최고 90%, 상업용 토지 가격은 99%까지 하락했다.


도쿄와 기치조지의 공시 지가 추이


1980년대 이후 도쿄와 기치조지의 공시 지가 추이가 포스트 버블 시대에 부동산 경기 침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993년 이후 도쿄와 기치조지의 공시 지가가 급격히 하락해 2016년까지도 회복하지 못했다.


상가 임대료도 비슷한 패턴을 보여, 1990년대 초반 급락한 후 그후 계속 정체됐다. 2008-2015년 사이 도쿄 주요 상가의 1층 매장의 임대료는 오히려 평당 53,000 엔에서 43,000 엔으로 하락했다.


2015년 취임한 아베 신조 수상이 경기부양책을 가동한 이후 도쿄 부동산 시장은 30년 가까운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 전에는 건물주가 임대료를 인상할 수도, 임차인을 골라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임대차 시장의 불황 속에서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은 발생하지 않은 것은 경제학적으로 당연한 결과다.


개성과 분위기를 판매하는 기치조지전문점들 (사진-김승훈, 박상애)


기치조지의 미래, 공동체 문화로 지켜내야


부동산 시장의 장기 불황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성공적이었던 기치조지 모델이 미래에도 유지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낙관할 수 없다. 한 언론 기사에 따르면, 2016년 이후 관광객 급증으로 하모니카 요코초에 패밀리 레스토랑과 같은 기업형 업소가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


도쿄 부동산 시장이 살아나면 기치조지도 다른 글로벌 도시의 프리미엄 상권과 같은 궤적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 뉴욕과 런던의 많은 상권은 임대료 상승으로 지역 정체성을 상징하는 독립 가게는 다른 지역으로 떠나고 명품이나 대기업 가게만 남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치조지를 응원하는 이웃나라 시민으로서 필자는 장인 정신과 공동체 문화의 힘을 믿고 싶다. 사찰, 주민, 상인회 등 많은 공동체 주체들이 활동하고 있는 기치조지는 모든 골목상권이 지향해야 하는 장인 공동체 모델을 상징한다. 이 도시가 정체성을 지키지 못한다면 다른 그 누구도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부동산 침체의 여건 속에서 완벽한 골목상권으로 성장한 기치조지. 이 도시가 상생의 노력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위협을 지혜롭게 헤쳐나가길 기대해본다.




임상균, 도쿄 비즈니스 산책, 한빛비즈, 2016

임화진 외, "상업지역 활성화를 위한 협력적 거버넌스 형성에 관한 연구." 국토계획, 2015

이채리, 도쿄 일상 산책, RHK, 2014

Business Journal, "横丁の危機!若者大挙で トラブル続出," 20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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